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디즈니 다큐멘터리 한 편이 세상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수천 마리의 레밍이 무리를 지어 절벽을 향해 돌진하며 바다로 떨어져 죽고 마는 장면이었다. 훗날 이 장면은 제작진이 레밍을 직접 절벽으로 밀어붙인 조작이었음이 밝혀졌지만 역설적으로 그 조작된 이미지가 더욱 강력한 진실을 담게 됐다. 그렇다, 군중 심리에 이끌려 나락으로 달려가는 존재는 레밍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심리가 군중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다. 수십 만년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은 고립되는 것보다 다수를 따르는 편이 생존 확률을 높인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학습했다. 맹수가 출몰했을 때 나홀로 딴 길로 도망치는 것보다 무리 속에 묻혀 함께 달아나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뇌과학도 이를 확인한다. 타인의 행동을 모방할 때는 뇌의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나 군중과 다른 판단을 내릴 때는 공포와 유사한 신호가 발생한다. 나만의 길로 가는 것은 신체적으로도 불안하다. 이것이 레밍의 본능이 인간의 심리 속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이유다.
문제는 이 동물적 본능이 21세기 금융 시장이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데 있다. 가격이 비쌀수록 투자자들은 더 몰려든다. 뉴스가 뜨거울수록 매수 욕구는 한층 강렬해진다. “모두가 산다”는 사실 자체가 안도감의 근거가 된다. 1999년 닷컴 버블 정점에서 인터넷 주식을 사들인 개인 투자자들, 2021년 가상자산 광풍 속 코인을 매수한 군중,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화려한 AI 스토리를 가장 비싼 가격에 사려는 사람들, 모두 같은 본능을 따른다. 다수의 군중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시장에서 군중의 쏠림은 오아시스가 아닌 가파른 절벽을 가리키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국면이 꼭 그렇다. 맹주 엔비디아는 차세대 AI 플랫폼을 공개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공급사로 직접 호명했다. AI 반도체 수혜의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스페이스X, OpenAI, Anthropic의 기업공개가 목전이다. 수천억 달러 규모의 신규 공모 물량이 시장에 쏟아지고 넘치는 유동성이 끝을 향해 돌진하는 레밍처럼 그들에게 달려갈 태세다. 가장 화려한 스토리들이 거의 동시에 신데렐라처럼 시장에 등장하는 순간, 레밍의 본능은 최고조에 달할 것이다. 군중이 제시하는 새로운 장미빛 내러티브로 갈아타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밀려온다. 다수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지 않으면 무리에서 탈락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바로 이 순간이 소수의 현명한 투자자와 다수의 레밍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공산이 크다. 현명한 투자자는 군중의 움직임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이용한다. 군중이 꾸준한 수익을 가져다준 자산을 팔고 새로운 이야기로 달려갈 때, 매도 압력이 만들어내는
안전마진을 조용히 확대하며 매수의 기회로 삼는다. 이 결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 군중과 반대로 선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틀렸을 때의 두려움, 홀로 남겨지는 불안, 뒤처진다는 조급함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나만의 고뇌에 찬 의사결정만이 탁월한 결과를 창출한다. 분석하고, 의심하고, 다시 확인하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딘 사람만이 군중이 만들어 준 기회를 손에 쥘 수 있다.
맹자는 말했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을 견지할 수 있다고. 안정적인 현금흐름 기반 위에 선 사람만이 시장의 소음 속에서 중심을 지킬 수 있다. 군중을 따르는 것은 안전처럼 느껴지지만, 진짜 안전은 자신의 분석과 원칙에서 나온다. 레밍은 함께 달려야 안전하다고 느끼지만, 투자자는 혼자 멈출 수 있어야 비로소 안전하다. 절벽 앞에서 군중이 달릴 때, 발을 멈추고 홀로 고뇌하는 것. 그것이 현명한 투자자의 첫 번째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