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즐거운 설이지만 명절이 그리 반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니, 그 첫 번째는 여성 특히 며느리들일 것이고 그 두 번째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제사 준비에 버거운 장남들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야 옛 조상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테지만, 제사를 모셔야 했던 제주들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넉넉한 재산을 가졌거나 자손들이 번창한 사람이라면 염려 없을 것이었겠지만, 평범한 사대부들은 자기가 죽은 뒤에 제사를 잘 지낼 수 있을 지에 대한 염려를 놓을 수가 없었다. '죽어서 조상 뵐 면목'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 집착했던 어르신들의 고민도 이런 흐름 속에 놓여있다.
제사라면 흔히들 종가집 종손이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런 관행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의 일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제사를 아들이건 딸이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사를 모시는 것”을 주요한 덕목으로 여겼던 옛 사람들에게 있어 제사 준비는 소홀히 할 수 없는 의례였다. 몇십만원의 제사상을 배달해 주는 요즘과는 그 격이 달랐던 것이다.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돈'이라는 재화와 연결된다. 카드 하나 들고 마트나 백화점에 가서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제수 마련이 끝나는 지금도 걱정이 앞서는 것이 제사인데, 물건이 귀하고 보관이 용이하지 않았던 옛날에야 오죽했을까? 어쨌든 제사를 돌아가면서 모시는 좋은 관행에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제 각기 떨어져 사는 곳에 모이는 것과 제수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돈' 걱정이었다.
부안 우반동에 세거하고 있던 김명열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종가에서 제사를 받드는 법은 예문에 소상히 밝혀져 있듯이 매우 중하고 또 엄하다.… 제사를 결단코 사위나 외손의 집에서 돌아가며 지내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이를 정식으로 삼아 대대로 따르도록 하라. 아비와 자식 사이의 정리라는 면에서 본다면 아들과 딸 사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결혼한 딸은 생전에 부모를 봉양할 방법이 없고, 사후에 제사의 예마저 차리지 않는데 어찌 유독 재산만은 남자 형제와 균등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딸들은 재산의 3분의 1만 나누어 갖도록 해라. 정이나 도리라는 면에서 따져보아도 조금도 잘못된 점이 없다. 딸들과 외손들이 어찌 감히 더 받으려고 서로 다투려는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느냐? … 종손의 자손이 가난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다. 만일 이 결정을 어기고 사위와 외손이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게 한다면 어찌 나에게 자손이 있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겠는가”
연구자들 사이에 바이블이 되다시피 한 이 문서는 재산을 자식들에게 균등상속했다는 사실과 그 균등상속이 깨지게 된 것이 제사를 잘 모시는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줄어들 수밖에 없는 아들들의 재산을 유지시키면서, 제사에 소홀한 딸(사위)와 외손자들의 방기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사대부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김명열의 고민을 돈(재산과 재수비용)이라는 현실적 문제만으로 읽혀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제사에 임하는 자손들의 무게중심에서 사위와 외손이 비켜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현상을 재산상속에 연결시킨 것이며, 이는 아들로 이어지는 가문을 지키려는 귀소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제사상을 사들이고, 여행지에 놀러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세상, 사실 조상을 대하는 마음이 중요하지 상차림과 제사 장소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끄덕여 위안을 삼을 수 있겠지만, 고단함 없는 소중함이 없는 세상의 이치로 보자면 그리 좋은 것도 아닐 것이다.
/공동기획=전북대박물관 호남기록문화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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