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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생의 한가운데

루이레 린저 지음...식지않는 삶의 열정

머리가 길고 얼굴이 하얗고 몸이 버드나무처럼 가늘고 청승스럽던 여자였다. 고등학교 1학년 교생선생님.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해 주었다. 예쁘지도 않고, 나이도 많고, 담배를 무지 피워대고, 술을 즐기고, 남자관계가 복잡하고, '검고 달디단 커피'를 좋아하는 한 여자. 그녀의 이름은 니나였다.

 

20대가 되었다. 최루탄 가스를 마시고 돌아온 날, 돈이 없어 호빵 하나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날, 공장에서 스타킹 불량검사를 하느라 다리가 퉁퉁 부어 돌아온 날이면 나는 이 책을 꺼내 들고 밑줄을 쳐가면서 읽었다. '자매는 서로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거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첫 구절부터 마지막 니나의 편지까지, 어느 한 부분 내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검고 달디단 커피를 즐겨 마시기 시작했다. 담배도 피우기 시작했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니나의 말은 나에게 삶의 교본과도 같았다. 삶이 외롭고 지겨울 때, 이것마저도 견뎌내야 하는 나의 몫이라는 걸 니나는 가르쳐 주었다. 삶 아니면 죽음밖에 없었던 가파른 20대의 고갯길을 포기하지 않고 올라서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니나는 나에게 '얼굴이 예쁘지도 않고 나이도 많은' 중년의 여자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30대가 되었다. 30대가 되어서 바라본 니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그토록 열정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늙어감이 두렵던 나에게 '늙음이 문제가 아니라 열정이 문제'라는 걸 니나는 깨닫게 해주었다. 마흔이 코앞에 닥쳐오거나 말거나 핏빛 립스틱을 바르고 혼자 술집에 갈 수 있으며, 매니아 독자층을 거느린 소설을 써낼 수 있으며,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곧 니나의 에너지이며, 우리가 생을 살아가는 이유였다. 열정과 사랑이 없다면 그 생은 곧 죽은 것이 아니던가.

 

열일곱 어린 나이에 항상 죽을상을 하고 다녔던 내게, 그 몸매가 여린 교생선생님은 생의 비밀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생은 선택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그 무엇이며, 생의 한 가운데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저절로 빛이 난다는 것을.

 

세월을 따라 나이를 먹어도 니나는 여전히 내게 놀랍고 부러운 대상이다. 20대와 30대에는 니나처럼 살고 싶었다. 이제는 니나도 내 동생 나이가 되었지만,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할머니가 되어도, 니나는 여전히 '죽을힘을 다해 생을 살아가는' 열정적인 여자로 기억될 것이다. 모든 삶을 다 살아낸 후에 깨닫게 될 생의 비밀을 미리 귀띔해 준 여자. 그런 여자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김선경(JTV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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