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진출 꿈꾸는 젊은세대 중국인 진정한 벗 되어야 / 언어는 신뢰감 주는 통로 중국어 배워야 창업 탄탄
지난해 말, 책 한권을 받았다. ‘상하이 박의 진심경영스토리’라는 부제만 보아서는 성공한 기업인의 자서전쯤 되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책의 제목이 마음을 끌었다. ‘선한 영향력’이라니.
기업의 사회적 기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선한 영향력’이 주는 메시지가 묘했다. 이 책의 저자는 10여 년 동안 대기업의 상해 주재원으로 일하다 1인 기업으로 무역회사를 창업, 5년 만에 주목받는 강소 무역회사로 키워낸 박상윤 사장(51)이다. 세계 시장의 중심에 중국이 들어선지 이미 오래, 사실 주재원에서 기업인으로 성공한 예는 박 사장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의 경영스토리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창업은 대개의 경우, 인생을 바꾸는 새로운 도전이다. 그러나 창업은 철저한 준비를 한다 해도 시행착오의 과정이 통과의례처럼 따라붙기 마련이어서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많은 시간을 준비에 쏟는다. 그런데 박 사장의 창업은 준비 없는 결행. 목표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부였다. 이쯤 되면 창업한지 5년 만에 연매출 400억 원 규모의 무역회사로 성공한 경영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선한 영향력’의 정체(?)도 궁금했다.
지방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전인 지난 4월, 마침 짧은 일정으로 전주에 온 그를 만났다. 빠듯한 일정에도 그에게서는 피곤함 대신 긍정적 에너지가 넘쳐났다.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눈 앞 비즈니스의 좁은 셈법을 떠나 중국인의 진정한 벗이 되어야 해요.” 중국 진출을 꿈꾸는 젊은 세대들에게 주는 그의 조언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그와의 인터뷰로 새삼 깨닫게 됐다.
-책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주재원에서 1인 기업 창업자로, 그리고 지금은 주목받는 강소 무역회사 대표로 성장하기까지 예상했던 것보다는 순탄한 길을 걸어오셨더군요. 고난의 길을 상상했었는데요.(웃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비교적 순탄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꿈을 갖고 구체적인 현실을 상상하면서 성실하게 일 하면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진다는 것을 좌우명처럼 갖고 살아온 덕분인 것 같습니다. 창업할 당시에는 수출영업으로 직장생활을 해온 경험과 노트북 하나면 무역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부였거든요.”
-책의 제목 ‘선한 영향력’이 주는 메시지가 정서적이면서도 강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기여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2년 전에 아프리카에 가 있던 조카가 이메일을 보내왔어요. 달라부쉬(Dollar Bush)라는 식물이 있는데, 볼품없는 이 식물이 사막에 홀로 서있으면서도 동물들에게는 수분을 공급하고 곤충들에게는 서식처가 되는 등 그 안에서 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예쁘지는 않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활용해 가장 자기답게 주변에 선한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장 나답게’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이 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이야기였어요. 생각해보니 ‘선한 영향력’은 ‘상득익장 윤택사방(相得益章 潤澤四方)-서로 협력하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자’는 우리 회사의 기업정신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런 기업, 그런 사람이 되자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대기업 상해 주재원으로 있다가 본사 임원으로 발령 난 그해에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했더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상해에 가족들을 두고 나와 혼자 지내는 일상이 힘들었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교육 등 뒷받침 해줘야할 경제력 부담에 대한 중압감이 컸습니다. 고단하더라도 독립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사표를 냈죠.”
-창업을 갑자기 결정하셨다면 준비할 시간도 없었겠군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준비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20년이나 직장생활을 했는데 정작 사표 내고 나와 보니 막막하긴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창업을 하려면 빈틈없이 준비를 하던데요.
“준비는 중요하죠. 그런데 회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개인 일을 위해 시간과 회사 업무를 활용한다는 것은 결코 바른 일이 아니지요. 책에도 썼는데, 어떤 조직에 있을 때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야 나중에 그 조직을 떠났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잘되기를 빌어줍니다. 그렇지 않고 조직에 있을 때 자신만을 위한 틀을 만들고 기반을 닦아놓는 일에 마음을 쏟으면 동료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됩니다. 뒷말하고 흉보고 욕하고. 그런 에너지는 결국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어요.”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우선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중국인들과 신뢰를 쌓을 수 있을까요.
“진심을 다하면 됩니다. 우선은 언어가 중요한데, 소통이 되어야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의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국어를 배우지도 않고 창업부터 합니다. 물론 통역을 두긴 하지만 한계가 크죠. 중국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익혀야 합니다. 언어는 친밀감을 높이고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거든요.”
-중국어를 일찍부터 공부하셨더군요.
“딱히 나중에 중국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신입사원 시절부터 중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것이 알려져 회사에서 지원하는 중국어학연수의 길을 얻게 되었고, 중국 주재원 발령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좋은 중국친구들도 만났고, 신뢰를 쌓을 수 있었죠.”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실패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던데요. 결국 언어 때문일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어도 안 되는데다가 많은 한국인들이 실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중국인들을 하대하거든요. 편견 때문인데, 한국이 중국보다 앞선 문화권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권위적입니다. 직위 상하를 막론하고 옷차림이 수수하고 상사와 직원의 관계가 수평적인 중국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태도지요.”
-중국 친구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었습니까.
“어깨에 힘을 빼고(웃음) 회사 직원이든 아니든 모두 친구로 생각하고 교류하면 됩니다. 우리 회사에는 직원들이 20대부터 있습니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친구예요. 마음을 열고 존중하며 대하니 신뢰가 쌓이게 되더군요. 중국 직원들이 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平易近人’. 중국말로 ‘핑이찐런’이라고 하는데 ‘가까이 하기에 너무 편한 당신’이란 뜻입니다. 황송한 말이죠.”
-회사의 경영스토리를 듣고 싶습니다. 무역회사인데 업종은 어떻습니까.
“크게 보면 기능성 섬유와 산업용 섬유, 화학제품이 주력 업종이지만, 법적으로 규제하는 품목이 아니면 뭐든지 다룬다는 것이 우리 회사의 철학입니다. 역량만 된다면 비행기나 배도 다루고 싶고 해외에 나가 자원개발에도 참여하고 싶거든요. 이런 철학이 회사 성장에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무역업에도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장단점이 있겠죠. 그동안 지켜보니 특정한 업종을 다루는 무역회사는 중간에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어요. 흐름과 경기를 타기 때문이죠. 우리는 고객들의 ‘니드’에 맞추어 중국의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솔루션 프로바이저(Solution Provider)인 셈입니다.”
-많은 업종을 종합적으로 다루려면 무역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겠군요.
“그렇긴 하지만 흐름을 파악하기 보다는 상해에 뭐든지 해결해주는 ‘상윤무역’이 있다고 소문을 냅니다. 박상윤은 뭐든지 하는 사람이라고. 2008년 말 즈음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상해에서도 적잖은 한국 업체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직물을 다루는 회사는 직물만 하고, 봉제나 의류용 직물을 다루는 회사는 또 그것만 하는 회사들이었는데 경기가 악화되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이 그 분야였거든요. 그런데 우리 회사는 모든 것을 다루는 회사여서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동쪽에 불이 안 켜지면 서쪽에 켜지지 않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위축되면 어떤 부분이 그 자리를 대신해주는 것이죠.”
-한우물만 판다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위험요소가 있겠지만 분명한 장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회사 역시 섬유만 하는 전문 부서가 있고, 뭐든지 하는 종합부서가 있습니다. 섬유본부는 섬유만 집중하고, 무역본부는 모든 것을 열어놓고 종합적으로 취급합니다.”
-혹시 전북과도 연계되는 업종이 있습니까.
“전주에 탄소섬유를 만들어내는 효성이 있죠. 효성의 탄소섬유 중국 대리점을 맡고 있습니다. 고향에서 나오는 탄소섬유를 제가 중국시장에 파는 셈인데, 그래서 자부심이 있습니다.”
-효성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
“2010년 효성이 안양에 특수섬유를 생산하는 공장을 갖고 있었어요. 방탄복 등을 만드는 산업용 섬유인데, 그때부터 중국대리점을 했습니다. 신뢰를 쌓다보니 효성 본사의 사업팀과 연계되었고, 그 인연으로 탄소섬유도 다루게 되었죠. 또 제 전공이 섬유여서 더 관심이 크기도 합니다.”
-한국기업과의 신뢰는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할텐데요.
“우리 회사 일처리 방식을 한국 기업들이 좋아합니다. 제가 주재원을 10년 넘게 했잖아요. 본사에서도 수출업무를 담당했고요. 그래서 한국 기업 수출담당자들의 심리적 ‘니드’를 잘 압니다. 가령 현지의 에이전트들은 바이어를 통해 물건을 싸게만 가져가려고 하거든요. 한국 기업의 담당자로서는 현지 시장상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위클리 리포트’를 만들었어요. 거래처별로 정보를 구해 거래처 상황과 일주일 동안 상담한 내용을 모두 담습니다. 그것을 한국기업의 담당자, 팀장에게 보내줍니다. 중국시장에 관한 정보를 다 알게 되는 것이죠.”
-일종의 정보 공유인 셈이군요. 기업에서는 속성상 정보 공유를 꺼리지 않습니까.
“대부분 정보 공유를 하지 않죠. 특히 무역회사 같은 경우는 정보를 넘겨주면 한국 기업들이 직접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파악한 정보는 다 공유하자는 입장이에요. 우리를 빼고 직접 진행한다 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열어놓으니까, 회사에 대한 신뢰가 더 높아지더군요. 경험으로 확인한 교훈입니다.”
-정보 공유는 소통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인 것 같습니다. 회사 안에서도 서로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합니까. 직원간 경쟁의식도 있고 회사의 정보 유출 문제도 있을 텐데요.
“상해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제가 창업하니까 직원들에게 다 알려주지 말라며 거래처를 다 가지고 나간다고 조언해주더군요. 실제 저보다 일찍 사업을 시작한 업체 사장이 있는데 주재원 시절부터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는 절대 안주는 사람이었어요. 자기만 알고 있는 고급정보라고 생각해서였겠죠. 나중에 그 사람이 회사를 열었는데 사업을 오래해도 남아 있는 직원이 늘 2-3명 정도였어요.”
-회사의 거래처나 모든 정보를 직원들에게 공개하나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직원들에게 다 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계속 새로운 정보를 알면 되잖아요. 퇴사하는 직원이 정보를 좀 빼 가면 어떻습니까. 두렵지 않아요. 사실은 누군가가 퇴사하면서 거래처 정보를 가져간다 해도 우리 회사는 이미 직원들이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직원이 퇴사하면 다른 직원이 업무인수 인계를 받지 않아도 곧바로 그 일에 개입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창업 이후 큰 어려움은 정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실패의 경험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조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초창기에 어려웠습니다. 창업할 때 2억 원으로 시작했는데, 6개월 지나니 1억 원 남았더군요. 직원이 다섯 명이었는데, 상황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업무가 주로 중개 일이다보니 커미션도 바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자본금만 나가는 형국이었죠. 게다가 경기는 나빠져 주문도 없고 저는 월급도 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매출이 없으니 영수증 처리도 못하고 막막했죠. 그런데 문득 ‘사랑의리더쉽’이란 여섯 글자가 떠올랐어요. 직원 한명을 그만두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깨달음이 있더라고요. 어려울 때일수록 웃음과 사람으로 직원들을 대해야겠다는. 다음날부터 웃으며 직원들을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다른 업체들은 더 어려워지는데,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2008년 12월, 덕분에 신용장을 받아 중국에서 오픈할 수 있었습니다.”
2011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오면서 재정위기를 먼저 맞은 것은 유럽이었다. 중국 수출도 막혀 박 사장의 회사도 이익은 줄고 비용은 증가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설상가상, 상해 시에서 외지인들의 4대 보험 의무 가입 정책을 발표했다. 5년 유예기간이 있었지만 박 사장은 이때도 정면돌파를 택했다. 규정이 발표되자마자 전 직원 4대 보험을 들고 내친김에 직원들의 출산 양육비를 정기적인 임금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직원들은 더 열심히 일했다. 1-2월 비수기에도 실적은 100% 성장했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정공법으로 맞서 오히려 동력을 만들어낸 박 사장은 이제 다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꿈꾸는 ‘선한 영향력’이 더 크게 발휘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 박상윤 사장은 창업 5년만에 연매출 400억…주재원서 '1인 기업 성공 신화'
박상윤 사장은 익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익산에서 다녔다. 초등학교를 나와 공무원이 된 아버지는 타고난 부지런함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는데, 공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열어 여든을 앞둔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가 고민하던 사춘기 시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자신의 이름 ‘상윤(相潤)’의 뜻에 눈을 떴다. ‘서로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그때부터 마음에 새겼다.
전북대 상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1980년대는 학생운동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운동권에 적을 두진 않았지만 운동권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의식을 공유했던 그는 학교를 드나드는 사복경찰에게 감시의 대상이었다. 결국은 덕진공원 옆 여관에 불려가 1박 2일 동안 전단지를 뿌렸다는 자술서를 쓰라는 강요를 받았다. 하지 않은 일을 거짓으로 인정해야하는 자술서 대신 군 입대를 택했다.
복학 후에는 공부에만 몰두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치고 선경케미칼에 입사했다. 지방대 출신이란 ‘핸디캡’을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극복했다. 입사 첫날부터 중국 주재원으로 발령 나기까지 매일 아침 7시 30분 출근시간을 지켰다. 가끔씩 사무실을 둘러보는 회사 사장은 가장 일찍 출근해 중국어를 공부하는 신입사원을 눈여겨보았다. 회사가 지원하는 중국어학연수에 뽑힌 것도, 중국 주재원 발령을 받은 것도 그 덕분이었다. 1996년 1월부터 상해 주재원으로 일하기 시작해 12년 만에 서울 본사로 발령이 났다. 가족들은 상해에 두고 귀국해 여덟 평 남짓한 오피스텔에서 지내면서 창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상해로 돌아와 자본금 2억원을 투자해 1인 기업 ‘상윤무역’을 열었다. 2008년 3월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오로지 직무에만 충실했던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결행한 창업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친분과 신뢰를 쌓았던 중국지인들의 도움으로 매년 100% 이상 성장, 창업 5년 만에 연매출 400억 원 규모의 강소 무역회사를 만들었다. 직원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 기회를 갖게 해주고, 미래의 꿈을 공유해온 기업 철학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인생의 전반전을 끝내고 이제 후반전의 시작점에 선 그는 오랫동안 품어온 기업의 ‘선한 영향력’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 크고 작은 강연을 통해 자신의 기업 철학과 가치관을 공유해온 그는 지난해, 중국진출을 꿈꾸는 젊은 세대를 위한 책‘상하이박의 진심 경영스토리-선한영향력’을 펴냈다.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인 그의 ‘진심경영’ 민낯이 거기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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