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엽씨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 발간…전북대 민중생활연구소 작업 일환
"왕이 상소를 보고서 부아가 나가지고 '이런 싸가지 없는 자가 있나? 네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일천 자나 되는 상소문을 썼겠는가? 평소에 준비해 놓고 있다가 했겠지'하고 상소문을 집어 던지고는 귀양을 보내라고 명을 내린 거야. 그때가 목산에게는 처음 귀양 길었지. 죄인을 귀양을 보낼 때면 소달구제 싣고 그렇게 가잖아. 이 소달구지가 보통 하루에 사십 리 길을 간대. 근데 영조가 화가 나니까 팔십 리를 가게 한 거요. 이것은 실록에도 나오는 내용이지. 그렇게 처음 귀양 갔을 때 「해상일록」이라는 기록이 거기서 나와요."
영조시대 전주 출신으로 몇 안 되는고위직 관리를 지냈던 호남의 대학자 목산 이기경 선생(1713~1786)에 대한 7대손 이하영씨(전 전북유도회 회장)의 구술이다. 전북대 20세기민중생활연구소 내 무형문화연구회에서 활동하는 김명엽씨가 펴낸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흐름출판사)를 통해서다.
저자는 호남의 대학자임에도 조명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목산의 삶을 그의 문집(「목산고」)과 후손의 기록(「목산선생년보」), 그동안의 논문,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등을 통해 추적했다. 여기에 후손 이하영씨와 대화를 가미시켜 자칫 딱딱하기 쉬운 개인의 전기와 학문세계를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
저자에 따르면 목산에 대한 기록이「조선왕조실록」에 무려 70차례나 언급됐을 만큼 당시 정치상황에서 중요하고도 험난한 삶을 살았다. 대사간 한성우윤 등의 요직과 황해관찰사를 지냈던 목산은 4차례 13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했으며, 생의 마감도 함경도에서 유배생활 중이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았던 목산이 관료생활을 순탄치 않고 잦은 유배를 간 것과 관련, 저자는 철저한 법도를 지키려 한 때문으로 분석했다. 영조가 수시로 여러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특혜'를 받는 것이 싫어 모두 사양하면서 벌어진 이유가 컸다.
목산의 관직생활을 살펴보면 눈앞의 이익보다 확과한 신념을 지키고 살았으며, 책의 제목이 된 '항상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라'는 스승(도암)의 가르침을 실천한 인물로 저자는 평가했다.
"목산이 관직에서 활약하던 때인 선조대 이후 영조대에는 이 고장 호남의 인사들이 심히 소외된 처지에 있었다. 그 이유중의 하나가 이 고장 출신인 정여립의 난 후 비등한 호남 죄지론(罪地論)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목산이 영주에 주청해 일시로나마 호남 소외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마음을 갖게 했다. "
실제 목산의 고향 사랑은 남달랐다고 저자는 서술했다. 관직에서 잠시 물러날 때마다 전주에 거주하면서 호남의 명문거족의 출자와 지연적 연고를 밝힌 기록들을 많이 남겼고, 전북의 유서 깊은 명가의 사류들이 시의에 따르지 않아 불우한 처지임을 통분하게 여기는 술회를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책은 20세기민중생활연구소(소장 함한희 전북대 교수)가 전주 한옥마을에 살았던 선비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 과정에서 시작됐으며, '선비문화유산을 찾아서'제1권 총서로 나왔다. 이 지역 다른 선비가 다시 재조명될 것을 예고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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