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단종의 폐위와 전북의 충절남(忠節男)들

송화섭(전 중앙대학교 교수․호남문화콘텐츠연구원장)    

‘왕과 사는 남자’영화 관람객이 1000만명을 넘어섰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최근 왕사남 영화를 보고나서 왜 관람객이 매주 폭팔적으로 늘어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화려한 출연진도 아니다.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긴장감과 스릴도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정서상 단종의 애잔함에서 동정심이 유발하여 왕사남 쏠림 현상이 아닐까. 애잔하다는 애처롭고 안타갑고 처량하고 짠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실제 단종은 애잔한 짧은 삶을 살았다. 문종의 적장자로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는 산후병으로 곧 세상을 떠났고,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현왕후도 일찍 세상을 뜨고, 아버지 문종도 즉위 후 등창으로 사망하면서 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수렴청정할 사람도 없는 단종은 의정부 대신들에게 국정을 맡기고 의지하였다. 

이러한 왕권불안정을 틈타 권력장악의 야심을 노린 수양대군이 있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숙부다, 수양대군은 권력찬탈을 위하여 1453년 계유정난(친위쿠테타)을 일으켜 단종의 측근인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의 왕권찬탈에 백성들의 반감이 확산되고, 단종의 동정 여론과 집현전 학사들의 단종복위계획이 발각되자 서둘러 단종을 폐위시키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유배를 보냈으며, 수양대군은 세조로 즉위하였다. 단종복위설에 불안한 세조는 피비린내나는 칼을 들었다. 그 근원인 단종을 살해한 후에 연이어 단종 복위에 앞장 선 집현전 학자들은 사육신(死六臣)으로 희생되었으며, 단종에게 충절과 의리를 지키려는 학자와 관리들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 때에 낙향한 전북의 충절남들이 있었으며, 단종의 복위에 참여였다가 죽임당한 희생자도 있다. 먼저 희생자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아버지 송현수(宋玹壽)다. 송현수는 본관이 여산으로 정읍시 태인면 시산리 남전마을 출신이다. 시산리 이웃마을인 원촌마을에는 무성서원이 있고, 남전마을에는 고현향약의 동각이 조성되어 있을 정도로 태인유향(泰仁儒鄕)의 본향이 무성리․시산리이다. 두 마을에는 문벌이 형성되었고 과거급제자 배출도 많았다. 송현수는 성균관에 진학하여 수양대군과 동문수학하면서 친하게 지냈으며, 그 덕택에 딸이 왕비로 간택되어 정순왕후에 책봉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사위 단종의 복위 거사에 휘말리면서 결국 역모로 몰려 처형당했다. 애잔한 단종이 폐위되고 살해당하자 단종에 대한 충절과 의리를 지키려고 낙향하는 충절남들이 많았다. 

전북특별자치도 임실 지역으로 낙향한 충절남(忠節男)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곽도(郭都:1390~1458)다. 본관은 현풍, 호는 노재(魯齋)다. 문과급제 후에 담양부사를 지냈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유배되자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고 치악산에 들어가 단종을 사모하며 은둔하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임실군 오수면 주천리로 낙향하였다. 주천리의 주산이 노산(蘆山)이다. 노재 곽도는 노산을 바라면서 노산군을 그리워하고 충절과 의리를 지키며 여생을 보냈다. 노재는 노산에 올라 노산군(魯山君)을 그리워하면서 노산이 노산(魯山)이 되었고, 노산치와 노산치골 지명 등이 생겨났다. 노재는 세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절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노재 곽도는 주천리 삼계서원(三溪書院)의 주벽으로 배향되어 있다. 두 번째 충절남은 송경원(宋慶元:1419~1510)이다. 송경원은 본관이 여산이며, 호는 돈학(遯壑)이다. 돈학 송경원은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로 달려가 어문 밖에서 통곡하고 돌아와 계룡산에 들어가 2년간 복상(服喪)하였으며 그후 임실 백이산에 낙향하여 돈학정을 짓고 은거하면서 충절을 지키며 여생을 보냈다. 돈학 송경원은 신안서원(新安書院)의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이밖에 전북에는 더 많은 충절남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