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틀레프 포이케르트, 김학이 옮김 '광기의 역사...왜 총통의 지도력 믿었지'
모차르트는 예술 분야에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모차르트를 떠올렸다. 내가 알기로 33세에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역사학자는 없었다. 그 나이에 보여준 통찰과 성실한 사색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는 나치즘은 '안네의 일기'나 영화 '쉰들러리스트' 등을 통하여 '잔혹함과 야만성'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런데 1차세계대전 이전(1914년)까지, 그리고 2차대전 이후(1945)는 '정상적'이었는데, 그 사이에 나치즘이라는 별종의 시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정상적인 상태에서 나치즘같은 파탄 상황이 나타났는가? 어떻게 해서 다시 정상화되었는가? 어떻게 나치의 '반유태주의', '반볼셰비즘', '반자본주의'가 지지자들에게 전혀 모순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는가?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 1950-1989)는 독일 나치시대를 연구했던 역사학자이다. 이 책은 1982년, 저자 나이 33세에 쓴 책이었다. 서문의 일부분. "근대성과 야만성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딜레마를 해소하려면, 거기에 함축된 근대성과 진보의 관계, 즉, 기술적·경제적·사회적 발전과 인간성의 고양/해방의 연관 관계를 해체시키거나 비판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이런 말이다. 우리는 20세기, 그리고 21세기로 이어지는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여전히 우리는 근대를 '해방'과 '계몽', '절대자유'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데 우리 실제 근대 역사는 식민지, 전쟁, 민간/군사 독재로 점철되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충분히 근대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빨리 '전근대적' 삶과 생각을 벗어나 '근대적'이 되어야 한다고 닦달하였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우리가 '전근대적'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근대적'인 것이었다. 한 예로, 포이케르트는 나치의 광기를 뒷받침했던 인종주의를 '전근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유전형질에 대한 근대 생물학의 지원을 받은 음모였다. 타자(他者)에 대한 불관용의 가장 비열하고 근대적인 형태!
여기서 그치면 폭로나 문제제기는 되어도 대안은 아니다. 포이케르트가 주목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관철되는 나치즘의 모습이다. 왜 보통 사람들이 테러에 방관하는지, 왜 '총통'의 '지도력'을 믿었는지. 또 나치의 요구에 왜 순응하거나, 저항했는지. 나치에 대한 지지와 실망, 저항을 전혀 도식적이지 않게 당시 포스터, 선전물, 인터뷰, 사진, 일기 등을 통해 설명해간다.
식민지 시대 친일과 반일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식민지시대라는 병적(病的) 상황을 산 당대인들의 운명에 가슴 아파 하면서[傷心. Die Betroffenheit] 비겁하게 행동했거나 타협하고 만 이유를 납득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식민지시대나 나치시대의 '야만성'과 '잔혹함'을 '침 튀기며, 욕을 하며' 폭로하는 단계를 벗어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협/굴종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합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또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꼭 나치시대, 식민지시대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어, 어….' 하다가 이상한 정권에게 나라를 맡겨놓고 불안해하는 일이 역사에는 생각보다 아주 많이 발생한다. 계급을 배반하고, 공공의 가치를 배반하고, 대표성을 배반하는 기묘한 현상들이. 그것이 역사이든, 현실이든 답답한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무엇보다 정신건강에 좋다. 소화된 언어와 통찰이 빚어내는 걸작이다. 더위가 시작되었는데, 이 여름을 보람되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유력한' 방법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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