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챗지피티 등의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아무 사진이나 지브리 스타일로 바꾸는 것이 유행이었다. 지브리의 작품을 보면서 어린 시절 보내고 성인이 되어서도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의 작품을 사랑하는 나는 이 유행이 아주 역겨웠다. 지브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나, 창작에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해서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특히 보기 힘들었다. 그것들은 지브리 스타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악했다. 다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보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좋아한 지브리의 작품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의 묘사를 어설프게 흉내 내고 누런색 필터를 씌운 그림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이런 걸 만들어서 SNS에 올리는 게 도대체 뭐가 즐거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공지능을 위해 소모되고 있는 막대한 에너지와 자원이 아까웠다.
유행이 지나가고 분노가 식어도 이때의 경험은 계속 생각해야 할 주제로 남았다. 저작권과 창작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너무 빨리, 너무 쉽게, 너무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조차 쉽고 빠른 소비문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또 어떤 방식이든 계속 창작을 해 나가고 싶은 사람으로서, 창작의 입지가 계속 좁아지고 있는 것 같아 슬펐다. 특히 지금 쓰고 있는 시를 계속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이미 좋은 시를 써나가는 사람이 있고 아마 그들의 시를 학습한 인공지능은 나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쉽게 그렇게 좋은 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이 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계속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샹바오 막스플랑크 사회인류학연구소장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그 인터뷰에서 샹바오는 인공지능이 권위 있는 목소리의 모방을 대신해 주는 기계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인터뷰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지만, 다 읽고 나니 인공지능이 쓰는 문학은 스스로 열화되어 조악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많은 고민이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글쓰기는 권위를 가진 글을 더 세련되게 모방하고자 하는 힘과 기존의 세계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반대쪽으로 튀어 나가려는 힘의 줄다리기였다. 그런데 그 모방을 이제 누구나 아주 쉽고 빠르게 할 수 있어 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물론 그 모방을 위하여 글을 읽고 여러 생각을 흡수한 것과 그 과정들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생각에 도달하자 나를 사로잡았던 답답함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왜 만드는지에 대한 고민을 아직 포기하면 안 될 것 같다. 불편하고 두렵더라고 만들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항상 곁에 두려고 한다. 모든 것이 과잉 생산되는 오늘날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조금이라도 의미를 가지기 위해 이 고민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슷하고 무난한 것은 이제 아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이 글을 썼다. 그것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아주 쓸모없는 곳에 퍼붓는다. 그러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이 혼란만이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좋은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이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지 시험받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부디 괜찮은 미래가 있기를 빌어본다.
천기현 시집책방 조림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