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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백지원 얼반테이너 대표 "나는 권력집단 아닌 대중을 위해 일하는 '팝 건축가'"

▲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젊은 건축가 백지원 대표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부딪치고 스스로 치유하면서 열어온 '경험'의 축적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안봉주기자 bjahn@

유쾌한 인터뷰였다. 약속된 시간이 훌쩍 지나가면서 예정되어 있던 그의 일정이 약간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굳이 서둘러 마무리 하지 않았다. 참신한 실험성과 분명한 철학과 탐구정신으로 무장한(?) 그의 공간들이 그렇듯이 그의 내력 또한 충분히 궁금했으며 흥미진진했다. '건축가'가 아닌 '건축도'를 고집하는 '얼반테이너'의 백지원 대표(39) 이야기다.

 

4-5년 전 만해도 무명의 건축가였던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2009년을 즈음해서다. 그해 4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카키색 컨테이너로만 만들어진 건물이 들어섰다. 규모와 고급 자재, 화려한 디자인으로 치장한 건물들이 즐비한 강남 한복판에 등장한 이 건물은 스물여덟개의 군수용 컨테이너를 연결한 구조물에 아스팔트로 바닥을 입힌 개방된 공간. 각각의 컨테이너가 독립된 공간으로 바뀌어 젊은 아티스트들의 스튜디오가 되고, 전시와 공연, 쇼케이스와 파티, 포럼 등 다양한 문화활동에 따라 구조를 바꾸는 복합문화공간 '플래툰 쿤스트할레(Palatoon Kunsthalle)'다. 백대표는 이 건물의 설계와 프로젝트 기획과 운영을 주도했다. 문화계는 그를 주목했으며 젊은 대중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4년, '백지원'은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젊은 건축가가 되었다.

 

그를 만났다. 30대 건축가의 성공 뒤에는 어떤 삶이 있는지 궁금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고향 전주를 떠난 지 20년. 치열했던 일상이 엮어놓은 그의 청년기는 때로 험난했으며 때로 고달팠지만 그를 온전히 세운 빛나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알게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알려진 그의 이름이 결코 요행이 아니라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부딪치고 스스로 치유하면서 열어온 '경험'의 축적이었다는 것을.

 

인터뷰는 서울 장충동 얼반테이너 사무실에서 있었다. 주택가 사이의 낮은 빌딩 1층과 2층을 트인 공간으로 구성한 이 회사에는 대표의 방이 따로 없고, 직능 부서간 경계도 없다. '직책은 역할과 책임을 규정하는 기능을 할 뿐 누구나가 동등한 위치에서 일한다'는 회사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 구조다. 요리를 할 수 있는 너른 주방이 가장 전면에 위치해 있는 사무실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일도 즐거웠다.

 

-'얼반테이너'란 회사 이름이 흥미롭군요.

 

"'어반(urban)'과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컨테이너(container)'를 조합한 것입니다. '도시를 담는 유쾌한 그릇'이라는 의미죠. 우리가 지향하는 회사의 방향과 정체성을 드러내줄 이름을 찾기 쉽지 않아 6개월 동안 고민해 얻은 이름이에요."

 

-2009년에 회사를 열었는데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비결이 있습니까.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회사를 만들면서 정해놓은 원칙을 지키면서 긍정적 사고로 일한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원칙은 얼반테이너의 식구들이 모두 즐겁고 유쾌하게 일하면서 보람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즐겁게 일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가 또 즐거운 일거리를 불러들이는 선순환 구조를 얻게 됩니다."

 

-그 원칙이 궁금합니다.

 

"세 가지인데요. 첫 번째는 경쟁 입찰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의 능력을 원하는 곳에서만 일을 하겠다는 뜻인데, 그래서 수의계약으로만 프로젝트를 받습니다. 두 번째는 하청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세 번째는 가족경영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입사원 프레젠테이션 첫 장에 이 원칙을 담죠. 아직까지 어겨본적이 없지만 사실 회사가 어려울 때는 유혹에 흔들리기 십상이어서 스스로를 지키며 원칙을 강화하려는 노력입니다."

 

-얼반테이너를 만들기 전에는 1인 스튜디오를 운영했던데요.

 

"디자인부터 현장일, 회계와 영업까지 혼자서 해냈던 8년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건축에 관한 모든 것을 현장에서 부딪치며 온몸으로 체득했던 시간이었으니까요. 1인 스튜디오를 열고 가장 많이 했던 일이 도배하고 장판 깔아주는 일이었어요. 아파트 인테리어가 주된 일거리였는데, 창업하고 3-4년 동안은 순익은 커녕 해마다 적자를 봤어요. 현장일을 전혀 모르고 뛰어든 대가였지요.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거짓말처럼 빚을 갚고 흑자로 돌아섰어요. 생각해보면 정말 힘든 시기였는데, 무슨 고집에서였는지 그때도 하청은 받지 않았지요."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면 유혹이 컸을텐데요.

 

"갈등이 없지 않았죠.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그때 모두 몰려왔으니까요. 집이 어려워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현실적 벽은 높고. 외롭게 이 세상과 대면하는 시기였는데, 힘들수록 자존감 존재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고, 결국 그 고민이 그 시기를 지킬 수 있게 했던 것 같아요."

 

-건축을 전공했는데, 왜 굳이 혼자서 하는 일을 택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하는 일이 많았어요. 친구들과 게임방 운영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했어요. 물리적으로 세 개의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힘들었는데, 그 시기를 겪으면서 강해졌죠. 그러나 결국 대학원을 포기하고 게임방도 정리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그래픽 일을 하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사무실에 자면서 하루 15-16시간 일했죠. 어느 날부터인가 회의가 밀려들더군요. 나의 근본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나는 건축가이고, 디자이너'란 생각이 정신 차리게 했습니다. 스케치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죠. 컴퓨터와 결별하고 곧바로 삼성동 여덟 평짜리 지하 월세방에 들어가 4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살았어요. 후배들이 가져다주는 쌀과 라면으로 연명했던 시절입니다."

 

-그래도 그 시기가 길게 가지 않아 다행이군요.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니 그래도 건축과 인테리어였어요. 그래서 1인 스튜디오를 시작했지요."

 

 

-설계사무소 같은 곳이나 현장 경험이 없는데 일거리가 있었습니까.

 

"보험 외판원들처럼 영업을 하러 다녔어요. 친척 선배 친구들부터 찾아다녔죠. 아파트 인테리어 일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입소문이 나면서 바빠졌어요."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겠군요.

 

"처음엔 앉아서 적자를 봤죠. 제 경쟁상대는 아파트 앞 인테리어가게 사장님들이었는데 그 가게들의 단가를 죽어도 맞출 수 없었거든요. 파이프라인이 없었으니까요.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나만의 무기를 만들었죠.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 컴퓨터로 보여주었어요. 고객들의 인식이 달라지면서 단가가 조금 비싸도 계약이 되더군요. 서비스정신으로 무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때부터 입소문, 그것을 저는 구전마케팅이라고 하는데(웃음) 옆 동네 누구 누구 하는 식으로 일이 확장되고 카페, 병원 등 다양한 공간의 인테리어가 들어왔어요."

 

-아파트와 카페나 병원 같은 공간들은 성격부터 달랐겠는데요.

 

"그때부터는 제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공간의 성격을 탐구해 디자인을 하고 실행했습니다. 경력이 쌓이면서 그 작품들은 고스란히 재산이 되었죠. 그 일을 하면서 건축 인테리어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때 건축 분야 생태계도 알게 됐죠. 작업을 하나 진행하는데 100명 정도가 동원되거든요. 그 분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이 저에게 있는 셈이지요. 단가를 너무 낮추어서 계약하면 안 되고, 손해가 나더라도 그 분들과 부담을 나누어서도 안 된다는 신념을 그때 현장에서 터득했어요."

 

-'플래툰 쿤스트할레'는 건축가 백지원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건축주인 독일의 플래툰은 아트커뮤니케이션 그룹인데, 그 인연이 궁금합니다.

 

"플래툰은 서브컬처(비주류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그룹입니다. '플래툰 쿤스트할레' 또한 기존의 문화가 담지 못하는 것들을 담아내는 복합문화공간이지요. 저는 이전부터 컨테이너 작업을 해왔는데, 플래툰의 친구들이 그것을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은 플래툰이 베를린에 이어 두 번째로 쿤스트할레를 들여놓은 도시죠."

 

-컨테이너 작가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는데 컨테이너를 주목한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

 

"어린 시절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농장이 아주 넓고 산을 끼고 있었는데, 그때 부터 움직이는 건축물에 관심이 많았어요. 컨테이너는 이동 가능한 최고의 구조물이어서 제가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모듈건축의 기반이 된 것이죠."

 

-건축물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는 많이 다른것 같군요.

 

"사실 이동 가능한 건축물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이동가능하게 되면 아주 특별한 사회적 환경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 번째가 지주와 결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권력집단과의 결별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죠. 우리나라는 특히 땅이 좁아서 땅을 가진 사람들의 힘이 큽니다. 여전히 봉건주의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인데 만약 이동가능한 집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겠어요. 땅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이야기죠. 빈 땅이 많아지면 그만큼 가치가 떨어질 것이고 결국 이동가능한 집을 가진 사람들이 땅을 가진 사람들의 클라이언트가 되겠죠. 요즈음 젊은 세대들에게는 주택 소유의 개념이 많이 다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환경변화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백 대표가 지향하는 건축 철학은 생태적 환경에 있는데, 컨테이너가 그 통로가 될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지금 이산화탄소 발생수치는 지구가 30년 안에 멸망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만큼 위험한 수치입니다. 화두는 우리가 이산화탄소를 어떻게 낮출 수 있느냐죠. 지금의 환경에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의 47%가 건설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양이죠. 그런데 건축물의 소재를 컨테이너나 자연소재를 이용하거나 필요에 따라 이용 가능한 구조물을 대치한다면 달라지겠죠. 환경을 살리는 길이 여기 있는 겁니다. 컨테이너가 아니더라도 변형 가능한 모듈건축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듈건축의 재활용적인 가치를 주목하는 것인가요.

 

"리사이클링만이 아니라 업사이클링이 되는 건축으로서의 가치죠. 업사이클링되는 건축물이 많아지면 건축의 건강한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젊은 건축가 50인에 선정돼 연설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세상에 절대 남지 않을 건축물을 만들고 싶다며 옮겨 다닐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 인류의 꿈과 희망을 해결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건축가들이 많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인스턴트 건축가'라고 놀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권력집단을 위해서 일하는 건축가가 아닌 대중들을 위해 일하는 '팝 건축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고 보니 백 대표의 작업 대부분이 대중문화를 선도하거나 그 중심에 있는 것들이군요.

 

"카페나 클럽 같은 공간들의 인테리어부터 브랜딩과 마케팅, 팝업 스토어 등 다양한 작업을 합니다. 중심은 공간을 브랜드화 하는 작업이죠."

 

-백 대표가 즐기는 파티도 대중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통로겠죠.(웃음)

 

"물론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회사를 만들고나서 아주 적극적으로 파티를 열었어요. 아티스트들의 파티는 단순히 즐기는 장소로서가 아니라 함께 즐기고 교류하면서 수많은 크리에이티브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간이거든요. 파티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재미있게 즐기는 문화입니다. 특히 좋아 하는 부분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섞여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가며 즐겁게 논다는 것인데, 재미있게 놀다 보면 새로운 것들이 생겨 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창조와 혁신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말미, 그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 유쾌한 도시'는 어떤 것인가 물었다.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는 세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를테면 일등만이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꼴찌에게도 주목하는 사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회라고 그는 덧붙였다. 디자인과 건축이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다가올 미래의 주거환경과 에너지문제,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다음 세대를 위해 꼭 해야 할 선택이고 책임이다.

 

● 백지원 대표는 컨테이너 작가로 유명…평창 스페셜 올림픽 무대 디자인

백지원 얼반테이너 대표는 전주 출신이다. 대학 시절 고향을 떠났던 아버지(백형기)는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완주군 상관면에 내려와 농장을 겸한 목장을 운영했다. 덕분에 그는 상관에서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까지 두 살 터울의 여동생 손을 잡고 버스 통학을 해야 했다. 동네에 또래가 없어 늘 혼자 놀아야 했던 그에게 농장은 유일한 놀이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만드는 것에 특별한 재주를 보였던 그는 초등학교때 이글루를 만들어 그 안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가 만든 생애 첫 구조물이었다. 그는 건축가였던 외할아버지와 가구디자이너였던 어머니로부터 만드는 재주를, 아버지로부터 도전과 실험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다. 우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대 건축과에 입학했으나 컴퓨터 그래픽에 이끌려 전공보다는 컴퓨터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대학 1학년 때 조형론을 강의했던 금누리교수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의미를 통해 '누구를 위해 재능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류를 위한 일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그때 굳혔다.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집안형편이 기울고 어머니가 작고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던 그는 회사생활 2년을 마지막으로 독립, 1인 스튜디오를 열고 건축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첫 작품은 성북동 주택. 건축 경험이 전혀 없던 그의 창조적 사고만을 믿고 부지 선정부터 모든 과정을 온전히 맡긴 건축주 덕분에 그는 건축 현장의 모든 것을 체득할 수 있었다. 1인 스튜디오 생활을 정리하고 '얼반테이너'를 연 것이 2009년. 디자인 설계가 중심이 되는 인테리어와 브랜드 마케팅을 총괄하는 공간 브랜드 기획자로 이름을 더 알리기 시작했다. 대표 작품은 역시 32회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안긴 '플래툰 쿤스트할레'지만,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이름난 클럽과 카페도 적지 않다. SKT의 가로수길 팝업스토어, 화제를 모았던 'SK Week & Water Tank Exhibition'(2009)과 서울 디자인페스티벌의 홍보부스 디자인, 네이버 앱 스퀘어(2011)로 대중들과 더욱 친해졌으며 2013년 평창 스페셜 올림픽 개폐막식 미술감독과 무대디자인을 맡았다. 얼마 전 중국 상해에 한식당 '안녕 키친'을 열어 새로운 문화전쟁(?)을 시작한 그는 지난해 디자이너이자 사진작가인 사라 케이트 왓슨과 결혼, 문화적 동지를 얻었다. 전통과 창조적 힘이 공존하는 전주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좀 더 창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벽이 높은 것 같아 안타깝다는 그는 전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고민하고 있다.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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