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란전에서 트럼프의 강경노선은 미국경제의 실리 추구라는 틀로 해석할수있다. 중동 지역의 긴장을 관리함으로써 에너지 시장을 장악하고, 금융 패권과 지정학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계산이 깔려있다. 이런 접근은 현실주의적 국제정치 논리 속에서는 일정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단순히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적 선택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장자』 <인간세>편 3장에는 명예와 실리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명예라는 것은 동서 구분 없이 예나 지금이나 워낙 유혹이 큰지라 현자나 성군들도 그것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옛날에 성군인 요임금은 총지(叢枝)지역과 서오(胥敖)지역을 정벌했고, 또 우임금은 유호(有扈)지역을 공격하여 정벌했다. 그 지역은 폐허가 되었고, 그 지역 군주들은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그들이 전쟁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던 것(用兵不止)은 그 전쟁으로 얻게 되는 명예와 실리를 탐했기(求實無己) 때문이다. ,,,, 안회(顔回)여! 명예와 실리라는 것은 성인도 그 유혹을 이겨내기 어려운 법(名實者 聖人之所不能勝也)인데, 너에게 있어서야,,,”
여기서 “안회여!”를 “트럼프여!”로 바꿔놓고 한숨 돌려보자.
트럼프식 강경노선과 장자의 관점은 서로 충돌한다. 트럼프의 전략은 군사적 압박과 긴장을 하나의 정책 도구로 간주한다. 제재와 타격, 긴장 고조는 협상력을 높이고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산된다. 전쟁 혹은 준전쟁 상태를 관리 가능한 선택지로 보는 것이다.
현대 전쟁은 반드시 전면전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지속적인 긴장, 제한적 충돌, 제재와 압박이 결합 된 상태로 장기화 된다. 그러나 장자의 기준에서 보면 형태만 달라질 뿐, 개입이 개입을 낳고 긴장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는 동일하다. 한 번 개입한 국가는 계속해서 개입을 요구받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하며 엮이게 된다.
결국, 이익의 크기가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이 문제다. 장자가 보기에 ‘좋은 질서’란 더 많은 것을 얻기보다, 스스로를 덜 소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패권을 유지하려는 경제적 실리는 지속적으로 개입하며 긴장을 일으키며 유지된다.
장자는 인간세에서, 억지로 세상을 교정하려 드는 안회를 걱정한다. 스스로를 해치는 결과에 이를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외부의 혼란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전쟁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전쟁이라는)을 끈으로 개입하지만, 그 과정에서 더 큰 반작용을 낳는다. 이는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와 흐름의 문제다. 세계는 유기적 연관으로 이뤄져있는데, 특정 행위자가 이를 힘으로 재단하려 할 때 전체의 균형은 오히려 깨진다.
국제사회는 상호의존 속에서 진화한다. 경제, 문화, 기술은 서로 얽히며 공진화해 왔다. 갈등조차도 협상으로 조정되어 왔다. 그런데 트럼프의 보안관식 접근은 이 흐름을 거스른다. 복잡한 관계망을 단순한 힘의 문제로 환원하고, 다원적 협력을 일방적 압박으로 대체한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성과처럼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신뢰를 소모시키고 협력기반을 약화시킨다.
그러니 장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하며(有爲), 조용히 흘러갈 것을 억지로 흔드는 꼴이다. 진정으로 능력있다면, 개입을 최소화하고, 스스로 조화를 만들어야 한다. 보안관 놀이에는 끊임없이 사건이 필요하다. 사건이 있어야 개입이 가능하고, 개입이 있어야 존재가 증명되기 때문이다. 계산이 지배하는 질서가 어떻게 공진화를 이끌어 내고, 지속발전가능하겠는가. 보안관을 자처하는 트럼프가 세우려는 질서는 과연 질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