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서독(白石書牘)」
이 자료는 이용목(李容穆, 1826~?)의 편지를 모은 서간집이다. 이용목은 서울 출생으로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건명(李健命)의 후손이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일찍이 경상도 삼가(三嘉)에서 살다가 만년에 충청도 영동, 보은지방으로 이사하여 살았고, 1894년 당시에는 상주 장암(壯岩)으로 피난하였다.
그 자신은 출사하지 않았으나 사촌형 이용원(李容元)은 경상도 감사를 지냈고, 아들 중익(李重益, 重弼)은 보은군수와 무안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또 장흥부사로 재직 중 고부봉기가 일어나자 고부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수많은 불법 탐학를 저질러 전봉준 등 고부 일대의 민중을 자극한 이용태(李容泰)가 그의 삼종제(三從弟)이다. 「백석서독」에는 이처럼 관직에 진출해 있던 아들이나 친인척이나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이 실려 있다. 특히 아들 중익과 주고받은 서신에는 1893년 3월의 보은집회이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내용이 다수 들어있다.
아들 중익은 1892년 1월부터 충청도 보은 군수에 재직하였으며, 재직 중 보은집회를 겪었다. 1894년 1월 무안 현감으로 전보되어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전라도 무안 군수로 재임하였다. 보은집회 당시에는 선무사 어윤중과 함께 1893년 3월 26일과 4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집회에 모인 동학교도 및 일반 민중을 찾아가 효유하고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또 「백석서독」에는 동학농민혁명 시기 무안 현감으로 근무하던 아들 중익과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무안 및 전라도 일대 농민군의 동향을 알려주는 내용이 일부 실려 있다.
「백석서독」의 내용 가운데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을 몇 개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보은집회 개최 직후 집회를 주최한 교도들이 보은 공형(公兄, 아전)에게 글을 보내 집회에 따른 보은 주민들의 불편에 대해 양해를 구한 사실이다. 동학교도들은 척왜양을 하려한다는 자신들의 뜻을 민간에 알려 놀라서 동요하는 일이 없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취어」에만 나오는데 그 내용에 조금 차이가 있다.
보은집회에서는 보은, 상주 등의 수령과 향리들에게 군량과 군기를 내놓을 것을 독촉하고, 인근의 토호와 부민들에게도 통문을 보내 군량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백석서독」의 저자 이용목도 3월 22일 밤 동학교도들로부터 백미 30석을 3일 이내에 보내지 않으면 곤란한 일을 당할 것이라는 ‘협박문’을 받았다. 또 「백석서독」에는 3월 23일 무렵 “호남과 호서의 교도들이 합진(合陣)하여 그 위세가 늠름하다.”라고 하여 금구의 교도들이 보은으로 와서 합세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다른 기록들에는 단지 이와 관련된 소문만 기록해두고 있을 뿐이다. 또한 다른 자료를 통해 보은집회의 민중들이 해산 후 서울이나 인천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백석서독」에는 3월 그믐 경에 해산하여 1대는 서울로 올라가고 1대는 동래로 내려가기로 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인 1894년 3월 11일 무안 현감으로 재임 중이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읍촌간의 양반집들이 심하게 모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분통하다.”라고 하였다. 또 3월 22일자 편지에서는 황간, 영동, 청산, 보은, 옥천 등지에서도 이미 3월 22일 무렵부터 농민군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서 ‘원한을 갚고 돈을 빼앗는’ 일, 그리고 사대부들 가운데 구타를 당하는 일이 많다고 기록하였다.
4월 13일 편지에는 회덕과 진잠 2개 읍이 농민군에게 군기를 빼앗겼고, 농민군이 공주의 유성을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5월 2일 무안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삼종제인 이용태가 안핵사 일을 잘못한 죄로 유배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1895년 지인 이천 수령을 지낸 김준군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백석서독」의 저자 이용목은 자기가 살던 마을이 ‘동비의 소굴’이 되자 아내를 아들 중익이 현감으로 있는 무안으로 피신시켰으나, 1895년 봄에 이르러 오래된 병이 위중해져서 갑자기 사망하여 직접 영결(永訣)하지 못한 애달픈 마음을 표하고 있다.
△『확재집(確齋集)』(경란록(經亂錄)」
『확재집(確齋集)』은 이범석(李範奭, 1862~?)의 문집이다. 저자의 자는 성백(成伯) 혹은 순좌(舜佐), 호는 확재이다. 아버지는 덕하(德夏)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의조(儀朝)의 딸이다. 저자는 충청도 아산 출신으로 16세 때 감영의 복시(覆試)에 뽑혀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 이후 귀향하여 향리에 은거하였다. 개화파와 맥을 같이 하던 이범석은 이후 1901년 외부주사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길주감리서 주사를 거쳐 통상국(通商局) 과장, 양근 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이후에는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은 확재집 8권에 실린 「경란록」에 들어있다. 「경란록」은 1862년부터 1926년에 이르는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기사는 중요한 사건이 있던 해에만, 사건의 주요 내용과 그에 대한 논평을 남기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경란록」은 그가 ‘난시(亂時)에 나서 자라고 늙었다’고 말하듯이 자신이 살아있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평가해 놓은 일종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1862년 일어난 농민항쟁(임술민란)과 영해에서 일어난 이필제란(1871)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였다. 이범석은 민란의 원인을 “수령들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오로지 탐욕만을 부려 백성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 경복궁 중건(1864), 오페르트 도굴사건(1866), 개항(1876), 안기영‧이재선 역모사건(1881),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64) 등을 다루었고, 광화문 복합상소와 보은집회(1893) 등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에 대해서는 고부봉기 가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 탐관오리들을 벌하지 않고 헛되어 ‘난민’들만 다스렸으므로 민중이 모두 동학에 입도하였고, 전봉준이 그들을 모아 당을 만들어 호남 전 지역에서 창궐하였다고 지적했다. 또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했을 때,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스스로 왕호를 칭했다[自建國號 自稱王號].”라고 한 내용은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음에는 저자가 아산의 향제로 돌아와서 겪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의 경험을 수록하고 있다. 아산 일대에서는 농민군에 의해 양반가의 분묘가 강제로 파헤쳐지는 일이 많았다. 이범석 본인의 집도 말과 돈을 뺐기는 등도 여러 번 ‘토색질’을 당하였고, 특히 마을 사람들이나 ‘상놈’들이 모두 농민군에 가담하고 노비들도 모두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를 모두 면천(免賤)해 주었으며, 직접 물을 길고 장작을 패서 밥을 지어 먹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글의 맨 마지막에 있는 「담평(談評)」에서 동학농민혁명[‘湖南民亂’]은 조선의 군대로 진압했어야 하는데, 조정에서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웃 나라의 군대를 빌린 것이 결국 청일전쟁의 단서가 되었음을 지적한 부분도 눈에 띈다. 군데군데 오류도 적지 않으나,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이나 의미를 19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대내외적 위기 상황과 연결하여 파악하고자 한 저자의 접근도 매우 흥미롭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