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느 양반의 호구단자를 통해서 조선시대의 노비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호구단자는 나라에서 3년마다 호적대장을 새로 작성할 때 집집마다 호주들로부터 그 식솔들의 명단을 건네받은 것이다. 고을의 수령은 3년 전의 호적과 비교하여 틀림없음을 확인한 뒤 제출된 2부 가운데 1부를 호주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런데 오늘날 전하고 있는 호구단자들은 예외없이 양반이나 평민의 것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상전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의 경우 호주로 기재되었던만큼 그들의 호구단자가 남아있음직 한데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기록을 오래 전할 수 있을만큼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위 사진의 호구단자는 1870년(고종 7)에 경상도 하동부 서양곡면에 살던 호주 정아무개가 작성한 것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쪽에서부터 세로쓰기로 시작된 이 문서의 왼쪽 아랫부분은 오른쪽과 확연히 구분된다. 오른쪽은 호주의 식구들을 기록한 것으로, 여든 넷이나 먹은 동갑내기 노부부가 아들 다섯을 모두 장가보내 며느리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손주들은 분가했는지 찾아볼 수 없지만 이들만 해도 12명이 된다. ‘천구(賤口)’로 시작되는 왼쪽 하단의 기록은 바로 이 집안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들의 명단이다. 문서에서조차 노비들은 마치 쪽방 살림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 형국이다. 아무튼 이처럼 호적의 노비명단에는 호주 부부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노비를 반드시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설령 노비가 상전과 함께 살지 않고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살고 있더라도 호적에는 이들을 다 기록하였다.
여기에서는 17명의 노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한 사람의 기록을 보면, ‘비(婢) 화순 20세 신해생(辛亥生)’으로, 나이를 적고 다시 출생년도를 간지로 밝혀놓았다. 조선시대에는 호적이나 재산관계문서에서 특히 노비의 경우 나이를 정확하게 기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비를 재산의 일부로 표시할 때에는 그 노비의 생모가 누구이며 또 그 어미가 낳은 자녀들 중에서 그가 몇번째라는 것을 반드시 밝혀놓았다. 예컨대 위의 화순은 ‘비(婢) 선례의 이소생(二所生)’으로 기재되어 있다. 즉 화순의 생모가 선례이며, 그 선례가 낳은 자식으로서는 두 번째가 화순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재산으로서의 노비의 소유권에 관한 한 그 애비가 누구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종모법에 의해 노비의 소유권은 그 노비의 어미의 주인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이밖에 이 노비명단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도망노비와 이미 죽은 노비들이다. 39세의 노 초삼이는 도망을 갔지만 이 명단에 실려 있다. 또 죽은 노비의 경우에는 죽었다는 뜻의 ‘고(故)’자를 달면서까지 호적에 빠뜨리지 않고 그 이름을 넣고 있다. 심지어 115세의 도망노를 기재한 호적도 있다. 노비는 도망을 가든 이미 죽었든 상관없이 내 것이라는 뜻이다. 노비에 대한 양반들의 지독한 소유욕이 아니고 뭔가.
/유호석(전북대박물관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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