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 진술 : 전봉준이다. / 심문 : 나이는 얼마이냐? / 진술 : 41세이다. / 심문 : 거주는 어떤 읍에 하고 있는가? / 진술 : 태인군 산외면 동곡리이다. / 심문 : 직업은 무엇인가? / 진술 : 사(士)를 업으로 삼고 있었다.
1894년 12월 1일 순창에서 체포된 전봉준은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어 이듬해 2월 9일 법무아문권설재판소에서 첫 번째 심문을 받았다. 위 내용은 첫 번째 심문 내용 '초초문목(初招問目)'이다.
정조가 사망하고, 정조의 아들 순조는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왕의 즉위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섭정으로 이어졌다. 정순왕후의 섭정은 정조가 서인의 견제를 받으며 어렵게 쌓아올린 개혁의 성과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드라마 이산을 통해 잘 알려졌듯이 정순왕후와 정조는 정적이었다. 정순왕후의 섭정은 정조의 정치를 거부했던 세력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역사는 그들의 시대를 '세도정치'라고 명명하였다. 더러는 '보수반동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도정치 60여 년의 통치 이후, 조선은 '민란'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일상의 삶을 유지할 수 없었던 민중들은 저항의 함성을 높였다. 1893년 11월 어느 추운 겨울날 전라도 고부에서도 저항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못 살겠다고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살 에이는 추위가 몰아친 11월 공주 우금치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민간인 농민군이 전멸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해 12월 녹두장군 전봉준도 붙잡혔다.
조선의 농민을 위해 일어난 전봉준은 국법을 어긴 '역적'이 되어 일본영사(日本領事)도 회동(會同)한 자리에서 심문을 받았다. 전봉준은 5차에 걸친 심문을 받은 후,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오늘의 문서는 전봉준의 심문기록 '공초(供招)'이다. 소위 '전봉준공초(全琫準供招)'에는 저항 이외에 길이 없었던 조선의 민중의 소리가 담겨 있다.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조는 조선의 개혁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정조가 통치했던 시대을 '잃어버린 시대'로 간주한 세력의 도에 벗어난 권력욕으로 조선의 불행은 싹텄다. 역사는 결코 전진하지는 않는다. 반동의 시대가 오기도 한다. 반동에는 저항도 따르기 마련이다. 그 저항의 힘으로 역사는 힘겹게 전진의 걸음을 뗀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나라 안이 어수선하다. 오늘도 누군가 전봉준처럼 심문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봉준'과 같은 길을 걷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선아(한국고전문화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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