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언덕 쪽에 머리를 둔다고 한다. 필자도 요즘 들어 고향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아무래도 나이 탓이 아닌가 싶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는 연말연시가 되면 고향에 대한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 특히 향우회 모임이 빈번해지는 연말이 되면 더더욱 그러하다. 재경 진안군향우회는 지우려 해도 지워낼 수 없는 화인처럼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용광로처럼 뜨거웠던 젊은 날의 한 부분을 차지한 채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눈에 선하다.
재경 진안군향우회 제1차 결성과정
재경 진안군향우회의 1차 결성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제1차 창립준비과정은 1971년 초 정동MBC 근처 식당에서 김종희(경희대 신방과 4년, MBC아나운서 합격 실습생), 김문종(단국대 경영학과 재학, 현 진안농협조합장), 이상옥(중앙대 신방과 재학, 재경 전북학우회장)이 모여 “왜 우리 진안군은 출항민들이 많은데 타 시군처럼 향우회가 없느냐, 향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당시 필자는 전휴상(국회 3선의원) 의원회관 및 창천동 자택을 방문하여 협의하였다.
그 후 백정금 국회 비서관을 소개받아 향우회 조직결성에 착수하였으며, 창립일을 그 해 4월 초로 하고 장소는 ‘종묘’로 정했다. 필자는 당시 향우회 준비 ‘연락동원부장’을 맡았으나, 지금처럼 휴대폰이 없는 시절에 재경 진안군민을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 서울지역을 동서남북으로 찾아다녔다. 진안군 향우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나 반가워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결과, 타향에서 마치 이산가족을 다시 만난 듯 감격과 감동으로 400여 명의 고향 선후배분들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재경 진안군향우회 창립식을 거행하였다. 이 창립식에서 전휴상 의원이 만장일치로 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 및 5월의 제8대 국회의원선거 (전휴상 의원 당선)후, 향우회 회장 및 백정금 비서관을 몇 차례 찾아가서 향우회 발전 문제를 상의했으나, 향우회가 활성화되지 못한 채 아무런 진전 없이 소멸되어 아쉬움이 컸다.
재경 진안군향우회 제2차 결성과정
향우회가 소멸된 지 20여년이 지난 1992년 초, 필자는 제2차 재경 진안군향우회 창립을 위하여 장사인(정천, 삼광교회 장로)씨와 김대규(정천, 경신고무 대표)씨를 만나 향우회 창립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협의하였다. 또한 정천출신의 임형철, 장병환씨 등 인맥을 연결하여 점차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의 향우회 창립 준비에는 진안읍 홍재형, 마령면 오재면, 백운면 전기권, 최영목, 주천면 고방원, 이영목, 백철욱, 성수면 윤영신, 부귀면 주우선, 장시찬, 동향면 성돈수, 안천면 한호종, 성흥수, 상전면 김호열, 용담면 김상용, 김진운씨가 참여하였다.
2차 재경 진안군향우회 창립에 있어 초창기에는 김대규 사장과 돈우회원 등의 도움이 컸다. 초대회장 추대과정에서는 우여곡절과 진통이 있었으나, 초대회장은 1회에 한하기로 합의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1, 2차에 걸친 재경진안군향우회의 창립 및 발전을 위한 준비과정에서 산파 역할을 하였다. 그 동안 향우회가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기까지 회장단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자랑스런 ‘재경 진안군향우회’와 회원님들 위에 무궁한 발전과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빈다.
/義山 이상옥 재경진안군향우회 고문·전 국회의원(진안무주장수)·(사)한중문화교류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