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 20년, 영화감독으로 25년을 보냈다. 45년의 세월을 줄곧 현장에서 보낸 백학기(66) 감독을 23일 전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거창한 수식어보다는 묵묵히 제 길을 걷는 창작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번에 선보이는 장편독립영화 <저만치 가까이> 역시 화려한 기교보다는 삶에 대한 깊은 응시에 집중한다.
영화는 진안 마이산과 보성 대원사 등 ‘사찰’이라는 정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두 개의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1부 ‘나는 누구인가’에서는 자신을 버리고 출가한 어머니를 찾아가는 20대 청년 윤지의 여정을 그려낸다.2부 ‘가까이’는 상실의 기억을 안고 사찰을 찾은 은퇴한 교수 수현의 치유를 그려낸다.
백 감독은 이번 영화에 대해 “서로 다른 성격의 눈물을 흘리는 두 여자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소재를 시적인 독백과 싱잉볼의 진동 같은 감각적인 연출로 갈무리해 관객이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게끔 설정한 점이 돋보인다.ㄱ
그는 지역신문사와 KBS 방송국 홍보실 등에서 일하다 영화계에 데뷔한 후, <공중의자> <이화중선> 등을 제작하며 평단으로부터 ‘한국의 타르코프스키'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백 감독은 ‘시간 이미지’의 구현에 공을 들이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사건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일반적인 대중영화들과 달리, 관객이 스크린 속 시간의 흐름을 직접 느끼며 스스로를 반추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도시의 소음 대신 사찰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도 존재론적 고뇌를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백 감독은 관객들이 이번 영화를 통해 각자의 기억 한 조각 또는 상실의 공간을 마주하는 체험을 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북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에게 지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낯선 일이다. 열악한 인프라는 늘 숙제지만 지역의 산천과 사찰의 풍광을 렌즈에 담을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번 영화 역시 제작사 103X를 이끄는 딸 백지윤 감독과 진안 마이산, 보성 대원사 그리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완성됐다. 엔딩 크레딧을 채운 수많은 이름들은 그가 25년 동안 쌓아올린 영화적 신뢰의 증표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전주시청 뒤편 선미촌을 배경으로 한 장편 상업영화와 이번 영화의 완결판인 3부 <길 위에서>를 동시에 구상 중이다.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상실의 공간 하나쯤은 품고 살잖아요. 저는 이 영화가 관객 각자의 기억 속에 묻어둔 공간을 마주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마음속에 오래 머무는 영화였으면 해요“
백 감독의 바람처럼 영화 <저만치 가까이>는 이제 관객의 일상에 고요한 파동을 일으킬 채비를 마쳤다. 상실을 응시하며 이면의 온기를 기록해온 그의 시선은 또 다른 삶의 진실을 향해 묵묵히 발을 내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