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업계에 시간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음악계에서는 ‘차트 역주행’이라는 표현이 흔해질 정도로 과거의 노래가 신곡이 아님에도 인기를 끌며 재조명 받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최근 영화관도 신작보다 고전영화의 집객 결과가 높을 때가 많다. 이를 반영하듯 수입배급사들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나, 유명한 영화의 복원판을 구해 재개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수치로만 봐서는 음악이든 영화든 신작이 줄어 생긴 현상은 아니다. 음악 소개 사이트를 보면 하루에 수십곡이 발표될 정도로 많은 창작물이 쏟아진다. 한 명의 인간이 내용을 소화하고 즐기고 애착을 느낄 시간에 비해 과도한 선택지가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2주 안에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창작자들에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긍정적 측면은 창작물이 온라인 공간 속 어딘가 존재만 한다면 절적한 시기에 향유자를 만날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고, 부정적 측면은 창작자들은 이제 시대를 초월해 역사 속 모든 창작물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창작물이 있어도 제대로 된 관리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며칠전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1989)가 한국에서 특별 상영을 했는데 표를 못구한 사람들의 개봉 요청이 소셜미디어에 빗발쳤다. 이정도 호응이면 수입사들이 움직일법도 한데 저작권과 관련된 복잡한 사정으로 이 영화는 이벤트 상영으로 그치게 됐다. 80년대 후반 영화가 2025년에 여전히 현재의 영화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음이 증명되었지만, 저작권에 대한 세밀한 관리가 한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확장성이 제한된다는 것을 깨우친 사례이다.
인터넷이 불러온 디지털 환경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정보를 찾아서 즐길 수 있게 했다. 오프라인에만 존재하던 과거의 기록을 온라인 공간에 아카이빙 하기 시작한 여러 기관과 개인의 참여로 이제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게 됐다. 영화분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만든 자체 사이트 KMDb VOD를 들 수 있다. ‘한국고전영화’ 라는 이름으로 방대한 한국영화와 관련 영상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고 현재는 유투브와 네이버TV에서도 상영중이다. 이는 국내외 시네필, 영화관련 종사자와 학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한국 영화 아카이브 중 하나이다.
전주라는 도시가 영화로 알려지게 된 것에는 전주국제영화제의 활약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영화제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영화제가 영화를 제작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디지털삼인삼색’이라는 이름으로 42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했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저작권도 영화제가 확보하고 있다. 이후 장편 영화 투자 프로그램 ‘전주시네마프로젝트’의 경우 약 40편이 만들어졌고 저작권의 일부 권리를 가지고 있는 형태이다. 지금까지는 영화관, 미술관 등과 협업을 통해 특별 상영 형식으로 스페인, 독일, 멕시코 등에서 상영을 해왔지만 콘텐츠 업계의 변화된 시간 개념을 고려한다면 전주국제영화제가 저작권을 보유한 창작물을 아카이빙을 하고 한국영상자료원의 예와 같이 전세계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온라인의 공간이 마련되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제작한 영화들은 수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 유산으로서 관리될 수 있는 행정, 제도적 절차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