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이 휘감고 있는 금산사의 기록
올해는 가을 단풍이 예년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기후 변화 탓일런지는 모르지만 엊그제 내린 비로 전주시내 가로수 은행잎이 그리 곱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지난 월요일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전북의 역사문물전, 김제' 특별전이 열이었다. 모악산 전주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하다. 무악산(毋岳山)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있기도 하지만 전주사람들에게는 어미뫼산인 모악산(母岳山)으로 어머니의 품으로 느껴지는 산이다.
이 산 자락의 아랫뜸에 금산사가 자리한다. 1865년 겨울에서 1967년 5월가지 전라북도 임피에 잠시 살았던 소치 허련의 그림이 이번 전시회에 선을 보였다. 지역에서 몇차례 소개되기도 소치의 금산사 그림은 사실 금산사를 그린 그림으로서는 실경산수로서는 희귀한 그림이다. 전북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밝은 톤의 채색 그림으로 소치 허련이 그린 몇 점 안되는 실경산수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림은 또 하나의 기록이다. 금산사의 그림에서도 지금은 볼 수 없는 형태의 건물과 석등, 홍교, 성문 등이 그려져 있다. 견훤대왕의 유폐지로도 유명했던 금산사의 경우 그 입구에 지금은 사라져 버린 성문의 모습이 그림에는 그대로 그려져 있던 것이다. 홍교를 지나 금산사의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길에 있는 금강문과 보제루의 형식도 지금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여지며, 방등계단 역시 둥근 원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499년 백제 법왕의 자복(自福) 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전하는 금산사는 진표에 의해 762년~766년까지 중건되었고, 1069년에 대규모의 가람을 형성하였으나, 1598년 임진왜란 때에 미륵전, 대공전, 광교원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암자가 모두 소실되었다. 선조 대에 시작된 재건은 인조대에 이르러 완공되었고, 고종대에 이르러 미륵전, 대장전, 대적광전 등을 보수하였다. 이 즈음에 소치 허련이 금산사도를 그린 것이다. 일제시대인 1934년에 대적광전, 금강문, 미륵전 등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는 그 특성상 수차례의 개보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록화 작업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우리들은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을 알 수 없게 된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과 같다. 기록은 반드시 글로 표현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림과 문학작품에 의해서도 역사는 전해진다. 금산사도와 함께 짝을 이루고 있는 금산사 시(詩)는 조면호가 쓴 것으로 추정되며, 시를 지은 사람은 전라도 감사를 지낸 정기세의 아버지인 정원용이다. 아마도 소치 허련이 정원용에게서 시를 받고 조면호에게 써 받은 것에다, 소치 허련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소치 허련 200년 특별전 도록). 그림과 시에서 뽑아 낼 수 있는 정보는 종종 복원사업에 활용된다. 경기전의 부속시설의 복원도 경기전의라는 책에 실린 그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중요한 사업을 진행할 때 백서를 남기는 것은 그 사업에 대한 전말을 기록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남기기 위한 통과의례의 기록들이다. 행위와 기록은 때문에 서로 보완적이고 진실 규명을 위한 바늘과 실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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