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원(전 전라북도 도지 집필위원)
'한일합병조약'이 1910년 8월 22일 체결되어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은 종말되었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수탈하고, 조선 총독은 '교육령'· '사립학교령'을 조작하여 식민지 우민정책에 치중,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강행했다.
그런 정황 중에 1918년 겨울부터 '서울 전문학교' 학생들은 망년회나 신년회 모임에서 나라의 현실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토의도 하게 되었다. 청년 학생들의 애국 열정이 점차로 규합되고 강도도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1918년 12월 30일 집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항쟁을 강력히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1919년 2월 8일 유학생들은 학생대회를 소집하고 '조선청년 독립당'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항할 것을 선포하였다.
그 후 학생들은 민족대표 33인이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다는 것을 듣고, 시민들과 함께 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노인과 부녀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기꺼이 시위 대열에 뛰어들었다.
3월 1일 오전, 학생들이 파고다 공원에 모인다는 것을 탐지한 일본 헌병들은 총독부 경무국의 총독 하세가와에게 이같은 사실을 보고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싸전에 놓인 곡식 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독립을 찾아야 합니다. 대한독립 만세, 만세!"를 외쳤다.
유관순 열사는 잠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집으로 갔는데,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일본 헌병들은 유관순 열사에게 7년의 징역을 언도했고 그녀는 어린 몸으로 고문 끝에 처참하게 죽었다. 3·1운동은 조선 민족의 불굴의 정신을 국내·외에 선양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강병원(전 전라북도 도지 집필위원)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