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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닫힌 왼쪽 눈뜨기

음주가무도 덧없어지던 대학 새내기의 6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선배들의 자취방과 동아리방에 숨겨진 책을 찾아 뒤적이는 일. 일종의 ‘금서탐닉(禁書耽溺)’이었다. 저자가 대개 ‘편집부’였거나 복사본이었던 책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국가와 자본」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제국주의론」 「그람시와 혁명전략」 「마르크스와 프로이드」 「모순론」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바로 보는 우리 역사」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껍데기를 벗고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책들을, 나는 오기로 읽었다. 실은 단어를 눈에 스치며 페이지만 넘겼다. 재미라고는 한 줄도 찾을 수 없던 이 별난 취미를 몇 달 동안 지속했던 이유는, 누가 볼까 호들갑떨며 책을 감추던 선배들의 유난스런 표정과 ‘선택된 후배’들만 묵은 체취를 경험할 수 있던 ‘두툼한 책에 대한 질투’때문이었다. 자주와 민주·진보, 합법과 비합법에 대한 논쟁이 수그러들지 않았을 무렵이었고, 선배들마다, 동아리마다 읽는 책이 틀렸으며, 같은 책을 읽어도 해석이 달랐던 때였다.

 

어느 날 나에게도 책 한 권이 던져졌다. 이끼 짙은 개울물빛의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소나무·1992). 아쉽게도 ‘금서’는 아니었다. 각주가 반 이상을 차지하는 논문식 구성, 경제사 중심의 서술, 한없이 딱딱하고 늘어지는 문장. 그러나 공식 출판물이었던 이 책은 한반도의 숨겨진 진실을 너무도 명확하고 강렬하게, 차분하고 입체적으로 이해시켰다.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는 고(故) 박현채 교수(조선대)를 비롯해 박명림 김혜진 양동주 공제욱 김동춘 김광덕 허상수 등 정치학·경제학·사회학을 전공한 당시 소장학자들이 1945년부터 1991년까지 분단 50년의 현대사를 시기별로 심층 조명한 책이다. 대부분의 다른 저작들과 달리, 민족과 계급의 이분법적 시각을 넘어 거시적인 안목에서 접근한다. 뒤틀린 역사, 그래서 좌절과 분노로 점철된 역사를 감성적 차원을 넘어 투명한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 현실에 기반한 역사의 흐름을 서술해 간다. 왜곡된 역사에 대한 단순한 분노가 논리를 갖추게 되고, 내 주위를 설득할 수 있게 된다. 개운하다. 닫혔던 한 쪽 눈을 뜬 것처럼, 유쾌하다.

 

모처럼 이 책을 다시 펼쳤다. 자신이 제기한 민중경제론이 1990년대 초 소련의 몰락과 함께 현실을 잘못 진단한 쓰레기 이론 취급을 당했던 박현채 선생. 그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진다.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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