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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금요수필] 액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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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규 수필가​​​​​

어제 어머니를 모시고 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가는 길이었다. 면회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평소 습관대로 차를 몰았다. 앞차가 좌측 방향지시등을 켰다가 갑자기 내차 앞으로 끼어들었다. 피하기에는 뒤에 따라오는 차와 간격이 아슬아슬했다. 재빨리 핸들을 돌리는 순간 차체가 흔들렸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더니 일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운전석 옆자리에 계신 어머니께서 많이 놀라셨다. 호흡을 고르고 내렸다. 관련된 두 차량 운전자가 모두 아들뻘보다 아래인 듯 보였다. 내 앞에 가며 원인을 제공한 운전자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문제는 나와 접촉 사고를 낸 차량 운전자이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며 어쩔 줄 모르고 아버지께 연락하겠다며 전화기를 꺼냈다.

두어 달 전이었다. 딸아이가 사진을 보내고 이어서 전화가 왔다. 사진에 뒤쪽이 움푹 패고 길게 긁힌 딸의 차 모습이 보였다. 녀석이 후진하다 주차한 트럭을 받았다. 그쪽은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더구나 상대방 어르신이 이해해줘 감사하다며 음료수 한 병에 고마움을 담아 전했다고 했다. 딸은 차를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새 차를 산 뒤 얼마나 좋아했던지 눈에 선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내고 마음 졸였을 딸아이를 생각하니 짠했다. 처음 겪은 사고라 많이 당황하고 걱정이 가득했을 터이다. 상대가 너그럽게 배려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내가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어제 사고는 일방적인 과실은 아니지만 내가 급하게 끼어들면서 일어났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그쪽 차량은 긁히기만 했다. 딸이 냈던 사고를 떠올리며 내가 수리해주마고 했다. 잠시 후 상대방 아버지와 보험회사 직원 그리고 공업사 측에서 도착했다. 공업사 사장이 아버지를 한쪽으로 데려가 무슨 말을 주고받았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보험처리 하지 않는 조건으로 현금 백만 원을 달라고 했다.

터무니없었다. 내 것은 금쪽같고 남의 것은 휴지만도 못 한 게 돈이라지만, 내 차는 파손이 심한데 그렇게 요구하는 상대방이 야속했다. 한마디 쏘아 주고 싶어도 말만 입안에서 데굴데굴 굴리고 말았다. 너무하다 싶어 보험으로 처리하겠다고 했다. 

액땜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 닥쳐올 모질고 사나운 운수를 다른 고생으로 미리 대신한다는 말이다. 보름 후 아들 혼례가 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다. 요즘 각별하게 언행을 조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고를 낸 나를 자책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생각을 바꿔 먹기로 했다. 좋은 일을 앞에 두고 더러 시샘하는 듯 안 좋은 일들이 따른다.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을 호미로 막았다고 여겼다. 어머니도, 나도, 그쪽 운전자도 아무런 부상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만한 게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새벽, 아내와 뒷산에 올랐다. 아내의 속도에 맞추면 양에 차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보폭을 조절하며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산에서 내려오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어제 있었던 찜찜한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내 먼저 집으로 보내고 헬스장으로 갔다. 트레드밀에 올라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속도를 높였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는 가훈을 떠올리며 날숨에 뾰족했던 내 마음속 찌꺼기를 담아냈다. 아침도 거르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눈높이와 키를 맞춘 햇살이 길게 목을 빼고 있었다. 순간, 눈썹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이 반짝였다. 

 

송태규 수필가는 원광고와 원광중, 원광여중 교장을 역임했고 현재 전북 작가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 '손잡이'(에세이 문예)로, 시 '아무거나'(시인정신)로 각각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수필집 '마음의 다리를 놓다' , '다섯 빛깔로 빚은 수채화, 공저', 시집 '말랑한 벽'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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