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오페라단이 창단 40주년을 맞았다. 인구 100만도 안되는 중소도시의 척박한 환경을 생각하면 가히 한국오페라계의 신화적 존재라 아니할 수 없다. 이 호남오페라단이 자축의 의미로 빼어든 카드가 베르디의 <운명의 힘>이다. 그리고 <리골레토>, <오텔로>에 이어 베르디 오페라 3개년 기획에 정점을 찍는 작품이기도 하다.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 <운명의 힘>은 이후 작가를 바꾸고 이야기 마무리도 수정을 가한다. 베르디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일까? ‘알바로’의 자살이 논란거리가 된 것을 의식하여 수정을 가했다. <운명의 힘>은 이렇게 사랑과 복수, 구원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장대한 음악 속에 담아낸 걸작으로 탄생하며, 인간의 고뇌와 신의 섭리를 함께 응시하는 서사로 평가받아왔다.
그럼에도 15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를 감동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운명의 힘>의 감동은 극적 스토리텔링보다 음악의 힘에 있다. 근대 낭만주의 시대의 비극적 운명에 우리의 감정을 맡기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베르디의 음악적 화술 때문일 것이다.
비교컨대 현대 드라마에 비하면 베르디 오페라 대본은 사건의 서사가 섬세하거나 친절하지 않은 편이다. 사건 자체가 선 굵은 사랑과 질투, 복수 등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세세한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베르디는 등장인물의 내면을 선율에 싣는데 진력한다. 미세한 감정의 흔들림, 격정적인 감정의 폭발을 예의 주시하며 표현하는 일, 그것이 베르디 오페라 특유의 색깔을 만들어낸다.
호남오페라단은 이번 공연을 통해 그 연륜에 걸맞은 역량을 과시해 보였다. 물론 그 배경에는 지휘자 미켈리와 함께 전주시립교향악단과 전주시립합창단의 수준 높은 연주가 큰 역할을 감당했다. 또 평소와는 다르게 국내 성악가만을 활용한 기획은 무대 전체에 균형감과 안정감을 부여하면서, 무대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치열함으로 상대적으로 긴 러닝타임의 지루함을 지워냈다.
특히 주, 조연을 망라한 고르고 압도적인 가창력과 연기력은 무대에 역동감을 불어넣으면서 성공적인 공연의 일등공신이 되어주었다. 레오노라의 김라희, 임경아, 알바로의 박성규, 이재식, 카를로의 한명원, 조지훈의 농익은 목소리는 무대의 집중력을 배가시켰으며, 과르디아노,칼라트라바 후작역의 이대범, 이대혁은 중후한 저음과 노련한 연기로 안정감 있게 노래하였고, 실라역의 최승현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길지않은 출연시간이었음에도 뛰어난 무대장악력을 보여주었고, 멜리토네역의 베이스 바리톤 김지섭은 코믹한 연기와 노래로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손색없이 하여주었다
호남오페라단의 <운명의 힘>은 창단 40주년 기념공연으로서 손색없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가장 잘 알려진 관현악곡인 서곡부터 레오노라의 아리아 ‘성모님, 저의 죄를 용서하소서(Madre, pietosa Vergine)’ 3막에서 알바로가 부르는 ‘오, 천사의 품으로 올라간 그대여(O tu che in seno agli angeli)’, 카를로의 ‘이 속에 내 운명이(Urna fatale del mio destino)’ 등의 주옥같은 명곡들은 관객들에게 베르디의 진수를 선물해주는 시간이었다.
40년을 달려온 호남오페라단. 그동안 달려온 길로 만족하지 않고 50주년, 60주년을 향해 더욱 힘내어 달리기를, 그래서 한국현대 오페라의 살아있는 역사가 되어 언제까지 우리 곁에 남아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