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5일이면 한국전쟁 발발 73주년이자, 7월 27일에는 정전 70주년을 맞이한다.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전쟁의 상흔이 치유되지 않고 있다. 당시 후방인 전북지역의 경우 남침한 인민군에 의해, 수복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이념 문제로 주민들이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되는 일이 허다했다.
이에 전북일보는 당시 스무살도 안된 학도병의 참전 이야기와 정전, 70년 전의 전북지역 민간인 학살현장 탐방, 아직도 치유되지 않는 상흔과 미래 과제 등을 세 차례에 걸쳐 다뤄본다.
1951년 전쟁이 한창이던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이름 모를 험준한 고지.
군번도 계급도 없는 앳된 얼굴의 소년이 상자를 안은 채 포탄이 마구 떨어지고 사체가 널브러져있는 산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전주 출신 학도병 최종열.
전북일보는 화랑무공훈장 수훈자인 최 옹(90)을 완주군 삼례읍 자택에서 만나 전쟁 발발부터 정전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51년 4월 18살이던 최 옹은 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육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어느 날 국군이 학교에 찾아와 공부하던 학생들을 징집하기 시작했고 최 옹에게도 “얼른 트럭에 타라”고 지시했다.
어린 최 옹은 앞으로 자신이 마주하게 될 처절한 전쟁터의 참상을 상상도 못한 채 트럭에 올랐다.
연천에 도착한 최 옹과 학도병들은 대대 본부중대 소속 전투지원병으로 총탄을 전선으로 나르는 임무를 맡게 됐다.
지프차를 타고 최전선인 고지로 향하는 길은 직접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곳임에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어느 날은 타고가던 지프 바로 옆으로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다 같이 땅에 나뒹굴기도 했다는 것이 최 옹의 설명.
그는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고지를 무거운 총탄 상자를 들고 수습되지 않은 사체들을 밟으며 총탄을 피해 오르내렸다.
최 옹은 "총탄을 옮기던 학도병들이 포탄이나 총에 맞아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고 하루만에 20명의 학도병이 6명으로 줄어든 일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52년 군번을 부여받아 정식 군인이 됐고, 스무살이 되던 해인 1953년 7월 14일에는 공적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도 받았다.
최 옹은 정전일인 1953년 7월 27일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했다.
그는 "이날 국군과 인민군 모두 전쟁이 끝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오전부터 의미 없이 서로 총알을 주고받았다"며 "아마 오후 10시쯤 됐을까 갑자기 하늘이 환해졌다"고 회상했다.
별만 보이는 캄캄한 밤 하늘에 국군과 인민군 모두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참혹한 장소를 기억하고 싶었던 것처럼 쉼 없이 조명탄을 쏘아댔다고 한다.
최 옹은 "낮보다 환한 조명탄 빛 아래 숨진 채 쓰러져 있는 '동포'들을 보면서 고작 이 작은 언덕 하나 차지하기위해 그렇게 참혹하게 싸웠나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살았다는 생각, 그 외에는 없었다"면서 최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이들이 자꾸만 전쟁을 부추기는 것만 같아 답답하다고도 했다.
최 옹은 “6.25는 전선에서만 죽어나가면 됐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며 “이젠 완주든 부산이든 어느 곳에 있어도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어야 하는 시대”라고 설명했다.
이어 “눈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알던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느냐”며 “앞으로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재발돼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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