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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교첩

태조 어진 지켜낸 경기전 참봉자리

1684년에 김번의 경기전 참봉 임명장(부안 우반동 세덕각 소장) (desk@jjan.kr)

조선시대 여러 관직 중에서 참봉(參奉)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관직도 없다. '이 참봉', '김 참봉', '참봉댁'과 같은 호칭에서, 고위직에 올라 세도를 부린 것은 아니지만 한때나마 나랏일에 종사하며 '관록'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려고 하는 듯한, 뭐랄까 애잔함을 느끼기도 한다. 미관말직(微官末職)의 상징인 참봉은 조선시대 내의원 등을 비롯한 여러 관서와 능(陵)·원(園)·전(殿) 등에 배속되어 행정실무를 도맡아 보았던 종9품의 벼슬이었다.

 

오늘 살펴보려는 문서는 참봉 사령장, 교첩(敎牒)이다. 관리에 임명되면 '교지(敎旨)'와 교첩(敎牒)을 내렸는데, 교지는 4품 이상의 관리에게 국왕이 발급한 사령장이고, 5품 이하의 관리의 경우,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원조회[署經]를 거쳐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임명하였다. 이 때 발급한 사령장을 '교첩(敎牒)'이라고 했다. 이 문서는 종9품에 해당하는 관직인 참봉을 임명하는 사령장이기 때문에 이조에서 교첩을 발급하였다. 문서 왼쪽에 보이는 것처럼 '이조지인(吏曹之印)'이라는 관인이 찍혀 있고 이조의 관리들이 서명[署押]을 하고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행정자치부 장관이 임명한 자리인 셈이다.

 

이 문서의 주인공은 경기전 참봉에 임명된 김번(金?; 1639-1689)인데, 부안 우반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우반동 김씨'들이 바로 그의 후손들이다. 김번의 할아버지인 김홍원이 반계 유형원의 할아버지 유성민에게서 우반동에 있는 토지와 가옥 등을 구입했는데, 김번이 그의 나이 마흔이 되던 해에 우반동으로 이주해 살면서 '우반동 김씨'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반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나서 6년이 지난, '강희(康熙) 23년' 곧 숙종 10년(1684) 7월에 김번은 경기전 참봉에 임명되었다. 경기전 참봉으로 임명되었을 당시 김번의 품계는 정5품에 해당하는 통덕랑(通德郞)이었다. 김번은 아버지 김명열이 받을 품계를 물려받아[代加] 종9품 장사랑(將仕郞)에서 통덕랑까지 올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정5품의 김번이 종9품의 참봉에 임명된 것은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을 때,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에는 '行', 관직이 품계보다 높은 경우에는 '守'이라고 표시하였는데, 이런 규정을 '행수법(行守法)'이라고 했다. 그래서 교첩에 '행경기전참봉(行慶基殿參奉)'이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김번은 자기의 품계보다 한참이나 낮은 관직인 경기전 참봉에 임명되었지만, 이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는 경기전의 전직(殿直)인 참봉이 되어 태조의 어진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을 지도 모른다. 경기전 참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태조의 어진과 전주사고의 실록을 지켜냈던 자리가 아니었던가! 김번 자신도 어진과 실록을 보존하는 공을 세운 경기전 참봉 오희길의 무용담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참봉이라는 자리는 미관말직이지만 종묘사직과 역사를 지켜낼 수 있다는 자긍심을 말이다.

 

/이선아(전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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