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책의 향기] 책 한 권 분량 의미담은 '한 줄짜리 시'

'한 줄도 너무 길다' 하이쿠 시 모음집, 류시화 엮음(이레·2000) - 김동규

6월 둘째 주 토요휴무일 전날 갑자기 산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반 아이들에게 모두 문자를 보냈다. 휴대폰이 없는 학생에게는 부모님께 보냈다. 내일 산에 가고 싶은 학생들은 아침 6시까지 어디로 나오라는 문자를. 그랬더니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는지 세 명 정도만 나온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초등 5학년짜리 딸이 저도 같이 간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첫 주말 산행을 가게 되었는데 이럴 수가, 우리 부녀 외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된 탓이었겠지만 조금은 실망하는 마음을 안고 딸과 함께 새벽산에 오르는 길은 정말 크나큰 기쁨을 주었다. 남원에는 양림단지라고 하는 곳에 덕음봉이 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에 오르는 길이 처음에는 자못 그럴 듯하여 땀도 어느 정도 솟아나게 하는 귀여운 산이다. 그래서 남원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산이다.

 

 

그 날 나는 서가에서 『한 줄도 너무 길다』라는 책을 배낭에 챙겨 갔다. 산에 오르면서 쉴 때 이 책을 꺼내어 읽으니 딸이 관심을 보였다.

 

'하이쿠'에는 자연에서 보는 매미, 뻐꾸기, 나비, 나방, 새 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산에서 이 책을 읽게 되면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듯 하다. 결코 쉬운 시가 아니지만, 초등학생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는 아주 짧은 형태, 그리고 뭔가 깊고도 순간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하이쿠'의 세계에 들어서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딸이 재미있게 읽은 '하이쿠' 몇 편을 소개한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 어, 다시 올라가네 / 나비였네! (모리다케)

 

얼마나 운이 좋은가 / 올해에도 / 모기에게 물리다니! (이싸)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 얼마나 멋진 / 부채가 될까? (소칸)

 

높은 스님께서 / 가을 들판에서 / 똥을 누고 계신다 (부손)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 똥 누느라 / 나갈 수가 없다. (소세키)

 

불을 피우게 / 그러면 내가 멋진 걸 보여 줄 테니, / 눈뭉치!(바쇼)

 

'하이쿠'는 원래는 한 줄짜리인데 류시화 시인이 번역 편집하면서 석 줄로 배치하였다. 위의 작품들이 각각 독립적인 '하이쿠'다. 얼마나 순간의 번뜩이는 재치인가? 산에 올라 이런 시들을 읽으면서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이 따사로워질 것인가?

 

위의 '하이쿠' 중에 특히 소세키의 작품은 이런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정치인의 초대를 받고 답장으로 쓴 시'라는 것이다. 이 설명을 읽고 위의 작품을 다시 읽어 보라. 얼마나 통쾌한 답장인가! 물론 이 작품이 우리더러 정치 혐오증에 빠지라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정치인의 초대를 뻐꾸기가 부르는 것으로, 게다가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똥 누는' 일로 나가지 못하겠다라고 한다. 이것은 대단한 희극적 변용이자, 자기 철학에 대한 자부심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력한 연줄에 닿아보려고 노력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사람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지만 참으로 신선하고도 청량한 느낌을 준다.

 

한 편의 시가 세상을 바꾸기엔 역부족일지 모른다. 그러나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고 깊이 있는 시들을 읽게 된다면 세상이 바뀌기 전에 그 시를 읽는 그 사람이 바뀌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면 결국 세상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바뀌게 되어 결과적으로 세상도 바뀌리라는 믿음이 든다.

 

이 날 새벽에 나는 산에서 아름답고도 시원하게 노래하는 새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나도 다음과 같은 하이쿠로 시늉하여 보았다.

 

산에 가기로 약속한 사람들 / 아무도 나오지 못 했어도 / 산에서 만난 수많은 새들!

 

/김동규(본보 서평위원·남원한빛중학교 교사)

 

전북일보
다른기사보기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정치일반[전북정치의 겉과 속] “부실한 지역경제, 정치인 레토릭 남발”

국회·정당민주당 ‘1인1표제’ 결정 연기…공천 규칙에 전북정치 판도 좌우

정치일반전북시외버스 노조 “전북도, 불리한 판결나와도 항소말라”

정치일반강훈식 실장 “외교성과 확산 및 대·중소기업 상생” 강조

정치일반새만금개발청, 중국 투자유치 활동 본격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