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탕에는 반세기 가까이 단절됐던 전주 영화사가 있다. 1940년대 말부터 서울 충무로와 함께 영화가 제작되던 이곳에서는 한국 전쟁영화의 대표작인 ‘피아골’과 ‘아리랑’을 비롯해 당대 흥행작이 여러 편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영화로 알려진 ‘선화공주’도 전주에서 제작된 영화다.
그러니 개념도 낯설었던 ‘대안영화’와 ‘디지털영화’를 품어 영화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의 통로를 연 전주영화제의 선택은 어쩌면 이 단절을 잇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 여정을 지켜온 많은 사람이 있다. 영화의 가치와 가능성을 주목하며 전주영화제를 응원하고 기꺼이 열정을 더했던 영화인들이다. 그 중심에 올해 여든넷, 영화평론가 임안자 선생이 있다.
지금도 기억되는 전주영화제의 특별 섹션 가운데는 그의 열정이 닿은 프로그램들이 적지 않다. 2004년, 특별전으로 선보인 쿠바 영화를 비롯해 알제리와 튀니지, 모로코 등지에서 만들어진 마그렙 영화, 그리고 소비에트영화와 터키 영화, 중앙아시아 영화들까지. 그가 전주영화제에 불러낸 이 보석 같은 영화들은 낯선 지역의 문화를 접한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에게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이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진안이 고향인 선생은 유럽에서 활동해온 한국 영화 전문가다. 간호사로 미국에 건너갔던 그는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생이 되어 영화를 전공했다. 그를 불러낸 것은 1989년 로카르노영화제다. ‘달마가 동쪽으로 떠난 까닭은’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배용균 감독 인터뷰가 계기였다. 이후 유럽영화제의 한국 영화 프로그래밍에 참여하기 시작해 ‘칸 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부산영화제 고문으로도 활동했던 그는 2002년 ‘아시아독립영화포럼’ 심사위원으로 전주와 첫 인연을 가진 이후, 2004년부터 전주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 되어 5년 동안 해외영화 프로그래밍을 이끌었다.
2008년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전주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가 기획한 ‘중앙아시아 특별전’은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올해 선생이 다시 전주를 찾았다. 전주영화제 개막식에서 그가 보낸 뜨거운 박수. 그것은 전주영화제를 함께 만들어온 가치에 대한 증언이었다.영화제의 오늘에는 보이지 않는 선택과 이름을 앞세우지 않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다. 전주영화제는 그 위에서 성장해왔다. 지금 다시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