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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바로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카메라 루시다 ' 롤랑 바르뜨 지음·조광희 옮김·열화당...김영혜 (우석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내가 사는 집 거실 벽에는 눈에 잘 띄는 곳에 한 장의 커다란 사진이 붙어 있다.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벋은 방파제와, 방파제 끝에 외로이 서 있는 교통표지판 같은 기둥이 보인다. 방파제가 모래사장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방파제 너머는 그저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만 보이는, 평범하고 쓸쓸한 느낌의 사진이다.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어느 여행에서 찍은 이 평범한 사진을 볼 때마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경이로움을 느낀다. ‘내가 몇 년 전에 바로 그곳에 있었다’라는 사실 때문이다.

 

바다를 좋아해서 섬나라인 영국의 바닷가를 무던히도 쏘다녔을 뿐만 아니라, 동쪽 끝 바다에서 서쪽 끝 바다까지 하루만에 왔다갔다 하기도 한 경험도 있는지라, 도대체 언제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진 않지만(사진에도 장소를 알려줄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다), 그래도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내 자신이 저 낯선 곳에 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새삼스럽게 경이로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거기에 존재했다’, 혹은 ‘바로 그러한 일이 그 순간에 일어나고 있었다’라는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점이야말로 사진의 본질적 특색 중의 하나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인식하는 데서 사진에 대한 탐색을 시작한 책이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가 쓴 <카메라 루시다 camera lucida> (‘밝은 방’이라는 뜻)라는 짧은 에세이집이다. 다재다능하긴 했지만 그 자신 사진작가가 아닌지라, 사진의 기술적 특색이나 전문용어같은 것은 이 책에서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 단지 그는 “사진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고 탐색하고 명상할 따름이다.

 

바르뜨로 하여금 사진에 대한 통찰을 시작케 한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한 장이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와 단둘이 산 바르뜨는 노환으로 어머니를 잃은 후 견딜 수 없는 비통함 속에 칩거하면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한다. 유품 중에는 마땅히 사진들도 많다. 그런데 최근에 찍은 사진에서조차 그는 어머니를 떠올리지 못한다. 어머니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 냉정한 사실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워진 그 앞에 문득 아주 오래된 옛날 사진 한 장이 발견된다. 바르뜨가 알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 다섯 살 가량의 어리고 수줍은 소녀는 오빠의 등 뒤에 살짝 숨은 채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그러나 의연히 미소짓고 있다. 비로소 바르뜨는 어머니를 발견한다. 그가 알고 있던 어머니, 언제나 상냥하고, 절대로 잔소리를 하지 않고, 겸손하고, 자신을 사랑하였으며 말년에 앓아누웠을 때는 바로 바르뜨의 어린 아이가 되었던 어머니. 그 모든 어머니의 특질이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마치 전기가 통하듯이, 혹은 바늘에 콕! 찔리듯이 자신에게로 전달되어 오는 것을 바르뜨는 느낀다.

 

바르뜨는 사진의 본질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바르뜨는 그가 좋아하는 다른 유명사진가들의 사진은 실었지만 사진에 대한 통찰을 시작케 한 이 ‘문제의 사진’은 에세이집에 싣지 않았다. 그를 ‘바늘’에 찔린 것처럼 전율시키는 이 사진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한 장의 가족사진에 불과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조차 한 권의 사색적이고도 멋진 에세이집으로 생산해내는 바르뜨의 지적인 재능에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책이 바로 <카메라 루시다> 이다. ‘스투디움studium' 이라든가 ’푼크툼 punctum'같은 낯선 용어들이 더러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바르뜨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된 멋진 사진들을 감상하면서 동시에 읽는 이로 하여금 사진에 대한 나름대로의 명상의 경지로 이끌어가는 책, 꼭 한 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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