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팔 청춘] "옛날, 옛날에"⋯'13년차 에이스' 이점식 할머니가 떴다

10년 활동 후 연장 평가에 합격해 3년 추가 활동
'13년차' 된 이점식 이야기할머니, 올해 은퇴 예정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해 행복⋯벌써 내년 걱정"

지난 5일 인후유치원을 찾은 '이야기 할머니' 이점식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박현우 기자

"나와라, 뚝∼딱!"

지난 5일 오후 2시께 찾은 전주시 덕진구 아중리에 위치한 인후유치원. 유치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헀다. 조심스럽게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옹기종기 매트 위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읽어 주는 할머니가 있었다.

마치 어릴 적 할머니가 무릎을 베고 누운 손자에게 "옛날, 옛날에"를 속삭이는 듯했다.

이날 이야기는 <바다를 이용한 이순신>, 아이들에게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흐트럼 없이 집중한 아이들이었다. 오늘 이야기가 끝났다고 외치자마자 할머니, 아이들, 선생님들까지 함께 율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잘 들었어요/우리 모두 마음이 따뜻해졌어요/귀는 쫑긋/눈은 반짝/정말 좋아요/하나, 둘, 셋, 넷/다시 만나요/빵빵!"

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할머니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주에 만나자면서 할머니와 인사를 나눴다. 이 할머니의 정체는 '이야기 할머니'였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진행하는 '이야기 할머니'는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사업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3000여 명의 이야기 할머니가 활동할 정도로 할머니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지난 5일 인후유치원을 찾은 '이야기 할머니' 이점식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박현우 기자

오늘의 주인공 이점식(77)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할머니는 10년 활동 후 연장 평가에 합격해 3년을 추가로 활동했다. 벌써 13년차,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게 된다.

이 할머니는 일주일에 사흘, 곱게 옷을 차려입고 아이들과 만난다. 13년 동안 반복된 일상이 지루할 만도 하지만 '이야기 할머니'는 이 할머니 삶의 원동력이었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아이들과 소통하는 일, 이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다고 말할 정도다.

이 할머니는 "13년 동안 행복한 일이 참 많았다. 곱게 화장하고 옷을 차려입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들이 다 행복했다. 돌이켜보면 매일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을 정도로 행복하고 좋았다"고 말했다.

하루의 시작은 항상 이야기 할머니였다.

이 할머니는 아침 6시에 눈을 뜨면 정신이 깨지도 않은 상태지만 이야기를 외우기 시작한다. 외워야 하는 분량은 책 3쪽, 문장이 비슷비슷하다 보니 이야기를 암기하는 게 어렵지만 외울 때까지 읽고 또 읽는다. 옆에는 항상 빨강과 검정 펜을 둔다. 어려운 문장이 나오면 군데군데 줄을 긋고 필기도 한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이 일상을 반복한다.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많이 외워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 앞에서도 술술 이야기할 수 있다. 후딱 외워지지 않은 때도 많지만 계속 반복하는 게 답인 것 같다. 다 외우면 벽에다가 시연해 보고 아이들 만나러 가는 길에도 외운다. 이걸로 세월을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이렇게 열정적이었던 이 할머니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이야기 할머니'를 정리하게 된다. 아직 반 년이 남았지만 걱정이 크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무기력해질 테고 다른 데에서 일하기는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는 "내년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다. 이전에 코로나19 때 잠깐 '이야기 할머니'를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얼마나 삶이 무기력했는지 말도 못 한다. '내가 왜 이러고 살지?'라는 생각까지 했다"면서 "내가 젊은 나이면 다른 일이라도 하겠는데 나이 생각하면 정말 갈 데가 없다"고 토로했다.

지난 5일 인후유치원을 찾은 '이야기 할머니' 이점식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박현우 기자

이 할머니가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13년 동안 일하면서 쉬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항상 행복했던 이유, 바로 살아 있음을 느껴서다. 사실 이 할머니는 평생 남매 키우고 남편 내조하며 살림만 하고 살았다. 그때는 다 그렇게 사나 보다 생각하면서 지냈던 이 할머니에게도 남몰래 품고 있던 꿈이 있었다.

입으로는 '허황된 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꿈을 하나씩 나열하는 이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폈다. 들어보니 꿈도 많았다. 결혼하기 전, 결혼한 후, 자식들 다 키운 후. 꿈이 다 달랐다.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지금 태어났다면 이렇게 이름 없는 할머니로는 안 살았을 거라고."

꿈도 많고 열정도 많았던 이 할머니는 취재진에게 수줍게 꿈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승무원, 꽃집 사장, 택시 기사. 공통점 하나 없는 직업들이지만 이 할머니의 눈에는 이 직업들이 멋있게 보였다. 이리 많은 꿈을 안고도 이루지 못한 터라 이 할머니는 지금을 살아가는 청춘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다.

그는 '인생 조언'을 물어보는 말에 "젊은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가 정말 인생에서 최고로 좋은 때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가 됐든 해 보길 바란다. 가만히 있지 말고 뭐든지 배우고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면서 "열심히 즐기고 일도 하면서 젊음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