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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날짜의 표기

중국연호 사용은 500년 국가의 수치

광무7년(1903) 5월 20일 유관현을 조경묘 참봉 판임관 8등에 임명한 임명장. 5월 20일은 양력이다. (desk@jjan.kr)

현존하는 모든 문서들의 정확한 생산연도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특히 토지거래시 주고 받은 매매계약서나 청원서 등과 같이 단순히 간지(干支)만을 적었을 경우 그것이 어느 해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등장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파악해야 하고 그나마 추적이 가능할 경우에만 해당한다. 이런 문서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연호를 통해서 생산연도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중국연호를 사용해 왔다. 중국연호의 사용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력(萬曆), 숭정(崇禎), 가경(嘉慶) 등 중국 황제의 연호가 우리나라의 문서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반감, 즉 왜란 당시 우리나라를 도운 명나라에 대한 ‘재조보은지국(再造報恩之國)’ 인식으로 인하여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 등은 연호가 단순한 ‘시기’의 구분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또한 한 가지 통쾌한 일이 있습니다. 갑오년 이전의 매매 문기에 모두 타국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실로 500년 역사를 가진 나라의 수치였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없애 버린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1900년 중추원 의장이었던 김가진은 우리나라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에 대한 소회를 이처럼 표현하였다.

 

중국연호의 금지는 1894년 6월 28일에 이루어졌다. 중국의 연호 대신에 개국기년을 사용하도록 한 이 조치 후 2일 뒤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개국기원을 일본의 정략적 의도로 파악하는 것은 박영효의 명의로 내려진 훈시 중에 개국기원의 사용과 함께 일본이 우리나라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도록 한 것으로 보아 터무니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후 1896년에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건양(建陽), 광무(光武), 융희(隆熙)등 조선 독자의 연호 사용은 시대인식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의 용도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 세계질서로부터 각국 중심의 다원적 세계질서로의 재편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태음력을 버리고 태양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연계된다. 1895년 9월 9일(음력)에 고종황제는 같은 해 11월 17일(음력)을 1896년 1월 1일(양력)으로 반포하였다. 태양력에 의한 문서작성시기의 표기가 시작된 것이다. 수백년을 음력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양력 사용은 혼돈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렇듯 신정과 설날을 두 번 세는 고민은 양력사용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단기(檀紀), 공자탄강, 조선개국, 분단, 통일 등 지금까지 사용된 수많은 기년의 표기는 시대인식을 대변한다. 자국 연호의 사용과 태양력의 사용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시기의 구분점이기도 한 셈이다.

 

/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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