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경천면 불명산 자락에 자리한 화암사에 가는 길은 언제 가도 정겹다 . 봄에는 온갖 산야초가 피어나고 가을엔 울긋불긋 색색의 단풍이 손짓을 한다 . 개울도 건너고 새소리 물소리 들으며 걷다보면 어느새 절벽 앞이다 . 위를 올려보면 까마득하다 . 높다란 암벽 위에 화암사가 자리해 있다 . 고려의 시인 백문절이 화암사 가는 길을 읊으며 “ 화암사 운제 ( 雲梯 )” 라 시제한 것이 이해가 간다 . 지금은 철제계단이 놓여 오르기 쉽지만 옛날엔 절벽 사이를 붙들고 가야했다 .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운무 낀 날 오게 되면 구름사다리 , 운제를 타고 오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 이렇게 험한 절벽 위에 마치 요새처럼 화암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
△ 사대부가 같은 절집
높다란 철제계단을 올라 이어지는 돌계단을 밟고 가다보면 기와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 우화루가 사랑채인 양 서있다 .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이 ‘ ᄆ ’ 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 포근하다 . 정면에 극락전이 보인다 . 극락전은 주심포 건물로 다른 건물에 비해 조금 높게 지었다 . 그렇지만 높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주위의 건물과 잘 어울린다 . 현판도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한 자씩 작은 글자를 써서 걸었다 . 극락전 앞에서 우화루를 보면 2 층 건물이 마치 단층처럼 보인다 . 우화루의 마루가 마당과 연결되어 좁은 중정이 넓게 보인다 .
이처럼 모든 건물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다 . 심산유곡 외딴 곳에 있는 절이지만 이 안에 들어오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 심신을 수양하면서도 마음의 평안을 배려한 고단수의 건물 배치이다 .
△ 백제건축의 꽃 , 극락전
화암사 ( 花岩寺 ) 는 ‘ 바위 위에 꽃이 피어난 절 ’ 이다 . 그렇다면 바위는 어디이고 꽃은 또 무엇인가 . 화암사는 들어앉은 곳이 엄청난 암벽 위이다 . 그 바위에 피어있는 꽃은 극락전이다 . 극락전 앞 우화루에서는 꽃비가 내린다 .
극락전은 정면 3 칸 측면 3 칸의 맞배지붕으로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다 . 1980 년에 보물로 지정되었고 , 2011 년 국보로 승격했다 . 국보승격의 이유는 건축양식이 백제시대에 유행했던 하앙식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하앙식이라는 말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 전문적인 건축용어이기 때문이다 . 하앙 ( 下昻 ) 이란 지붕을 받쳐주는 서까래를 보조하는 부재의 이름이다 . 하앙식 건축의 원리는 이렇다 . 기둥 위로 하앙을 놓고 그 끝을 종보가 누르도록 설치한다 . 그런 후 하앙의 끝부분에 도리를 얹어 서까래를 설치한다 . 이렇게 하면 지붕으로부터 받는 하중이 하앙을 통해 기둥으로 분산되어 서까래를 길게 뺄 수 있다 . 이렇게 해서 지붕을 설치하면 비가 안으로 들이치는 것을 막아준다 . 한여름에는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기도 한다 . 이 같은 건축양식은 비가 많이 오는 중국 남부나 일본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
우리나라의 경우 하앙식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아 이 양식이 도입되지 않았는지 , 아니면 중간에 다른 양식으로 바뀌어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 그러다 1970 년대 화암사 극락전을 조사하면서 이 건물이 하앙식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 이는 백제로부터 하앙식 건축양식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은 앞면을 용머리로 장식했다 . 반면 뒷면은 용의 꼬리를 의미하는 삼각형 모양으로 단순화 했다 . 이는 하앙 하나하나가 용이라는 뛰어난 조형감각으로 디자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러한 모습을 풍판 아래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 용의 머리가 조각된 하앙이 기둥 위에 설치되어 종보가 그 끝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 확연히 보인다 . 이 용의 몸통은 맞은편 종보에서 뒤쪽의 꼬리로 이어진다 .
우리나라에서 하앙식 건축물이 발견되지 않았을 때 일본학계에서는 하앙식 건축양식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곧바로 들어왔다고 주장해 왔다 . 그런데 화암사 극락전이 하앙식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에 전수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 이처럼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 건축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건축물이다 .
△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과의 인연
절벽 위로 이어지는 우화루 앞길로 가다보면 절벽 끝에 화암사중창비가 서있다 . 이 비는 1425 년 ( 세종 7) 에 화암사를 중창했던 내력을 적었다 . 전라감사로 부임해 온 성달생 ( 成達生 , 1376~1444) 이 자신의 원찰을 세우고자 절터를 물색하던 중 , 이곳이 길지라는 말을 듣고 중창의 대단월을 자청했다고 한다 . 성달생은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의 조부이다 . 1429 년에는 입조한 딸의 액막이를 위해 화암사에 다시 왔는데 이때 절의 내력을 적은 목판에 화주가 달생으로 적혀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이름과 같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여 더 많은 보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화암사중창비는 이처럼 화암사를 다시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던 성달생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 그런데 비문 중에 ‘ 입조 ( 入朝 ) 한 딸의 액막이 ’ 를 위해 화암사에 다시 왔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
『 조선왕조실록 』 세종 9 년 (1427) 7 월 20 일자에 명나라에서 요구한 조공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 명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 말 5 천 필과 명나라 황실로 보낼 여자아이 7 명 , 그리고 다반 ( 茶飯 ) 을 지을 줄 아는 부녀 10 명을 조공으로 요구해 왔다 . 이러한 요구에 황실에 보낼 여아 중의 한 명으로 공조판서 성달생의 딸이 간택되었다 .
이 기록으로 볼 때 ‘ 입조한 딸의 액막이 ’ 라는 표현은 명나라 황실에 공녀로 바쳐진 성달생의 딸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기도의식을 의미하는 것 같다 . 이러한 간절함의 표시였을까 . 성달생은 화암사의 불경간행에도 열심이었다 . 달필인 성달생이 사경한 불경이 안심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 발간되었음에도 성달생은 화암사의 『 묘법연화경 』 간행을 주도했다 . 성달생과 임효인 , 조절 등 세 사람이 1432 년부터 4 년 동안 글씨를 쓰고 , 화암사의 승려들이 1435 년부터 8 년 동안 판각해서 드디어 1443 년 7 권 2 책으로 된 『 묘법연화경 』 이 간행되었다 . 성달생이 타계하기 1 년 전이었다 .
△ 사당이 공존하는 화암사
이렇게 큰 업적을 남긴 성달생을 기리기 위해 화암사에서는 극락전 옆에 그의 사당을 지었다 . 한 칸짜리 아담한 집 철영재 ( 啜英齋 ) 이다 . 사당의 현판글씨는 조선 후기 시서화 삼절이었던 자하 신위 ( 申緯 , 1769~1847) 가 썼다 . 철영재란 ‘ 꽃차를 마시는 집 ’ 이란 뜻이다 . 우화루에 꽃비가 내리듯 이곳에서는 꽃차를 마신다 . 이래저래 화암사는 절 이름부터 온통 꽃이다 . 꽃차는 성달생이 간행한 부처님의 말씀 , 불경을 의미한다 . 이러한 성달생의 업적을 마음속에 새기며 절손된 그의 후손을 대신해 봉제사를 지내는 곳이 철영재이다 .
성달생의 아들인 성승과 손자인 성삼문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부자가 함께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 조선시대 반역죄는 삼족을 멸하는 중죄로 성삼문 가문은 이로 인해 멸족을 당해 후손이 끊어졌다 . 이런 상황에서 봉제사는 누가 하겠는가 . 그 역할을 화암사에서 수행해오고 있다 . 유교의 상징인 사당이 절집에 공존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낯설지만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화암사의 사풍을 엿볼 수 있다 . 꽃으로 둘러싸인 화암사 . 화암사가 왜 화암사인지 알 것도 같다 .
손상국 프리랜서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