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한국에 26만장에 달하는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블랙웰(GB200)'을 공급하기로 하면서 엔비디아에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납품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에 대부분의 HBM 물량을 공급해오던 SK하이닉스에 이어 삼성전자가 핵심 공급 파트너로 떠오르면서 시장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과 SK는 엔비디아로부터 블랙웰 GPU를 각각 5만장씩 공급받기로 하고, 엔비디아와 AI 팩토리를 구축하는 등 폭넓은 협의를 하기로 했다.
여기에 정부에서 5만장, 현대차그룹 5만장, 네이버클라우드 6만장까지 합치면 엔비디아가 한국에 공급하게 될 GPU는 26만장에 이른다.
블랙웰(GB200) 1개당 최신 HBM인 'HBM3E(5세대) 12단'이 8개가 탑재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26만장 블랙웰에 탑재되는 HBM3E는 208만개 수준이다.
무엇보다 엔비디아와 파트너십을 통해 공급이 결정된 26만장의 GPU가 국내 'AI 팩토리' 구축용인 만큼 여기에 들어가는 HBM은 미국 마이크론을 제외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부 납품할 가능성이 유력하다.
업계 관계자는 "마이크론도 엔비디아에 HBM3E를 공급하고 있지만 이번 26만장의 물량에는 사실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며 "GPU를 우리가 사 오는 입장이긴 하지만 HBM 공급 활로를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208만개에 이르는 HBM 물량 확보는 단순 양사의 매출 확대 외에도 여러 긍정적 영향을 낼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내년에도 부족할 것으로 보이는 HBM 공급 상황을 타이트하게 유지해 HBM 가격 방어 및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HBM3E 12단의 경우 매년 계약마다 금액이 변동하지만, 업계에서는 통상 300달러 내외로 추산한다. 208만개는 9천억원에 달하는 규모다.
이뿐 아니라 '국산 HBM'을 사용한 GPU를 활용함으로써 정부의 소버린 AI 정책에 AI 인프라 자립이라는 프레임을 강화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또 6세대 제품인 'HBM4'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핵심 공급사로서 입지를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그동안 HBM 시장에서 부진했던 삼성전자가 이를 계기로 강한 모멘텀을 확보했다는 설명이다.
엔비디아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당사의 첫 그래픽카드 NV1에 삼성의 D램을 탑재했던 초기 협업에서 시작해 현재의 HBM3E·HBM4 핵심 공급 협력에 이르기까지 20년 넘게 강력한 동맹 관계가 이어져 왔다"고 밝혔다.
이는 HBM3E뿐 아니라 HBM4에서도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의 핵심 공급 파트너라는 점을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전날 열린 실적발표에서 "HBM3E를 전 고객 대상으로 양산 판매 중"이라고 밝히며 그동안 공들여왔던 엔비디아에 HBM3E 12단 공급을 공식화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에 HBM4 샘플을 출하한 상태로, 엔비디아가 이날 HBM4 공급 협력을 언급하면서 HBM4 최종 공급에도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 풀이된다.
HBM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업계 1등 공급업체'로서의 지위를 더욱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SK하이닉스는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HBM 시장 지배력을 바탕으로 분기마다 최고 영업이익을 경신하는 중이다.
글로벌 시장에 출시되는 엔비디아 블랙웰에 탑재되는 HBM3E 12단 물량 역시 SK하이닉스가 대부분을 맡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특히 엔비디아와의 돈독한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HBM4 시장에 가장 먼저 진입할 가능성이 크다.
앞서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월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최대 규모 정보기술(IT) 전시회 '컴퓨텍스 2025'에서 SK하이닉스 부스를 찾아 "HBM4를 잘 지원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사실상 무리 없이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최종 제품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 업계는 해석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지난 9월 메모리 3사 중 가장 먼저 양산 체제를 구축해 4분기부터 출하하고, 내년에 본격적인 판매 확대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황 CEO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SK그룹은 세계 최고 수준의 GPU 컴퓨팅 플랫폼을 함께 만들어가는 핵심 메모리 기술 파트너로, 글로벌 AI 발전을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