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덕 시인의 ‘풍경’] 거울

안성덕 作

섬벅, 피가 솟습니다. 면도날에 베였습니다. 놀란 거울 속 낯선 내가, 엉거주춤 나를 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지만 면도할 땐 턱만 보았고 출근할 땐 넥타이 코만 보았습니다. 거울 속 내가 낯선 것 당연하겠습니다. 먼 옛날 고대인들도 그랬겠지요. 돌아오는 사냥길 호수에 코를 박고 벌컥벌컥 타는 갈증 끄며 만난 제 얼굴이 낯설었겠지요.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는 원숭이를 닮은 저를 보고 당황했겠지요. 번번이 먹을 것을 훔쳐 가는 산 너머 족속들만 같아 뒷걸음쳤겠지요. 물낯에 비춰보다가 청동을 갈고 닦았으며 유리에 수은을 발라 거울을 만들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저 보고 싶은 것만 보았습니다. 보였습니다.

지난해 여름 국립전주박물관 전시실에서 보았던 산산조각이 난 잔무늬 청동거울이 떠오릅니다. 고대인들은 일부러 거울을 깨트려 무덤에 묻어주었답니다. 죽은 이와의 이별을 의미하는 애도였다지만, 이제 망자가 눈코조차 비춰볼 일 없을 테니 산산조각 낸 것 아닐는지요? 거울 속 얼굴의 턱만 보다 섬벅 면도날에 베였습니다. 베인 자리가 쓰립니다. 낯선 얼굴이 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