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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가을, 그 곁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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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순 수필가

창문을 열어보니 어느새 소슬한 가을바람이 인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다. 떨어진 낙엽 주워 그 위에 애틋한 한 줄 써넣어 강물에 띄워 보내놓고 강바람 따라 엽서 한 장 날아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도 풍요로운 가을에만 꿈꿀 수 있는 감미로운 낭만이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이 아침이 그지없이 반갑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있었기에 지금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이다. 

여름 날, 마을마다 골목마다 가득 채웠던 매미의 울음소리도 새삼스레 그리워지고 마당 옆 닭 벼슬 닮은 맨드라미꽃 조차 향기로 불러내는 여름이었기에 가을이 더욱 더 반가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맨드라미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어느덧 예닐곱 살 소녀로 돌아가 마당에 서있다.

그러나 늘 그러하듯 이 맘때 쯤이면 한해를 마무리해야 할 성급한 마음에 빠져드는데 이상하게도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가 떠오르는 날이면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으로 밤을 새웠다.

나 어릴 적 철이 들 때까지, 집안 어른들은 아버지의 부재를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나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다지 외롭지 많게 성장할 수 있어 외로움도 불편함도 느끼질 못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 어느날, 어머니는 나를 앉혀놓고 마치 죄인처럼 참회하듯 내 손을 꼭 잡고 '아버지는 군인장교이셨는데 내가 3살이 되던 해에 근무 중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시며 목 놓아 우셨다. 

그리고 '행여 아버지 없다고 주눅이 들까 봐' 그 동안 숨겼다는 한 맺힌 고백에 나는 어머니를 껴안고 슬피 울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며 달무리 지는 밤이면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 뒤부터 아버지의 유택이 모셔진 고향 남쪽 땅끝 마을로 가는 일은 어느 덧 가을 연중행사가 되었다. 아버지를 뵈러갈 때는 기차를 타기도하고, 버스를 타기도 했는데 산 중턱에 계신 아버지를 뵙고 오면 비실한 나는 몸살을 앓아 누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내 삶이 허허로울 때면 아버지 생각에 먼 길을 마다않고 아버지를 찾아 나서곤 한다. 

어디 이뿐이랴, 한 때는 종이학을 천 개를 접어 보기도 했고 주소 없는 편지를 써보기도 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던 시절도 있었다.  

아버지는 젊은 날 꽃송이 같은 아내와 겨우 세 살 된 꽃봉오리 같은 간난 딸을 두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지금도 가끔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 때마다 동화가 되고 눈물이 되고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어느덧 세월 흘러 세 살 된 애송이가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었건만 아직도 철부지 아이처럼 막연히 아버지가 그리워지면 눈물을 봇물 터진 듯 쏟아내곤 한다.

이렇게 한동안 울고 나면 가슴속에서 꺼내지 못한 사랑 탓일까? 마치 불어왔다가 원을 그리며 빠져나가는 회오리바람처럼 허망의 노래는 되풀이 되곤 한다. 살다가 힘들 때마다 일기장에 몇 줄씩 쓴 진솔한 나의 삶의 고백은 조금이나마 나의 위로가 아니었나 싶다.

눈물도 지나치면 병(病)이 되고 사랑도 지나치면 독(毒)이 된다는 이야기처럼 병이나 독이 아닌 위로가 되어 아버지가 못다하고 가신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 보련다.

그렇다. 늘 그러듯이 올해도 내 삶이 가을 곁에 앉아만 있어도 성숙해질 것만 같은 두근거림이 나를 일으켜 세울 것만 같은데 매년 이렇게 허허로이 속아 넘어간다. 그래도 때로는 바보처럼 내가 그 곁에 머물고 싶지만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이라는 정호승의 시(詩)처럼 앞으로는 예쁘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

그리움이 문을 열면 굳게 닫아 놓았던 마음의 빗장도 열린다지 않던가? 오늘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자꾸만 박동 치며 온 하늘로 번져가는 보고픔의 날개는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이종순 수필가는 월간 종합문예지<문예사조> 신인상 부문에서 수필가로 등단했다. 그는 현재 '전주 아이가 크는 숲 예솔' 대표 및 원장으로 근무하며 우석대학교 아동복지학과 겸임교수와 호원대학교 유아교육학과 외래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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