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에서] 4년을 맡길 사람, 전화 한 통화로 뽑을 것인가?

김춘석 한국리서치 여론조사부문장

그리스에서는 2006년 아테네 교외 마루시에서 사회당 PASOK이 시장 후보를 숙의형 공론조사로 선출하는 실험을 했다. 무작위에 가깝게 뽑힌 시민들이 주말 동안 시정 현안과 후보들의 정책을 학습하고, 소규모 토론과 전체 질의응답을 거친 뒤 비밀투표로 후보를 선택했다. 전화 한 통으로 인지도 높은 이름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와 토론을 기반으로 유권자가 직접 후보를 검증한 것이다. 이 사례는 정당 내부 공천 과정에 숙의민주주의를 접목해 기존 여론조사 중심 경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시도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2016년 국민의당이 광주광역시 5개 선거구 국회의원 후보를 숙의 공론화 방식으로 선출해 모두 당선시킨 경험이 있고, 올해 민주당도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 과정에서 같은 방식을 도입해 전북 출신 30대 청년인 박지원 최고위원을 선택한 바 있다. 인지도와 조직 동원력이 아니라,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은 시민·당원이 토론과 숙고를 거쳐 ‘준비된 사람’을 선택해 낸 결과다. 숙의 공론화 방식의 후보 선출은 특정 계파의 이해관계를 넘어, 당 전체와 지역사회의 장기적 이익을 중심으로 후보를 평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와는 달리 선거후보 공천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어 온 전화여론조사는 유권자의 검증을 사실상 생략한 절차에 가깝다. 짧은 통화 속에서 유권자는 후보의 경력, 정견, 정책을 제대로 접할 수 없고, 서로 다른 후보를 비교 평가할 기회도 없다. 익숙한 이름과 이미지, 동원된 조직과 광고, 유력 정치세력의 천거가 결과를 좌우하고, 그 여파로 무자격·무능력 후보가 지자체장으로 선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번 그렇게 뽑힌 지자체장은 최소 4년 동안 자리를 유지하고, 시민은 그 기간을 무기력하게 감내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주의가 단지 투표 행위로 축소될 때 어떤 위험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전북처럼 민주당 당내 경선이 곧 본선이나 다름없는 지역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민주당 공천이 사실상 당선을 의미한다면, 민주당 후보 공천 과정은 곧 유권자의 선택권이 실질적으로 행사되는 처음이자 마지막 관문이다. 그 과정이 인지도 조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후보에 대한 충분한 정보 제공과 비교·검증의 기회, 시민이 질문하고 숙고할 수 있는 장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전북 유권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길이다. 지역 언론과 시민사회, 정당이 함께 협력해 공개 토론회와 숙의 패널, 온라인 중계 등을 결합한 새로운 경선 모델을 설계할 수도 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전북의 광역·기초단체장 후보 선출 방식으로 숙의 공론화 모델을 도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작위에 가까운 유권자 선발과 균형 잡힌 자료 제공, 숙의 과정과 비밀투표를 결합한 공론화 절차는 유권자에게는 더 나은 정보와 숙고의 기회를, 정당에게는 경쟁력 있고 책임감 있는 후보 선출 기회를 제공한다.

호남에서의 민주당 후보, 영남에서의 국민의힘 후보처럼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일수록 당내 공천 과정은 숙의민주주의에 걸맞게 재설계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전북이 내년 지방선거에서 이러한 방식을 선도적으로 도입한다면 지방자치를 회복하고, 한국 정당정치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모범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김춘석 한국리서치 여론조사부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