△찰이전존안(札移電存案)
찰이전존안은 1894년 음력 8월 10일부터 1896년 1월 21일까지 의정부와 지방관아, 조선 주재 일본공사관 사이에서 주고받은 공문서와 전보문을 의정부 기록국에서 보관용으로 작성한 문서철이다. 도찰원(都察院)에 보낸 찰위(札委), 학무아문 내무아문 탁지아문 등에 보낸 공이(公移), 각 감영에 보낸 전기(電奇), 각 감영·감사에 보낸 전문(電文)과 조회(照會), 각 감영·감사가 의정부로 보낸 전문, 일본공사가 의정부에 보낸 전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동학농민군 토벌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제2차 봉기 이후 전국 각지 동학농민군의 활동, 공주 우금치전투 이후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농민군 핵심 인사들이 체포되는 상황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외에 청일전쟁 관련 사실도 많이 기술되어 있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이 군표(軍票)를 지불하고 개인의 토지를 수용하는 사례도 확인된다. 일부 지역에서 일본군의 토지사용료 미지급이 문제였다. 예컨대 9월 부산을 통해 북상하는 일본군은 경북 달성에 머물던 기간 주민의 밭을 차용하여 매 1두락에 도조(賭租)로 6냥씩, 즉 전(田) 38두락에 228냥을 주기로 하고 대구사령부에서 증표를 만들어 주었다. 이 표는 정식 발매된 군용수표라기보다는 일종의 약속어음 형태의 보증서로 보이는데, 지역 병참사령부에서 그마저도 태환해 주지 않아 민원으로 남았다. 다음 해 1월까지도 지불하지 않아서 주민들이 달성 판관에게 소장을 올린 바 있다.
찰이전존안에서는 특히 충청도와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성세는 중앙군과 지방 감영병으로서는 ‘이과적중(以寡敵衆)’의 형세로 기록하고 있다. 경상도의 경우 이와 마찬가지로 11월 21일 진주 토포사에 의하면 하동·곤양·단성·진주 일대는 마치 “밥에 파리가 몰려드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듯이 농민군의 세력이 강하여 지방관이 일본 군대의 주둔을 ‘엎드려’ 원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농민군 토벌차 현지에 출동한 중앙정부군이 일본군에 의지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내용도 많이 보인다. 예컨대 10월 21일 자 영남 토포사가 관찰사에게 보내는 전보에, “일본군이 철수하려고 하는데 이곳에는 지킬 군대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하동과 곤양 등지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없다면 재앙이 이어질 것이니 이 전보를 의정부에 전달하여 죽을 지경에 처한 수많은 생명을 구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내용 등이다. 관찰사도 의정부에 “지금 일본군이 주둔할 때 잠시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는데, 더욱이 일본군이 철수한 뒤에는 어떠하겠습니까?”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는 11월 초 10일 전보에 “(일본군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근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11월 17일 전라좌수영도 정부에 전보하여, “군량은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은 오지 않고 동도(東徒)가 와서 포위하여 위태로움이 조석 간에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일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신속하게 동도를 토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간청한 바 있다. 조선 정부의 일본군 의존 정책은 이듬해까지 이어져 1895년 1월 전라감사는 “지금 이노우에 공사가 일본군 진영에 보낸 전보를 보니, ‘일본군을 철수시키고, 경군도 모두 돌아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지금 군사를 철수한다면 재앙이 뒤를 잇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다시 3~4개월 동안 연장하여 인심이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지방관이 제자리에 선 뒤에 점차 철수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노우에 공사와 의논하여 대대장에게 다시 전보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정부에 전보하기도 하였다.
농민군 핵심 지도자 김개남과 전봉준·손화중의 체포 상황도 생생하다. 강화 진무영 병사가 전라도 태인에서 체포한 김개남은 참수하여 그 수급(首級)을 순무영에 보냈고, 순창에서 사로잡은 전봉준은 임실 수령과 일본군이 압송하여 금강을 건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정부에서는 “김개남은 무슨 이유로 (목을) 베었는지 상세하게 알려 달라. 전봉준이 잡혔다고 하는데, 반드시 수레로 데려와서 유지(有旨)를 받들어라”고 전라감사에게 전보하였다. 고창에서 체포한 손화중은 옥에 가둔 후 일본군에게 보내 압송토록 전라감사에게 전보하였다. 농민군 주력이 진압될 무렵 충청도에서는 남학(南學)과 그 다른 일파인 북학(北學)·서학(西學, 천주교) 등이 성행하여 충청감사가 이를 금지하자고 주장한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의 농민군 토벌에 편승하여 과거 농민군과 계급적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지방 양반과 유생을 중심으로 한 민보군(民堡軍)·유회군(儒會軍),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는 무리 및 보부상(褓負商) 등 수많은 반농민군(反農民軍)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도처에서 패잔 농민군을 색출하여 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충청감사는 이들이 동학을 토벌한다면서 양민을 침탈하는데도 불구하고 막을 수가 없다고 토로하였다. 또한 향약(鄕約)과 5가작통·10가작통의 작통제(作統制)를 실시하여 패잔 농민군을 숨겨주거나 이들에 협조하는 기미가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얽어매었음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청국으로 보내는 인부의 징집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 임명된 평안감사 김만식은 의주에서 일본 군대를 영접하고 군수품 수송과 인부의 차출을 끝마치고 평양으로 되돌아온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직전인 1895년 4월 12일까지도 주롄청(九連城)으로 보내는 인부 1,081명과 안동현 행 선박 10척 등 조선인 인부와 조선 선박 동원은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청국 관내로 진입한 일본군 위문 사절로 군부대신 조희연 일행이 청국 진저우(金州)에 도착하여 뤼순(旅順)·웨이하위웨이(威海衛)를 거쳐 다롄만(大連灣)에 돌아왔다는 전보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이후에는 잉커우(營口)로 향한다는 군부대신의 전보도 수록하였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계초존안(啓草存案)
계초존안은 의정부에서 1894년 7월 21일부터 같은 해 11월 20일 사이의 계초(啓草)를 의정부 기록국에서 모아서 베껴 놓은 것이다. 중요 내용을 보면, 먼저 8월 1일 전주의 사민(士民)들이 연명으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올린 소장의 여러 조항 가운데 국가 재정과 관련하여 처분을 바라는 7개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1. 엽전 5만 냥을 불에 탄 가호에 빌려주어 5년을 기한으로 나누어 갚는 일. 2. 계사년(1893) 각 면의 세미(稅米) 중 아직 거두지 못한 5,516석을 전례에 따라 매석 당 25냥씩 거두어들이고, 부내(府內) 4개 면에서 거두지 못한 520석은 특별히 감면하는 일. 3. 과거 각 연도의 미납한 쌀과 콩을 상정가(詳定價)로 대신 징수하고 군포(軍布)는 돈으로 대신 징수하는 일. 4, 보세(洑稅)와 잡세(雜稅)를 혁파하는 일. 5. 진결(陳結)에 대한 조세를 기한을 정하여 다시 감면하는 일. 6. 전운소(轉運所)에서 새로 만든 잡비와 양여미(量餘米, 정량을 넘게 거두는 쌀)를 시행하지 않는 일. 7. 균전답(均田畓, 결세를 고르게 하는 전답)에서 도조를 지나치게 거두는 것과, 마름과 하인들의 폐단을 금하는 일 등이다. 이에 대한 김학진의 처분 제안과 국왕으로부터 윤허를 받았다는 내역까지 소개하고 있다.
9월 15일 경상감사 조병호의 장계 내용도 수록하였다. 이는 1. 도내 환곡의 총액 가운데 포흠(逋欠)이 누적된 11개 고을과 역참의 포흠은 탕감해 주고, 통영의 환곡 폐단은 모두 바로잡는 일. 2. 진결(陳結) 1만 1,703결을 영구히 탈급(頉給)하는 일. 3. 결가(結價)는 금전으로 납부하고, 운반비는 될수록 적게 납부하며, 정비(情費)와 잡비는 받지 않는 일. 4. 진상(進上) 물품과 전문(箋文)을 올릴 때 거두는 정비 징수를 금지하는 일. 5. 재해를 입은 50여 고을의 공납(公納)은 내년 가을까지 미루고, 양호의 세미(稅米) 수만 석을 우선 이전하는 일. 6. 각 역에서 사복시(司僕寺)의 입파(入把)에 보충할 말의 세전(貰錢)은 수량을 줄여서 정식으로 삼고, 공조(工曹)의 도롱이와 언치[言赤]는 혁파하는 일. 7. 전운소에서 징수하는 것을 대전(代錢)으로 징수하면 운반비 및 여러 가지 폐단이 변통될 수 있다는 일. 8.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를 사실대로 조사하여 바로잡는 일. 9. 남영(南營)의 병사에게 지급하는 급료의 부족액을 모종의 공전으로 지정해 붙이는 일. 10. 도내 백성들의 소요 원인은 규정 외에 추가로 징수하는 데에 있으니, 여러 폐단을 차례로 바로잡는 일 모두를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계초존안에는 집강소와 제2차 봉기와 관련한 동학농민군 활동 상황을 자세히 기재하고 있다. 예컨대 수천 명이 전라우수영의 군기와 금전을 빼앗아 간 일, 전라감영 군사마 송인회와 군관 김성규가 농민군을 타이르고 귀화에 힘쓴 공으로 수령으로 임명하라는 전라감사 김학진의 건의, 경상도 성주와 예천 및 경상도 서남부 지역의 농민군 상황, 전라도 남원과 경기도 지평 농민군의 활동 상황 등이다. 이 기간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달리 전개되던 민란 상황도 소개하고 있다. 경상도 영천 민란으로 영천 안핵사 이중하는 이 지역 백성들의 소요는 원인이 3가지로, 첫째, 결세(結稅)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며, 둘째, 관아의 정사가 탐오한 것이며, 셋째, 명례궁(明禮宮)의 보세(洑稅)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에 출병한 청국군의 동향도 기재되어 있다. 즉, 성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청국군이 우회로로 평양으로 가는 기간 새로 집권하게 된 갑오 개화파 정부는 우마와 군량·마초 등을 민간에 배당해서 거두어 청국군에게 제공한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 등의 추고(推考; 죄상을 심문하여 추궁하는 일)를 계안으로 청하여 국왕의 윤허를 받게 된다. 지방관에 대한 정부의 이와 같은 징계 조처는 사후 미봉책에 불과했는데, 이 내용은 조선 정부가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원산 주재 영사의 보고를 받은 일본 정부의 훈령에 따라 일본공사관에서 조선 정부를 강박하여 진행된 것이다.
한편 청일전쟁 기간 서북 지역 지방관 처벌 관련 문제도 이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서흥부사 홍종연은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양국 맹약」을 위배하고 일본군을 모함하였다는 혐의로 일본군 제5사단에 일시 구금되어 있다가 외부대신 김윤식의 항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곧바로 조선 정부로부터 공식 파면된 내용의 전말이 계초존안에 수록되어 있다. 신임 평안감사 김만식은 평양중군 이희식, 강동현감 민영순과 숙천부사 신덕균, 영변부사 임대준, 안주목사 김규승, 성천부사 심상만, 상원군수 이국응, 병우후 김신묵과 대동찰방·자산부사 등 평양 전투 전후 청군에 협조하거나 관인을 버리고 임지에서 이탈하여 도망간 지방관의 파직 처벌을 청원하여 윤허를 받았다.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에게 늦가을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마료(馬料)의 보충과 방한용 신탄(薪炭) 조달이 필요함에 조선 정부를 통해 선유사 권형진에게 특별한 직권을 부여하고 충분히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청구할 것을 조회한 바 있었다. 야마가타는 공사 이노우에에게 현재 ‘대징발’ 중이므로 권형진이 의주를 떠나면 큰 지장을 일으키게 되므로 계속 체류시키도록 조선 정부에 조회토록 하였다. 그 결과 권형진은 반접관(伴接官)으로, 전 사과 김응옥을 반접종사관(伴接從事官)으로 임명하여 관서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을 접대하면서 그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협조에 전담토록 하였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