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문학의 도시’를 도둑맞은 익산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

“전쟁이 나고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여기 익산에 와서 머물렀다. 한강 이남에서 그렇게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머물렀던 곳은 익산 말고는 없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만큼 익산은 문학의 전통이 굉장히 강했고, 익산하면 그냥 문학의 도시다.”

지난해 6월 오랜만에 익산을 찾은 박범신 작가는 익산이 ‘문학의 도시’였다는 걸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알다시피 그는 익산 남성고등학교를 거쳐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그는 남성고 문학반 시절, 겨울이면 익산의 모든 학교 문학반 학생들이 ‘문학의 밤’이란 이름으로 옛 광명예식장에 모여 서로의 시를 나누었던 기억도 꺼내놓았다. 그날만 되면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맨 앞자리에 쭉 앉아서 지켜보았다”다면서 “매우 문학적인 도시에서 성장했다”는 걸 그는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대학 선배인 윤흥길 작가는 여섯 살 때부터 익산에서 살았다. 지난해 대하소설 <문신>을 완간한 뒤 익산을 찾은 그는 누가 고향을 물으면 늘 익산이라고 답한다고 했다. 아홉 살 무렵이던 1950년, ‘미군의 이리역 오폭 사고’가 일어난 날 그는 친구와 쑥대밭이 된 역에 몰래 숨어 들어가 철근 끝에 매달린 시체를 보았다면서, 그날 본 광경이 ‘문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예순을 앞두고는 그동안 미처 쓰지 못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나온 작품이 <소라단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 곳곳엔 옛 신광교회 종탑을 비롯한 이 도시의 빛바랜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작가보다 한참 밑으로 안도현 작가가 있다. 고향인 경북 예천을 떠나 스무 살이던 1980년 어느 밤,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옛 이리역에 내렸다던 그는 "익산에 온 것 자체가 내 시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이른바 김춘수적인 시 쓰기를 배웠다. 언어를 갈고 닦는 것, 절제...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익산에 오니 알게 모르게 판소리 가락 같은 분위기들이 스며있는 게 딱 보이더라. 그래서 그걸 배우려고 노력하고 많이 훔쳤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당선됐는데, 이 도시에 살지 않았다면 결코 쓸 수 없는 시였다.

한때 원광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온 작가들이 한국 문단을 주름잡았던 시절이 있다. 오죽하면 ‘원광 문학 사단’이란 말까지 나왔겠는가. ‘문학’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익산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젠 모두 옛말이 돼버렸다. ‘문학과 책의 시대’가 저물어서일까. 이웃 도시 군산에서 2년째 열리는 ‘북페어’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또 전주가 연화정도서관, 다가여행자도서관 등에 이어 최근 아중호수도서관을 열어 ‘책과 도서관의 도시’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언제 적 박범신이고, 언제 적 안도현이냐는 말도 더러 듣곤 하지만 나는 이제껏 언제 적 톨스토이고, 언제 적 헤밍웨이냐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문제는 책과 문학, 또는 작가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다.

충남엔 ‘강경산 소금문학관’이 있고, 윤흥길 작가가 머물러 온 완주에도 최근 문학관을 지으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도시에도 ‘이리 문학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만 되면 익산에서 책방을 하는 나는 무언가를 도둑맞은 기분에 왠지 더 쓸쓸해지곤 한다.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