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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남한산성' - 김훈 지음, 학고재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었다. 읽는 내내 두려웠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남한산성」은 나를 자기 안전에 대한 ‘마음-졸임’의 상태로 끌고 갔고 또 그 상태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남한산성」은 그만큼 역사에 대한 혁신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아니, 「남한산성」은 우리가 지니고 있던 역사상을 물구나무 세워 버렸다.

 

한국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라 할 만한 병자호란을 다룬 「남한산성」은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 듯하게 들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라니! 지독한 모순 아닌가! 그렇다. 지독한 모순이고 처절한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이렇게 지독한 모순으로 가득 찬 시공간이, 다시말해 서울을 버려야만 서울로 돌아올 수 있고 서울을 지키고자 하면 서울로 올 수 없었던 시공간이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이라고 말한다. 세계악인 ‘칸’이 조선을 침략해 남한산성을 둘러싸는 순간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전도되었다고나 할까. 이제 죽는 것은 사는 것이요, 사는 것은 죽는 것이 되어 버린다. 즉 왕을 위시한 조선인 모두가 육체적인 죽음을 결행해야만 정신적인 고결함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육체적인 삶을 이어가려면 영혼을 더럽혀야 하는 이율배반에 빠져 버린 것이다.

 

「남한산성」은 이 이율배반의 상황에서 어떤 이정표도 없는 길을 찾으려는 그 처절한 쟁투에 초점을 맞춘다. 「남한산성」은 대담하게도 당시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등을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의 선택으로 파악한다. 죽어서 사는 것은 분명하고 선명하되 길찾기를 아예 포기하는 것이며, 죽은 듯 사는 것 역시 진정한 길찾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격렬할밖에. 처절할밖에. 결국 조정은 치욕을 감내하면서 ‘살아서 죽는’ 길을 택한다. 깨끗한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민족구성원 모두를, 그 민족구성원의 삶 속에 각인된 민족의 역사 전부를 포기할 수는 없으므로.

 

「남한산성」의 작가는 당시 조정의 이러한 선택에 그것이 비록 최악은 아니더라도 차선도 안되는 것이라는 냉정한 시선을 보낸다. 「남한산성」의 작가는 무엇보다 먼저 당시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것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당시 조정이 고립무원에 빠진 것은 그들이 백성들의 후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백성들의 후원이 없었던 것은 당시 조정이 철저하게 왕족이나 양반 중심의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고통받는 자’들을 배려하지 않은 정치가 최선의 길을 물론 차선의 길마저 불가능하게 했다는 성찰인 셈이다. 이는 이제까지의 역사상에 대한 날선 비판이자 의미 있는 역사상이 발명되는 순간이라 할 만하다. 한마디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그때그곳의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을 하나로 묶어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세계상을 발명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남한산성」을 계기로 우리는 이전에 역사를 보던 방식대로 더 이상 과거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두렵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또, 사족 하나. 「남한산성」을 읽다보면 그때그곳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쉽게 감정이입이 된다. 우리 역시 세계악에 둘러싸여 있거나 악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남한산성’에 갇혀 그들이 자꾸 되씹던 질문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해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곱씹어야 할 질문은, 하여,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살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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