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 우리와 미수교 상태였던 중국의 민항기(KS651)가 불시착했다. 당시 필자는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부상당한 승객들을 치료하며 승무원이던 왕영창, 왕배부 말고도 중국 대표단이던 ‘심도(沈圖)’ 민항총국장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심도는 매우 당당했다. 개발에 뒤진 나라에서 온 사람 같지 않았다.
그의 당당함은 1986년 미국 대학에서 만난 중국 국비 유학생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끼니를 겨우 이을 정도의 소박한 도시락과 낡은 신발에도 꽉 찬 자긍심으로 밤낮없이 연구실을 지키던 그들은 덩샤오핑의 뜻을 받드는 ‘과학기술 구국’의 주역이었고 명문 대학의 과학기술 중시 풍토 조성에 기여했다. 세계 기술 패권을 다투는 지금의 중국을 있게 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을 보자. 1980년대 우리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은 산업화의 영웅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그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가장 먼저 구조조정의 칼날을 맞았다. 과학기술이 국가를 구한다는 믿음은 와르르 무너졌다. 이후, ‘안정’을 지향하는 의대 쏠림 현상이 나타나면서 의대에 미친 나라가 돼 왔다.
한국 의료의 부정적 민낯은 통계에서 드러난다. 2025년 OECD 보건통계를 보자. 한국의 인구 1000명당 병상수는 12.6개로 OECD 평균(약 4.3개)의 3배가량이다. 압도적 세계 1위다. 단순히 병상만 많은 게 아니다. 국민 1인당 외래진료횟수는 연간 15.7회로 OECD 평균(5.9회)을 굉장히 앞지른다. 가히 ‘과잉 진료’와 ‘과잉 병상’의 나라다.
우려스러운 것은 소위 ‘빅5 병원’의 탐욕이다. 빅5는 이젠 병원이라기보단 거대 기업이다. 연간 매출액이 1조원을 훌쩍 뛰어넘고, 매출액 기준으로 500대 기업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수준이다. 생명을 구하는 인술의 전당이어야 할 병원이 경영 효율과 수익 극대화를 좇는 거대 서비스 기업으로 변모한 것이다. 빅5는 매출 면에서 세계적 수준의 도쿄대학교 병원이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다. 필자가 1994년 근무했던 도쿄대병원은 치료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외양엔 별 차이가 없다.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이 있다. 이미 비대해진 빅5가 수도권에 총 6000병상이 넘는 분원을 추가 설립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아마도 지역 의료를 고사시키는 결정타가 될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지방의 필수의료인력이 거대 블랙홀인 수도권 빅5로 빨려 들어가고, 지방 환자들이 빅5라는 브랜드를 찾아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이동하는 ‘의료 유목민’이 돼 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병상 하나를 더 늘린다거나 수익성 높은 검사 건수를 한 건 더 올리는 일이 아니다. 망가진 의료 전달체계를 바로잡고, 인재들을 다시 기초과학 현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다. 또 기초과학 투신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다.
또 있다. 수도권 거대 병원의 확장은 저지해야 하고, 지역의료의 가치는 회복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전국 어디서나 안심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6·25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마땅한 의무이기도 하다. 혹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전후방이 없이 전국 각지 공립병원들은 야전병원이 될 것이다. 의대에 미치지 않고 지역의료가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