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잊혀진 들녘, 사라진 농촌 공약

수문이 활짝 열렸다. 지난 23일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유서 깊은 행사가 열렸다. 호남평야 물길의 거점, 정읍 태인면 동진강 낙양취입수문에서 열린 ‘백파 통수식(通水式)’이다. 한국농어촌공사가 풍년농사를 기원하며 수문을 열고 농수로에 물을 흘려보내는 행사다. 전국 곳곳에서 통수식이 열리지만, 대표 행사는 단연 한반도의 곡창, 호남평야에서 열리는 백파 통수식이다.

농업의 위상이 거듭 추락하면서 지금은 영농기관과 단체, 지자체가 모여 치르는 단순 연례행사로 인식되고 있지만, 20세기에는 ‘국가의 대사(大事)’이자 수천명의 인파가 몰리는 축제였다. 특히 고위관료와 호남의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인들이 앞다퉈 찾아와 농민들의 손을 맞잡으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당시 농업은 국가의 기틀이었고, 농심은 곧 민심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정치인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게다가 올해는 선거철과 겹쳤는데도 그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사회 농업의 존재감이 어디까지 지워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표계산에 밝은 정치인들의 관심이 농심(農心)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말잔치 선거판’에서조차 농업·농촌은 없다. 농도 전북의 도지사를 비롯해 시장·군수에 도전하는 후보들의 주요 공약에서 농업·농촌, 그리고 농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전북교육감 선거판도 마찬가지다. 난제로 꼽히는 농촌 작은 학교 문제와 도·농 학력격차 해소 등 농어촌교육을 둘러싼 이슈와 현안이 넘쳐나는데도 후보들의 핵심 공약에 이런 의제는 없다.

올 지방선거에 나선 후보들과 정당의 정책공약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은 5월 중순, 후보자 등록일 직전에 당의 공약을 일괄 발표하기로 했다. 물론 농업·농촌 분야도 공약집 한쪽에 인쇄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보여준 후보들의 행보를 짚어보면 단순 ‘구색 맞추기’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와 AI 등 첨단산업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지만, 농업은 여전히 우리 생존의 근간이다. 식량안보가 무너진 국가에 미래는 없다. 전북은 대한민국 농생명산업의 거점이자 식량주권을 수호하는 전초기지다. 농업정책이 자꾸만 변두리로 밀려나고, 급기야 선거판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 현실이 안타깝다. 사라진 공약의 빈자리에는 농촌 소멸의 그림자가 들어찰 것이다.

정치권이 농업·농촌을 외면하는 것은 우리 농촌에 비전이 없어서가 아니다. 농업의 미래 가치를 읽어내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안목과 역량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전북 농업의 위기는 곧 대한민국 식량안보의 위기다. 지역의 미래를 이끌겠다고 나선 후보자와 정당은 우리 농업·농촌의 비전과 농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실질적인 로드맵부터 제시해야 한다. 누가 진정으로 이 땅의 근간을 지킬 적임자인지, 유권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 김종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