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연기금인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전북에 자리 잡은 지 9년, 김관영 전북특별자치도지사가 이끄는 ‘제3금융중심지’ 도전이 마침내 결승선 앞에 다다랐다.
그동안 3차례 대통령 공약에 이름을 올리고도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전북은 포기 대신 인프라 구축과 글로벌 금융사 유치라는 묵묵한 준비를 택했다. 특히 민선 8기들어 금융중심지 조성을 위한 기틀이 단단히 다져지고 성과를 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뉴욕 월스트리트부터 국내 양대 금융그룹까지 러브콜에 응답하기 시작한 지금, 1400조 원 규모 연기금의 땅이 대한민국 금융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1400조 연기금의 땅, 미완의 금융생태계
2017년 2월, 약 1400조 원 규모의 글로벌 자산을 운용하는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전북 혁신도시에 둥지를 틀었다. 수도권을 떠나 호남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전북은 국내 유일하게 거대 연기금 운용 기능을 품은 지역이 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금융 생태계는 여전히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운용 기능과 금융산업 집적 사이의 구조적 단절이라는 숙제가 전북 앞에 놓인 것이다.
민선 8기 김관영 지사는 취임 직후부터 이 간극을 메우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그가 꺼내 든 해법은 ‘제3금융중심지 지정’이었다. 서울이 종합 금융의 심장이고, 부산이 해양·파생 금융의 거점이라면, 전북은 자산운용과 농생명, 기후에너지라는 세 축을 엮어 차별화된 금융 허브로 거듭나겠다는 구상이다.
기존 금융중심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역할을 자임한 셈이다.
전북 금융중심지의 꿈은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지역 공약에 처음 이름을 올린 이래, 2022년 윤석열 정부, 2025년 이재명 정부까지 세 차례 연속으로 대통령 공약에 반영됐다.
현실의 벽은 높았다. 2019년 금융중심지추진위원회는 추가 지정을 보류했고, 2023년 제6차 금융중심지 기본계획에서도 전북은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인프라 개선과 금융 모델 구체화가 필요하다는 권고만 돌아왔다.
△ 좌절 앞에서 택한 ‘뚝심 행정’
번번이 무산되는 상황에서 전북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전북은 지적받은 약점을 하나씩 메우는 데 집중하며 뚝심 있는 행보를 이어갔다. 2021년에는 국민연금공단 제2사옥인 글로벌기금관을 준공하고, 금융빅데이터센터를 구축했다. 같은 해 전북테크비즈센터가 문을 열었고, 2023년에는 금융혁신 공유오피스가 조성되며 금융기업의 근무 여건이 한층 개선됐다.
제도적 기반도 차곡차곡 마련됐다. 김관영 지사는 전북자치도 출범에 맞춰 전북특별법에 금융산업 육성 특례 5개 조항을 반영했다. 입지보조금 50억 원 한도, 설비설치자금 30억 원 한도, 고용보조금과 교육훈련보조금까지 아우르는 촘촘한 인센티브 체계를 마련했다.
지난해 8월에는 전국 최초로 핀테크 육성지구 지정을 이끌어내며 디지털 금융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같은 해 11월 한국핀테크지원센터 전북분원 유치에도 성공했다.
인력 양성에도 공을 들였다. 기금운용 전문인력 130명을 배출하고, 지역 대학과 연계해 백오피스 인력 210명을 양성했다. 핀테크 벤처기업과 금융빅데이터 기업을 연간 12개사씩 키워내며 금융 혁신 생태계의 씨앗을 뿌렸다. 공약은 반복됐지만 실현이 요원해 보이던 시기, 김 지사는 “때가 오면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며 묵묵히 기반을 다졌다.
△ 뉴욕 월스트리트부터 KB·신한까지, 금융권 러브콜
김관영 지사는 국내 기반다지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6월, 그는 직접 미국 뉴욕과 보스턴을 찾아 BNY멜론 본사와 세계 3대 자산운용사인 피델리티 본사의 문을 두드렸다.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전북의 가능성을 직접 설파한 것이다. 현지 금융 주재원들과의 네트워킹도 병행하며 국제 금융계에 전북을 알리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실은 숫자로 나타났다. 국민연금과 협력하는 글로벌 자산운용사 사무소 9곳이 전북에 둥지를 틀었다. 2024년에는 BNY멜론 전주사무소가 확장 이전하며 글로벌 금융기관의 존재감을 키웠다. 같은 해 6월에는 우리금융그룹, 국민연금공단이 전북자치도와 금융산업 육성 협력 협약을 체결하며 민관 협력의 틀을 다졌다.
국내 대형 금융그룹들도 화답했다. 최근 KB금융그룹은 전북혁신도시에 ‘KB금융타운’을 조성해 총 250여 명의 인력을 상주시키겠다고 발표했다. KB증권과 KB자산운용 전주사무소, AI 기반 자산관리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링크, KB손해보험 광역스마트센터까지 입점시키는 대규모 투자 계획이다. 신한금융그룹도 300명 이상이 근무하는 자본시장 핵심 거점을 전주에 구축하는 데 가세했다.
양종희 KB금융 회장이 전주 출신이고,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이 임실 출신이라는 지역 연고도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금융업계에서는 김 지사의 끈질긴 설득과 체계적인 인센티브 정책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 2월 중에는 도-KB금융-국민연금 간 업무협약 체결과 신한 금융허브 출범식이 예정돼 있어, 전북 금융 생태계는 한층 두터워질 전망이다.
△마침내 던진 승부수, 청년이 돌아오는 도시로
올해 1월 29일, 전북도는 금융위원회에 금융중심지 지정 신청서를 공식 제출했다. 지난해 4월부터 9개월간 공들여 작성한 ‘전북 금융중심지 개발계획’이 안에 담겼다.
부처·전문가·유관기관 자문을 거치고, 도민설명회와 금융기관 간담회, 도의회 의견 청취를 진행한 뒤 도시계획위원회의 원안 가결을 끌어낸 결과물이다.
주요 개발 계획으로는 혁신도시와 만성지구 일원 3.59㎢ 부지에 중심업무지구, 지원업무지구, 배후주거지구를 배치한다. 중심업무지구에는 전북국제금융센터와 금융혁신 클러스터 복합단지가 들어서고, 자산운용·농생명·기후에너지라는 세 특화 금융 영역을 키운다는 청사진이 담겼다.
새만금 해상풍력단지와 신공항 개발에 따른 금융 수요에 대응하고, AI 데이터센터의 제2 백업 거점으로 새만금을 육성한다는 구상도 포함됐다.
전북이 금융중심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자산운용, 리스크관리, 금융데이터 분석, 회계·법률 서비스까지 청년 선호도 높은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 목표다.
금융산업의 수도권 과밀로 지방의 일자리와 청년 인재 유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금융중심지 지정은 단순 개발이 아닌 ‘지역소멸 대응형’ 국가전략 거점 구축이라는 게 전북도의 설명이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제7차 금융중심지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평가단 구성과 현장 실사, 심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최종 의결을 앞두고, 10년 가까이 달려온 전북의 여정이 결실을 맺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관영 지사는 “국민연금이라는 세계적 자산이 전북에 있는 만큼, 이를 중심으로 한 금융 생태계를 완성하는 것은 지역의 숙원이자 국가적 과제”라며 “그동안 쌓아온 인프라와 제도, 민간 금융기관의 참여가 어우러져 마침내 제3금융중심지의 꿈을 현실로 만들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북 금융중심지는 청년들이 돌아오는 도시, 지역 균형발전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라며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