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도 점을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직장에서의 승진이나 자식의 입시 문제를 비롯하여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꼭 점을 보는 이들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가벼운 심심풀이로 점을 치기도 한다.
‘점을 본다’ ‘점을 친다’는 말을 과거에는 ‘문복(問卜)’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문복에 대한 신뢰도가 오늘날 보다 훨씬 높아서 지체 높은 양반들도 대부분 점을 보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과학이나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이고 보면 돌림병이나 천재지변 등 여러 가지로 뜻하지 않는 변을 당하는 경우,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피병이나 택일, 과거합격 여부 등 삶에 부닥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문복을 함으로써 안정을 얻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가올 화를 미리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 소개할 문서는 부안 우반동에 세거했던 부안김씨 종중에서 내려오는 당시 60세의 진사 김수종의 문복록이다.
김수종은 누구인가? 어린 시절에 자신을 애지중지 아껴주던 조부와 생부를 여의고 성년이 되기도 전에 다시 양모 2명과 양부를 잃었다. 더구나 알콩달콩 부부의 정을 채 알기도 전에 병으로 첫 부인과 사별하였고, 그 후 재혼하였으나 딸마저 저 세상으로 보낸 외롭고 불행한 처지였다.
게다가 58세에 무신난(戊申亂)의 역모에 연루되어 아무 죄 없이 1년여 간을 감옥에서 회한과 고통의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하루아침에 생사의 갈림길을 헤메는 고통을 당한 김수종은 이 후 인간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탄하며 자주 문복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13장의 문복록 가운데 10여 건이 바로 감옥에서 나온 1년 뒤에 작성된 사실을 보면 그의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진의 문서는 1730년 9월에 작성된 문복록이다. 먼저 9월 이후부터 겨울 전까지의 자신과 집안의 운세를 물었던 것인데, 중간 부분에는 밑에서부터 양효, 음효, 음효, 변효, 양효, 양효 순으로 6효를 표시하였다. 즉 이 점괘는 익(益)괘에서 무망(无妄)괘로 가는 점괘라는 것이다. 풀이하면 돌아오는 봄에 손님을 맞이할 때, 말이나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북쪽으로부터 질병의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어 본래의 신수는 좋지 않으나 돌아오는 해(亥)월 초부터는 운수가 길하며, 질병도 없고 집안의 운세도 좋아 노비들도 번성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점괘가 후일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수종 자신도 점괘에 대해서는 확신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전에도 점을 쳐 보았으나 결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문복을 한 이유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대부 집안의 선비로서 유학적 소양도 충분히 익혔고, 게다가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려 남 보기에는 행복한 생애를 보냈을 것으로 보이지만, 삶에 대한 불안감은 늘 그를 떠나지 않고 괴롭혔고 그가 겪은 갖가지 불행들은 그를 운명론자로 만들었음을, 이 문복록은 말해주고 있다.
/정성미 (원광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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