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 시인 유고 시집 '하루 또 하루' 출간
병상의 유리창이 찬바람에 흔들리던 날 그는 아들에게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속에는 '하루 또 하루'라는 시집명과 162편의 시가 담겨 있었다. 시에는 '풀'이 유난히 많이 등장했다. 정양 시인은 "그에게 있어 풀은 사람이 끝끝내 이겨먹지 못할 허무의 지평에 촘촘히 돋아나는 그리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병훈 시인의 유고 시집 「하루 또 하루」(퓨전디자인)이 출간됐다. 그의 아들 이인기씨는 "저승에 가서 못다한 이슬농사나 더 지어봐야겠다는 아버지가 여즉 소식이 없다"며 "이제야 아픈 마음으로 시집을 내놓게 됐다"고 적었다. 그는 누가 보든 말든, 돈이 되든 말든,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죽자살자 시를 써왔다. 그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가장 아픈 매듭인 갑오농민전쟁, 한국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지리산을 방대한 서사시로 조감하는가 하면, 현대인들의 황폐한 삶의 폐부를 찌르는 시를 내놓았다. 고희를 넘기면서도 시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시를 썼다. 노년의 소외감과 허무함을 오로지 시로 다스리고자 했다.
'풀'을 사랑한 시인은 시집에서 200회가 넘게 이 시어를 사용했다. 그의 '풀'은 전원적인 것만도, 농경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소외감과 허무, 절대 고독을 이겨내는 풀의 질긴 생명력을 닮고자 했다.
시인은 물의 숨소리, 바람의 발자국 소리와도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교감했다. 시'잠결에'서는 '나의 숨소리를 듣는다 / 저쪽으로 건너가는 발잣소리를 듣는다'로, 시 '바람은'에서는 '바람은 (…) 가지에 연 꼬리 걸어놓고 나간다 / 상여를 타고 나간다'로 표현했다. '풀'이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구심점이었다면, 물과 바람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영원을 꿈꾸는 아우성이었다.
누구에게는 '손이 크고 따순 분'으로, 또 누구에게는 '군산의 터줏대감'으로 기억되던 시인은 시밭에서 한평생 아낌없이 좋은 날을 살다가 갔을 것이다. 정양 시인은 "선생의 부음을 듣고 허세나 치기 없이 맑은 마음으로 담담하게 눈감았을 그를 떠올리면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고 했다.
군산 출생인 시인은 1959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단층」, 「찬물 한 대접 더 놓고」 ,「물이 새는 지구」 등을 펴냈다. 그는 군산문인협회 회장, 군산예총 회장, 군산문화원장 등을 지냈으며, '제14회 전라북도 문화상' 문학부문 수상(1973) 이래 '군산시민의장' 문화장(1976), '제1회 모악문학상'(1993), '제38회 한국문학상'(2001) 등을 수상했다. 군산신문사 기자를 시작으로 군산민보사, 삼남일보사, 군산매일신문사 등에서 사회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등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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