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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이용악을 읽던 그 겨울 밤 - 김용택 시인

'이용악 전집' 창작과 비평사

캄캄한 겨울밤 밖에는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지 이 따끔 창호지 문에 눈발이 부딪치는 바스락 소리가 들리곤 했다. 차디차게 식어가는 방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책을 읽기도 하고 시를 끄적거리기도 하다가 소변이 마려워 방문을 열면 불빛 안으로 눈들이 우우 몰려왔다. 툇마루에 서서 오줌을 누면 눈송이들이 발등과 얼굴에 와서 차게 녹았다. 으으 몸서리를 치며 얼른 방문을 닫고 들어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다시 보던 책을 보거나 그냥 누워 눈 위에 눈이 내리는 소리에 마음을 주기도 했다. 새벽이 오면 아버님께서 일어 나셔서 소죽을 끓이고 방이 따뜻해지면 나는 천길 만길 깊은 잠을 잤다. 죽음 같은 편안한 잠이었다. 이용악을 읽던 어느 겨울날밤이었다.

 

80년대 초반 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가 어느 날 얇고 볼 품 없는 복사 본 시집을 몇 권 가져왔다. 그 때 이용악, 백석, 오장환등의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았다. 나는 이용악의 시를 좋아 했다. 그의 시는 큰 산맥처럼 가락이 느리고 큰 파도처럼 부드럽고도 씩씩한 기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나이다운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함경도 사나이들의 느리면서도 든든한 그 무엇이 나를 기쁨에 넘치게 했다. 나는 이용악의 시들 중에서 <오랑캐꽃> , <죽음> , <전라도 가시내> , 등을 늘 가까이 두고 읽었다. 나중에는 기민사에서 해금 작가들의 시집들이 나왔다. 그리고 창작과 비평사에서 이용악 전집이 나와서 그의 산문들도 읽게 되었다. <전라도 가시내> 라는 시에서 나는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라는 구절을 참 좋아 한다. 이 구절은 이용악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구절이라고 생각 한다. 이 구절은 크고 부드러운 파도 같은 가락과 숨 가쁜 산맥의 치달림이 숨어 있다. 나는 시에서의 생명은 가락이라고 생각한다. 가락이 없는 시는 맥없는 설명에 불과 하다. 이 구절은 말을 극도로 절제한 호흡의 흐름을 한껏 조절한 숨결이 느껴진다.

 

이용악의 첫 시집은 1938년에 나왔다. <낡은 집> 이었다. 모두 열다섯 편이었다. 요즘 같으면 한사람이 동인지에도 그만한 분량의 시를 발표 하는데 한권의 시집이 겨우 열다섯 편이라니, 그러나 한권의 시집으로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오륙 십 편 씩 묶어 낸 시집을 읽어도 어쩐지 성에 차지 않는데 말이다. 우리들이 지금 별 쓸데없는 생각으로 종이를 많이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너무 생각이 많아서 세상이 이리 험하고 어지럽고 편하지 못한 게 아닌지. 아무튼 그 작은 시집 <낡은 집> 이라는 시집을 들고 있으면 어쩐지 초졸한 배부름과 구들 같이 따뜻한 행복감에 젖곤 한다. 이 시집 제목과 열다섯 편의 시와 꼬리말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다. 나에게도 그런 욕심이 없는 시의 행복한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걸어 다니면서 시를 착상하고 싸구려 소주를 마시면서 시 구절을 다듬고 추운 이불 속 엎디어서 그것을 완성 했다고 한다. 그의 시에서는 고전적인 시인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나도 시를 늘 걸으면서 썼다. 강물을 따라 26여년을 걸어 다녔다. 물이 불면 징검다리를 맨발로 건너 발이 마를 때까지 강가에 않아 시를 메모했다가 밤이면 이불을 둘러쓰고 엎디어 글을 썼다. 밖이 추운 날은 하얗게 입김이 다 어렸다. 아무리 이불을 끌어다 덮어도 어깨가 춥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춥지 않았었다. 그런 시절, 혼자만 외롭던 시절이 나에게만 있었겠는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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