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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 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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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숙

녹음이 절정을 이루는 계절, 푸른 잔디밭 그늘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살며시 다가가 보니 꽃, 나무, 사물들을 제멋대로 그린 그림 위에 크레파스로 열심히 색칠을하고 있다. 문득 내 어릴 적 보았던 연하고 부드러운 색조가 떠올랐다.

따사로운 햇볕이 양지바른 마루에 한가득 내려앉아 있는 어느 아침나절, 아무런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그 마루 끝에 걸터앉아 갓 깨어난 병아리들이 종종걸음으로 어미 닭을 따라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다 눈이 번쩍 뜨였다. 색깔이 보인 것이다. 노오란색을 처음 인식한 순간이었다. 그 신비로움에 놀라 어린 가슴을 콩닥 이던 내 의식 첫 색깔이다. 진한 원색이 아니었다, 5월과 어린아이, 노란 병아리로 연상되는‘파스텔톤’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겨울엔 서울의 아들 집에 며칠 머물다 온다. 손녀들과 공부방을 치우는데 쓰다만 학용품들이 한 방 가득 나왔다. 막내 손녀가 중학생이 되더니 초등학교 때 쓰던 물건은 모두 다 버린다 한다. 그날 밤, 밤새워가며 구별하여 연필은 곱게 깎아 한곳에 모아놓고, 형광펜들은 색깔별로 한 주먹씩 묶어 담았다. 크레파스는 색깔을 맞춰 케이스에 넣으니 열 케이스가 넘는다. 쓰다만 공책과 연필, 크레파스들을 미리 구해온 라면상자에 차근차근 담으니 두 상자가 넘는다. 쓸만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들지도 못 할 버거운 무게였지만 끙끙대며 집으로 끌고 내려왔다. 공책은 책상 옆에 쌓아놓으니 이면지부자가 된 것 같아 흐뭇했다. 형광펜은 성경책 갈피에 넣었다가 언더라인을 치는 용도로 순식간에 골라 나갔다. 크레파스 용처를 찾기로 했다. 유치원, 어린이집, 방과 후 교실 등, 모두 다 거절이다. 내가 아까워 남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나의 착각이었다. 새것과 다름없는 이것들을 재활용하면 될 것 같은데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당분간 처치 곤란한 천덕꾸러기가 될 것 같다.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 필요한 곳으로 보낼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일곱째 동생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최악이었다. 등교하려면 아침 일찍 새벽밥을 먹고 십 리를 걸어 시내버스를 타야만 했다. 동생들은 어쩌다 시내버스 막차를 놓치면 30리 길을 세 시간 이상 걸어서 왔다. 동생의 미술 시간에 유화물감을 준비해 오라 했다. 새벽밥 먹여 보내고 밤 마중 나서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지만, 농사만으로 생활하는 우리 형편에 학용품 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생도 집안 형편을 알고 사 달라 조르지도 못하고 내 눈치만 보고 있다. 비싼 유화물감 사줄 돈이 없어 난감했다.

할 수 없이 오래전 내가 쓰던 색깔도 부족한 유화물감과 깡통 팔레트를 꺼내줬다. 그러나 투정하지 않고 가져가 그림을 그렸다. 다른 아이들은 새 물감으로 마음껏 칠했지만, 동생은 몇 년 동안 쓰지 않아 말라붙은 물감을 칠하니 제 색깔이 나올리 만무했다. 그런데 미술 선생님은 동생 그림을 칭찬하셨고 시내 중학생 사생대회에 학교대표로 선발되었다.

사생대회에서도 그 팔레트를 사용하여 그림을 완성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었는지 입상하여 상품까지 받아 왔었다. 함께 기뻐하면서도 미안하던 상처가 아물어진 딱지처럼 오래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크레파스에 애착을 두고 있는 것 같다.

‘파스텔톤’은 어린이가 색감에 처음 눈을 뜨게 한 색깔이다. 새로움을 맛보게 한 희망과 성장의 밑바탕이 되어 성품까지도 닮아가게 하고 있다. 푸르른 봄과 어울리지 않게, 햇병아리와 새싹의 노오란 색깔은 어린아이와 더불어 새로운 희망을 상징하는 ‘파스텔톤’으로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하고 있다.

△정남숙 수필가는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전북수필, 행촌수필, 은빛수필, 전북문협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전주국립박물관, 한옥마을 등에서 문화해설사로 자원봉사하고 있다. 저서로는 수필집 '노을을 닮고 싶다'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 '역사의 마당에서 전통이랑 놀아보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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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파스텔 톤 #정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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