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수군 출신 호국선열 6인의 추모기념사업회가 설립된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해외원정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장군과 의암 주논개 열사. 독립운동가 백용성 조사, 대동 의병장 전해산, 호남의병 선봉장 박춘실과 목숨 걸고 향교를 지켜낸 정경손 호성충복의 호국정신을 계승해 나가기 위해서 장수군에 살고 있는 후손들과 향교 유림들이 나섰다. 많이 늦은 감은 있지만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을사년에 호국선열들의 공적과 일대기를 제대로 알리고 자랑스런 장수군민의 자긍심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그 의미가 매우 크고, 출향인으로서 기쁨을 감출수가 없다.

고려시대부터 장수현은 이종무 장군의 시조부터 4대가 정승을 지낸 장수 이씨를 비롯해서 명문가 집안들이 모여 살았으며, 사화를 피해서 은둔생활을 하던 선비들이 향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인정 많고 살기 좋은 충효의 고장이다. 이종무 장군은 1360년 고려 공민왕 9년에 장수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무예가 뛰어났다. 1417년 의정부 참찬으로 봉직하던 중에 왜적들이 560척의 선단을 끌고 충남 비인에 침략하여 약탈과 만행을 자행한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태종은 1419년(세종대왕원년)에 60세의 이종무를 삼군도제찰사로 임명하였고, 이종무 장군은 태종과 세종대왕의 직접 전송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해외원정군(병선 227척과 17천명의 병사, 6개월분 식량)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왜군의 거센 저항을 물리치고 왜구의 본거지를 소탕한 다음에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낸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에는 왜구의 침탈은 일체 없었으며 조선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1425년도 향년 66세로 운명하자 세종대왕은 양후공 시호와 함께 ‘간성의 장수요 사직의 신하’라는 교서를 내리고 제를 지내고 계속 숭모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종무장군이 장수출신이라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을뿐만아니라 작은사당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위대한 호국정신과 공적들이 거의 잊혀져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있다.

의암 주논개 열사는 논개사당과 논개제전, 생가 복원과 기념관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논개가 진주 사람이고 기생으로 잘못 알고 있다. 시급하게 바로 정정해 나가야만 한다. 백용성 조사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불교계의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불교의 현대화를 이끌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였고, 윤봉길 의사에게 불교 계율을 전수하며 정신적 지주 역할도 하였다. 번암면에서 성장한 전해산 대동 의병장과 계북면 출신 박춘길 호남의병 선봉장은 1905년 을사조약후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선 자랑스런 호국선열이다. 호성충복 정경손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에 목숨 걸고 장수향교를 지킨 충복으로서 그 책임감과 용맹은 반드시 계승 되어야만 한다.

최근에 장수군의회 사무과장을 지낸 신인식 추진위원장과 유지들은 '장수호국선열 기념사업회'를 설립해서 이종무 장군의사당 건립과 장수애국선열 6인의 합동추모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장수군이 지역소멸 1위 고장이 아닌 ‘호국선열 문화유산 성지’로 도약해서 찾고 싶고 살고 싶은 장수군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본다. 애향심이 곧 애국심이다. 장수인들부터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고향사랑, 나라사랑에 앞장서자. 

/류영하 박사 전 국토해양부 고위공무원, 재경장수읍향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