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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더 이상 무시하거나 이용하지 말라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각당의 대선 후보가 확정된 이후 각 후보들의 2030을 잡기 위한 경쟁이 본격화 되고 있다. 과거 같으면 40대였을 텐데 분명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나 2030세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했다는 측면에서는 달라졌지만, 2030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가서는 모습을 보면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 과거 선거를 보면 민주당은 어차피 2030은 40대를 따라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단지 2030이 투표장에만 많이 나오는 방도만 찾았다. 반면 보수정당은 2030에 대해 방도를 찾지 못하고 사실상 포기하거나, 중장년 전통적 지지층의 결집에 집중하면서 대책이 없다보니 2030의 투표율이 낮아지길 내심 바랬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보수의 바램과 달리2030이 투표장에 나오기 시작했고, 투표장에 나와서는 40대와 더 이상 동행을 하지 않으면서 민주당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대선 후보들은 2030을 잡기 위한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이 소통이다. 청년과의 만남 이벤트를 만든다. 또 한편에서는 청년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영입한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벤트와 레토릭이 등장한다 With 석열이형. 그렇지만 무대만 바꾸고 비슷한 얼굴에 분칠만 하고 나타나는 모습이다. 과연 제대로 된 혁신과 변화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그 얼굴이 이쁘게 보이고 다르게 보일까?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프레임과 2분법 구도로 단순화시켜 30대 워킹맘 공동선대위원장과 같은 상징조작으로 2030에게 마법을 건다. 그러면 과연 30대 공동선대위원장에 대해 2030이 우리를 대표하고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자신도 모르는 인물이 어느날 갑자기 등장해 제1여당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당대표와 같은 급에 올라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잔다르크라도 된다고 생각할까? 오히려 박탈감만 더 키울 것이다. 아직까지는 각 후보들의 2030 접근하는 방식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기에 지금까지는 2030이 어느 후보에게도 마음을 잘 열려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2030이 더 혐오하는 과거의 방식으로 다가오니 더 거리를 두려 하기도 한다. 후보들이 다가가려는 2030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비합리성이다. 다시 말해 공정과 공존공생의 가치를 지향하며 합리적 논증과 민주적 소통 없이 후보들의 생각만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기에 보수나 진보 포함 정치권이나 후보들은 2030이 어떻게 교육을 받았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어떤 이해관계에 절망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기존의 정치적 틀이나 화법으로 2030의 표심을 얻지 못한다. 2030은 먼저 교육에서 윗 세대와 많이 다르다. 2030은 학교에서 자기 주도학습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도출한다. 또한 다른 의견들과도 소통하면서 공존하는 방식을 배워왔다. 그러기에 2030은 합리적 논증이나 토론도 없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경쟁을 다르게 본다. 윗세대와 달리 경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력과 스팩을 쌓으면서 공정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승자독식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공존공생을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평등을 주장하는 40대와 다르다. 이렇게 준비해서 사회에 진출하려고 하지만 노동시장은 이미 먼저 진입해 조직화된 힘으로 노동 기득권을 지키는 40대세대에 막히고,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은 60대 이상 산업화 세대 등에 막히고 있다. 이제 막 취업을 하여 가정을 이룰 희망에찬 꿈으로 사회에 진출하려는 미래세대에게는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절망적 벽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뛰어 넘으라고, 뛰어 넘지 못하면 너희들 능력의 문제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미래세대는 5060대을 꼰데라 하지만, 40대도 꼰데라 한다. 그럼 대선후보들은 2030표심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간단하다. 2030이 추구하는 가치가 옳다면, 그리고 그들이 쌓은 실력과 스펙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실질적 사회진출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국가 비전과 정책 및 공약을 만들어 주고 실현해야 한다. 더 이상 무의미한 이벤트나 공허한 레토릭, 그들이 선출하지도 않은 인물을 내세워 여론몰이하려는 상징조작과 같은 술수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젠 2030 자신들이 더 잘 알아가고 있다. 자신들이 어떻게 무시당했고 이용당했는지를.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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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02 14:58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장석주 시인 현실은 변화를 겪으며 요동친다. 이 변화는 감각적이고, 수량적이며, 실체적이다. 하루만 자고 일어나도 예전 세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변화의 세계가 펼쳐진다.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가 사라지고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를 거쳐 탈산업사회로 들어선 지도 오래다. 그 사이 농업 인구는 소멸하거나 소수화되고, 디지털 뇌를 장착한 새로운 문명인이 몰려왔다. 인류가 한 번도 겪지 못한 후기 탈산업사회의 디지털 환경 속에서 문명인들은 자기 착취를 일삼고 피로라는 만성적 질병에 찌들어간다. 이 변화를 긴 시간 단위로 조망하면, 도로는 넓어지고, 건물은 높아졌다. 살림 규모는 커졌고, 명목상 가계 수입은 늘었다. 해외여행이 늘고, 집값은 다락같이 올랐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음식점이나 음식 맛은 짜거나 달게 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현실 변화의 품목이다. 짜고 단맛에 대한 선호가 일반화된 탓이라고 추측하지만 음식 맛이 왜 이토록 달고 짜게 되었는지 그 균일화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딱히 알 수가 없다. 과거와 견줘서 책을 읽는 독자나 신문 구독자가 준 대신 스마트 폰, 태블릿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영화는 색감이 화려하고, 촬영기법은 세련되었으며, 내용은 더 잔혹해졌다. 잔혹 범죄가 늘어난 현실을 머금은 탓일 테다. 하지만 피가 튀기는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고문받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경험이다. 어느 사회에나 청년들은 사회의 최전선에서 오늘의 변화를 가장 먼저 맞고 실감한다. 이들이 사회 변화의 촉매이자 발화점이 된 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한국의 419혁명 세대, 일본 전공투 세대, 프랑스 68혁명 세대, 반문화반전운동을 이끈 미국 히피 세대의 중심은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청년세대는 취업절벽이나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곤경 속에서 스펙 경쟁을 하느라 제 존재 역량을 다 쏟는다. 이들은 부의 양극화와 사회적 기회의 불공정에 분노로 들끓지만 불안과 강박을 안고 생존 게임에 속수무책으로 내몰릴 뿐이다. 올해도 수능이 끝나고 50만명이 넘는 청년이 현실의 최전선으로 몰려나오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루저라고 불리는 소득 하위집단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할 것이다. 이들을 하나의 이데올로기,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청년세대는 다른 취향과 감성, 시대정신, 마음가짐을 가진 개별자의 집단이다. 그럼에도 청년을 한 묶음으로 호명하는 움직임은 늘 있어온 일이다. 라이프스타일의 특이점을 끄집어내 청년세대에게 다른 이름을 붙이는 미디어의 작명술은 감탄할 만하다. 그 작명술에 따르면 88만원 세대가 몰려왔다 빠져나가더니, 90년대생이 오고, 지금은 MZ세대가 몰려온다. MZ세대가 물러난 자리를 또 새로운 청년세대가 채울 것이다. 과연 부쩍 척박해진 노동시장에서 구직 활동을 펼치는 오늘의 청년은 누구인가? 당신이 오늘 편의점이나 카페에서 만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 건설노동이나 배달노동을 하는 이 청년은 누구인가? 만일 당신이 기성세대라면 그들은 당신의 딸과 아들이고, 혹은 동생이거나 조카일 것이다. 서바이벌이 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한국의 청년세대에게 현실은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근 TV에서 서바이벌 포맷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끄는 현상도 살아남음이라는 막다른 길에 내몰린 청년세대의 암담한 현실을 반영한다. 지옥에서의 살아남음은 더 이상 가망 없을까? 우리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나는 청년세대에게 가느다란 희망이 될 T.S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을 들려주고자 한다. 시인은 백번이나 망설이고,/백번이나 몽상하고 백번이나 수정할 시간은 있으리라고 노래한다. 우리 앞에 무슨 시간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수정과 결단의 시간이다.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현실을 혁신하려는 실존적 각성과 함께 행동에 나설 동기만 있다면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언제나 가장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결단을 내리기엔 가장 빠른 시간이다. 청년 세대여, 포기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붙잡으라. 지금은 감히 한번 해볼까? 천지를 뒤흔들어볼까?라고 스스로의 결단을 촉구할 순간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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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5 16:46

젊은이와 친구가 되는 방법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2년만에 대면강의가 시작되었다. 2년 다니고 졸업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나온 날이 열 번 남짓하다. 꽃피는 춘 삼월에 입학식을 하고 학과별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축제를 하는 등 사람들이 통과의례를 치르듯 대학에서 행하는 모든 과정이 통으로 생략된 채 졸업을 하게 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2년 동안 학생들을 기다려 온 나는 설레이고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학생들도 마스크를 쓰고 중무장을 하여 얼굴을 모두 가렸으나 학교에 왔다는 기쁜 표정은 가려지지 않았다. 친구사귈 틈도 없었으니 출석을 부르면서 우리 반에 이런 친구가 있다고 소개해 주었더니 서로 서로 박수로 환영한다. 서먹서먹 했던 분위기도 금세 화기애애해지는 순간이다. 강의를 먼저 해야 할까 반갑다는 인사를 먼저 해야 할까. 늘 하는 일이었는데도 갑자기 두서가 없어진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 첫째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자고 하였다. 이 일을 하려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기쁘고, 무엇을 할 때 시간이 가는 줄 몰랐는지 찾아야 한다. 그것이 취미가 되고 특기가 되고 직업이 되면 이상적이다. 왜냐하면 평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업은 내가 즐거운 일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두할 수 있고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인 문제까지 해결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이던지 열심히 매진하고 몰두해보자고 하였다. <맹자고자 상>에서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귀한 구절을 발견하였다. 혁추라는 사람은 바둑의 고수다. 혁추가 두 학생에게 바둑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한 학생은 바둑을 잘 배우기 위해 전심으로 바둑에만 전념하였고 또 다른 한 학생은 바둑을 배우면서도 날아가는 새를 무엇으로 잡으면 잘 잡힐까를 궁리하였다. 그 두 사람이 이룬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나의 모든 에너지를 한곳에 쏟아 뜻한 바에 이르게 하는 전심치지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못 이룰 일이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내 마음안에 중심을 잡아보자고 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한 사람이 조나라에 가면 걸음걸이가 너무 멋진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조나라로 향하였다. 조나라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였는데 조나라 사람 걸음걸이도 배우지 못 한채 자기 본연의 걸음걸이마저도 잊어버려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내 마음의 중심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는 여러분이 잘 하는 것을 하자고 하였다. 중국 음식중의 만한전석은 청나라 황실요리를 칭하는 명칭이기도 하지만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 요리와 한족 요리가 동시에 차려지는 복합식단을 말하기도 한다. 만주족과 한족의 연회에 만주족요리는 한족이 한족 요리는 만주족이 만들게 되었는데 청대의 문인이자 관원이었던 원매 선생은 이 것이 잘못된 일임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만주족 요리는 만주족 사람이 잘 만들고 한족요리는 한족 사람들이 잘 만드니 요리를 서로 바꾸어 만들면서 친목을 도모하기 보다는 서로 잘하는 요리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말이다. 통상적으로 2년간 대면수업을 했다고 하더라도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 밖으로 튀어 나오듯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금세 출중한 인물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학교에 와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서로 서로 얼굴을 보고 공감하고 정서를 나누는 일은 지식을 전달하는 일보다 더 값진 일일 수도 있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청춘의 시대에 집에서 칩거하듯 보낸 젊은이들이 앞길을 잘 헤쳐 갈 수 있도록 좀 더 살갑게 살펴야 할 일이다. 지금 여당, 야당 대선 후보들은 젊은 층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고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퍼주고 베푸는 정책보다는 친구가 되어주고 공감해주고 살펴야 할 것으로 본다.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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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8 16:32

우리 정치의 역설

윤학 변호사(흰물결아트센터 대표) 야권 단일화에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국민의 힘은 안철수의 지지율이 오르면 단일화에 힘을 쏟을 것이다. 그러나 지지율이 정체되면 단일화를 무시해버릴지도 모른다. 대통령 선거는 불과 몇 퍼센트 차이로 승부가 갈리지 않던가. 진보3:중도4:보수3으로 갈라진 정치지형에서 진보든 보수든 중도의 표를 가져오지 못하면 정권획득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합리적 유권자라는 중도4의 공간에 안철수의 지지층이 있다. 안철수의 지지율이 올라가야만 정권교체가 된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선거 때마다 재집권, 정권교체가 최대의 이슈가 되지만 그것은 무엇을 새로 만들겠다는 플러스정치는 아니다. 수없이 재집권, 정권교체를 해왔지만 힘 빠진 네 편을 심판하는 스릴만 즐기지 않던가. 대통령 후보들도 네 편을 밀어내고 내 편이 정권을 갖겠다는 제로섬 정치를 위해 이 주머니에서 뺀 돈을 저 주머니로 옮기는 선심 쓰기로 선거를 치르려 한다. 놀라운 것은 국민들도 제로섬 정치에 열광하며 무능력한 후보에게 환호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무능한 대통령을 뽑아놓고 대통령이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역설적 현실인가. 능력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런 부끄러운 제로섬게임으로 표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 편 네 편을 넘어선 정치, 첨단과학으로 국부를 늘리는 플러스정치에 힘을 쏟지 않겠는가. 요즘 코로나 확진자가 3천 명 가까이 증가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코로나와 같은 비상사태는 늘 찾아온다. 코로나 초기부터 백신 확보를 주장한 정치인이 있었는가? 문재인 정부의 백신 무능력을 뒷북치듯 비난한 정치인들만 수두룩했다. 국민들이 컴퓨터 바이러스란 말조차 알지 못했을 때 백신을 만들어 보급했던 안철수가 궁금했다. 놀랍게도 그는 코로나 초기부터 백신 구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교과서 읽는 듯한 말투가 우스꽝스러워 무시해왔던 그를 처음으로 눈여겨보았다. 컴퓨터 백신 무료 보급, 세 번의 정치적 양보,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고 거대 양당 틈바구니에서 중소정당을 오랫동안 홀로 이끌어 온 사람이 안철수였다. 그 하나하나가 한국 정치사에서 그 어떤 정치인도 해내지 못한 일들이 아닌가. 생업에 한 번도 종사해본 적이 없으면서 소상공인의 삶을 책임지겠다며 큰소리치고, 과학에 대한 기초소양도 없으면서 과학선진국을 만들겠다며 허풍을 떨고, 내 편 네 편으로 분열시키고도 당당해하는 건달 정치에 우리는 환호해왔다. 세상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놓고도 환호는커녕 제대로 평가도 못 받는 안철수에게 빚을 진 느낌이었다. 나는 안철수에게 진 빚을 갚고 싶었다. 그를 우습게 평가했던 빚, 컴퓨터 백신 무료 사용의 빚, 힘든 양보 한 번 못하고 살아온 빚을 국민들이 그의 진면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해보았다. 그의 말이 원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싸움꾼 정치문화 속에서 기성 정치인처럼 보이려고 할수록 그가 더 어색해 보이지 않던가. 안철수 본연의 목소리를 찾게 하자! 나는 클래식 뮤지컬을 연출하면서 성악가들에게 내 목소리를 찾도록 해왔다. 그러면 노래든 연기든 느낌이 살고 메시지도 잘 전달돼 그들 스스로도 놀라곤 했다. 카이스트 교수로, 의사로, 과학자로, 벤처기업인으로 성공했던 그의 경륜이 정치에서도 빛을 발한다면? 우리나라에 새로운 정치문화가 싹틀 것이 아닌가. 첨단과학기술로 세계가 패권을 다투고 있는 이 시대에 맞는 정치도! 안철수와 처음 마주 앉던 날, 그의 말에 그만의 삶을 담아내자고 제안했다. 안철수다운 말로 안철수다운 정치를 하면 국민들도 분명 알아볼 거라고. 그는 내 쓴소리에도 전혀 불쾌해하지 않고 온전히 마음을 열었다. 그는 시간을 쪼개어 이른 아침에도 점심시간에도 나를 찾아주었다. 내 사무실이라 직원들 시선도 있어 꺼려할 줄 알았는데 그는 체면 차리지 않고 내가 하라는 대로 연습에만 집중했다. 그의 겸손함에 머리가 숙여졌다. 그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었다. 이런 정치인도 있다니! 그동안 안철수를 알아보고 지지해온 사람들도 대단해 보였다. 그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던 날, 자기 욕심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나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철수가 안철수의 목소리를 찾았듯 우리도 정치인의 목소리를 낼 것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윤학 변호사(흰물결아트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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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1 17:06

20·30세대와 40세대, Decoupling or Re-coupling?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최근 여론에서 가장 큰 특징은 2030세대(정확히 보면 30세대 초중반)와 40대가 다르다는 점이다. 또한 과거 캐스팅보터였던 40대보다 스윙보터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는 2030세대가 더 주목을 받고있다. 이러한 2030의 표심에 대해 민주당이 가장 당혹해한다. 과거 대부분 선거에서 2030은 40대와 함께움직이는 동조현상(Coupling) 즉 40대가 2030을 이끌면서 세대간 대결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했다. 그런 2030이 지난 서울부산보궐선거에서 40대와 비동조화현상(Decoupling)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대립적 표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서울시장선거의 경우 방송3사 오세훈박영선 후보의 득표율 예측조사에서 1820대는 55.3% vs 34.1%, 30대 56.5% vs 38.7%, 40대 48.3% vs 49.3%로 2030에서는 오세훈이 앞섰다. 최근 정당지지도 조사를 보면 20대로 내려올수록 국민의힘이, 40대로 올라갈수록 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경향을 보인다. 분명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지난 총선까지는 2030은 40대와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그러기에 민주당은 이번 대선도 2030세대가 40대와 같은 표심이길 기대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두세대간 Decoupling 가능성이 크다. 그럼 왜 2030과 40대의 Decoupling이 나타나는가? 2030과 40대 중 누가 변했다는 건가? 그건 그렇지 않다. 2030세대는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절박함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40대는 2030세대의 이러한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젊은 세대가 보수당을 지지하느냐며 핀잔을 준다. 그런 40대를 2030은 꼰대라 한다. IMF 이후 2030 즉 MZ세대는 저성장의 구조화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여 대학 입학과 동시에 스펙을 쌓았지만, 탄핵했던 박근혜 정부와는 달리 40대와 함께 지지했던 문재인 정부에서 취업의 벽도 넘기 전에 주택절벽을 마주하게 된다. 반면 문재인정부에서 노동시장에도 제대로 진입하지 못한 2030과는 달리 이미 노동시장에 진입한 40대는 노동의 조직화된 힘으로 노동 기득권을 강화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비정규직 정규직화, 노동시간 단축 등 노동정책의 편익을 누렸고, 늘어난 수입으로 주택을 마련하고 주식 투자로 재미도 봤다. 반면 40대의 노동 기득권이 강화될수록 2030은 일자리뿐만 아니라, 그나마 아르바이트 자리도 줄어들었고, 노무현 정부와 달리 문재인 정부의 재정확대정책은 미래세대가 갚아야 할 부채만 늘렸다. 2030과 40대는 박근혜 탄핵 때는 공정과 평등이라는 생각이 달랐어도 탄핵이라는 말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평등공정정의 사회의 약속에 묶여있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노동시장에 진입한 조직화된 노동 즉 40대 중심으로 정책적 수혜가 돌아갔다. 문제는 노동시장과 사회적 재화는 한 세대가 과점하면 다른 세대에 돌아갈 것이 줄어든다. 결국 2030은 이러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자각하면서 공정을 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동맹이 분리되는 Decoupling이 나타났다. 그럼 이번 대선에서도 2030과 40대가 분리되는 Decoupling이 재현될까? 아니면 다시 재결합되는 Re-coupling이 될 것인가? 전망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거에서 두 세대의 역학이다. 내년 대선에서 캐스팅보터는 과거와 달리 40대가 아니라 2030세대라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이번 대선은 40대가 아니라 2030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고 2030세대를 잡는 후보가 이긴다. 즉 이번 대선에서 두세대가 Decoupling이 재현되면 지난 서울부산보궐선거에서 보듯이 국민의힘이 이길 능성이 크고, 반대로 Re-coupling이 되면 민주당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 각당에서는 해법이 쉽지 않다. 이는 마치 취직한 첫째에게 부모가 빗을 내 집까지 싸주면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취업스펙을 쌓기 위해 휴학을 하고 있는 둘째에게 집싸는 것에는 아직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과 비유된다. 과연 그런 부모 결정에 가만히 있을 동생이 있을까? 그래서 형제가 다투면 부모는 누구를 나무랄 것인가? 많은 지혜가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결국 해법은 2030의 마음일 것이고, 그 과정을 국민들이 켜보면서 표심을 결정할 것이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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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04 16:50

전주시의원 임기 중 직계가족 취업실태 전수조사 필요

김영기 객원논설위원 참여자치연대 지방자치연구소장 최근 들어 전주시의원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게 처벌 기준이 강화된 음주운전 단속에 걸리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고 전국적인 이슈이며 대선에서도 주요한 사안인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는 의원도 여럿 있다. 일명 경로당 방진망 사건에 연루된 의원은 사안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도마뱀 꼬리 자르기처럼 수사도 흐지부지 되고 대충 넘어가는 모양새이다. 최근 필자가 소속되어 활동하는 단체에도 여러 제보들이 들어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주로 현역 전주시의원들의 가족들이 임기중에 전주시와 전라북도 출연기관 등에 취업하는 사례들이 많다는 것이다. 제보 내용은 아주 구체적이며 기관과 이름들이 거명되고 있다.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속담처럼 의원들 스스로 의원 윤리 강령이나 이해충돌 방지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알아서 행동을 제어해야 마땅한데 최근의 경향들은 이러한 금기를 어기는 것은 물론 너무도 당당하게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법적 위반 여부를 떠나 의원 직책을 수행하는 임기 중에 자신의 가족들이 전주시나 도 출연기관 등에 취업하는 것은 피해야 할 낯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적법 절차를 거쳤다 해도 세간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업 과정이 보통의 공무원 시험과 같은 방식이 아닌 약식으로 이루어져 대부분 면접만으로 뽑거나 인적성 검사와 면접 등으로 뽑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할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전주시와 각 지자체. 전라북도가 앞장서서 현역의원 직계 가족들의 임기 중 행정기관과 출연기관의 취업 실태를 파악하여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면 불필요한 오해와 의혹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 6월에는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있다. 전북은 각종 여론조사 발표 등을 종합해볼 때 여전히 특정 정당의 독주가 예상되고 있다. 경쟁 정당이 거의 없어 말뚝만 박아도 당선되고 아무 연고도 없는 타지인을 공천해도 당선된다는 30여 년의 전통(?)이 내년에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재연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도당의 공천 과정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면 과거처럼 국회의원과 지구당 위원장과의 관계나 충성도에 의해 자질이 의심되는 의원이나 도덕적으로 이미 문제 있는 것으로 각종 언론이나 시민에게 회자되고 검증된 사람들이 또다시 무임승차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의원실에서 집중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기존 당원과 동원된 권리당원. 이를 통한 여론조사 응대 등으로 공천이 좌지우지된다면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현역에 절대적으로 유리하여 지난 시기 무리를 일으켰던 의원들의 재입성 확률이 여전히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천 과정에서 자질이나 능력. 도덕성을 검증하는 절차가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사적 이득을 취하고 불공정성과 갑질 논란을 일으킨 의원들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 전북 도당은 지방의원 입지자들의 공천 과정의 룰을 정하고 지방의원 공천을 관리하고 있다. 도당은 내년도 지방 선거 입지자들의 도덕성 검증이 가능한 권한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현역 의원들의 경우 최근 임기 동안 직계 가족들의 취업 실태를 검증 자료에 넣어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수사 당국의 개입 이전에 의원 갑질이나 불법. 편법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고 의원 신분을 이용하여 사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이러한 행위자에 대해선 공천 배제라는 칼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전북도당의 전향적인 자세를 기대하며 이를 통해 공천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현역의원들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 도민의 지지와 부름에 응답할 것을 촉구한다. /김영기 객원논설위원 참여자치연대 지방자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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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8 16:57

그 많던 한량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장석주 시인 어린 시절, 농사를 짓는 광산 김씨 외가에 홀로 의탁되어 자랐다. 광산 김씨 문중 큰 제사마다 검은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참석하던 할아버지뻘 친척 중 삼례 양반이 기억에 남는다.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웃고, 막걸리를 좋아하던 이였다. 그 어른 참 한량이었지. 그이를 한량이라고 지목하는 말에 비난의 뜻은 없었다. 정약용은 공무에서 물러 나와 건(巾)을 젖혀 쓰고 울타리를 따라 걷고, 달 아래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산림과 과수원, 채소밭의 고요한 정취에 취해 수레바퀴의 소음을 잊었다고 했다. 뜻 맞는 벗들과 죽란사(竹欄社)라는 시모임을 만들어 날마다 모여 시를 돌려 읽고 취하도록 마신 정약용 같은 선비가 한량의 원조였을 테다. 돈 잘 쓰고 풍류를 즐기는 향촌의 유력계층의 젊은이들은 가계 경제에 그다지 보탬이 되지 않았다. 벗을 환대하고 풍류에 더 열심이었던 탓이다. 농작물의 파종이나 수확 같은 노동의 강제를 면제받는 대신 마을 공동체의 의례를 주재하거나 분란 해결에 앞장을 섰다. 마을마다 한두 명 쯤은 있던 그 한량들은 농경시대가 저물고 산업화시대로 넘어가는 변화 속에서 마을 공동체들과 함께 도태되며 자취를 감춘다. 서양에도 한가롭고 세상사에 무관심한 부류가 있었다. 댄디라고 불린 이들은 직업이 없어도 부모의 재산 덕택에 먹고 살 걱정이 없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일체의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교양과 높은 예술적 안목을 쌓고, 세련된 복장으로 군중과 자신을 차별화했다. 멋지게 차려입고 거북을 끌고 파리 산책에 나서던 일단의 사람들. 보들레르는 19세기 서양에 반짝 하고 출현한 이들을 영웅주의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했다. 이 위대한 문명의 잔재는 모든 것에 침투하고 평준화하는 민주주의 물결에 밀려났다. 댄디는 꺼져가는 별처럼, 지는 해처럼 한 점의 애수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세상이 바뀌고 나날을 축제처럼 즐기던 한량도 댄디도 사라졌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 강제의 시대다. 모두에게 노동 의무를 지우는 사회에서 노동으로 자기 부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히거나 고립무원의 처지를 벗어나기 힘들다. 노동의 실행을 거부하고 외톨이로 사는 이들은 한량의 돌연변이 종이다. 오늘날 외로운 늑대, 히키코모리, 사이코패스로 명명되는 이들은 간혹 반사회적 공격성으로 섬뜩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신자유체제는 공동체를 조직으로 전환한다. 오래된 마을 공동체들은 와해되고, 온라인의 그 많은 커뮤니티나 동호회들은 과거의 공동체를 대체한 잔존물이다. 또한 신자유체제는 세계를 극장에서 공장으로 바꾼다. 놀이와 축제는 추방되고, 노동의 실행만이 가치를 부여받는다.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는 진정한 축제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들뜨게 해서 대량 소비에 나서도록 부추기는 상업주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량이나 댄디는 사회적 생산의 유용성 대신에 유희를 선택한다. 그들은 관조적인 휴식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량들이 거간꾼이나 정치 모리배로 타락한 뒤 소멸되면서 우리는 한량과 함께 공동체의 중재자를 잃었다. 호걸스럽게 노닐던 한량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 곁에서 사라진 한량들이 그립다. 새들의 지저귐과 계곡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매화 향기에 취해 시를 짓던 이들이 살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한량들이 누린 여유와 한가로움의 가치를 되돌아보고 생산 강제에 속박당하는 삶의 압박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한량들이 맡던 공동체의 중재자들이 사라지자 사회 갈등은 더 날카로워지고 삶은 속됨 속에서 척박해졌다. 우리는 놀이가 아니라 컴퓨터 게임에 더 몰입하고, 연애가 아니라 포르노에 더 빠지며, 삶의 충족 대신에 쾌락과 말초적 흥분을 추구하는 시대로 들어섰다. 오늘날의 위기는 한가함과 여유를 압살하고, 자발적으로 노동의 강제에 휘말린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닐까?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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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8 16:57

안전! 일일 소방관의 감회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오토바이를 타고 충청도 말을 하면서 전국을 여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한 덕분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향을 알린 사람이 되었나보다. 내친 김에 일일 소방관이 되어 내 고향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새벽녘은 차창을 적실 정도의 가랑비가 내렸다. 비가 오니까 축소해서 하겠지 라는 얄팍한 생각을 가지고 태안소방서에 도착했다. 아파트 2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빨간 소화기가 나를 반기고 넓직한 주차장에 군함처럼 늠름한 소방서가 눈에 들어온다. 소방관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니 그야말로 각이 딱 잡힌 소방관이다. 제복이 주는 경건함과 비장함이 느껴진다. 일일 선생님으로 모신 사수는 소방업무는 불끄기, 구조, 구급 삼단계로 나뉩니다. 신고가 들어오면 차에서 1분 안에 옷을 갈아입고 현장출동을 해야합니다. 아주 긴박해요라면서 교육을 시작했다. 소방서 한편에 군고구마를 굽는 빨간 통이 놓여있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여쭈었더니 1950년대 원북 소방서에서 불을 끄던 소방차라고 설명을 해준다. 리어카에 실려있는 물통에 물을 채우고 경운기 엔진만한 엔진을 달고 나가서 불을 껐다고 한다. 지금의 커다란 펌프카 소방차 에 비교하니 그저 장난감 같아 보이는 차지만 당시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소방차였을까. 그런데 설명해주시는 소방관은 아주 앳띤 소녀로 보이는 소방관이었다. 잠깐만요. 학생아니세요?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소방관 맞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직접 불도 끄러나가세요? 했더니 네 직접 불을 끄러 나갑니다. 불 끄는데 남녀와 나이구분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데 목소리는 오히려 더 크고 당당했다. 이어서 바로 특수 구급훈련장소로 이동했다. 구조해야 하는 환자를 만났을 때 응급처치를 하는 방법이다. 맨 먼저 119에 신고를 요청하고 다른 사람이 있으면 주위에 자동제세동기(AED)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그사이 나는 한 손의 손가락 사이에 다른 손의 손가락을 끼워 가슴을 누르는 심폐소생술 훈련을 실시했다. 직장에서 응급처치에 관한 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직접해보니 이제는 길을 가다가도 환자가 발생하면 바로 응급처치가 가능할 것 같다. 이어진 훈련은 산악사고 등으로 조난당한 환자를 구조하는 상황을 가정하여 119헬기를 타고출동하는 일이었다. 헬기에 타기 전 헬기 타는데 필요한 장비를 착용해야 한다. 탑승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바로 탑승해보니 헬기 안은 응급구조를 위한 장비들로 가득하다. 나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구조대대원으로서 헬기에서 내려 응급환자를 119구급차에 태워 보내는 일이었는데 헬리콥터의 날개가 굉음을 내면서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니 앉아있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환자를 태워서 119 구급차에 태워 보내는 일은 그야말로 비상사태를 방불케했다. 두 번째 임무는 응급환자가 되는 일이었다. 구조대원이 119헬기에서 철로된 줄을 타고 나를 구조하러 내려왔다. 구조대원은 환자의자에 나를 앉히고 서로의 몸을 고리와 고리로 연결하여 나를 119헬기에 탑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헬기에 탑승한 후에도 구급대원은 괜찮으세요? 라면서 계속 나의 상태를 확인한다. 내가 진짜 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진지하게 환자를 살폈다. 특수구조라는 임무를 다하고 헬기에서 내린 대원들은 헬기 앞에 일렬로 서서 안전이라는 구호를 붙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인사를 하고 각자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그 과정은 마치 혁혁한 공을 세우고 돌아온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 한 나라는 국민을 여러 행정부서를 두고 대민 봉사를 한다. 모든 부서가 다 저마다 막중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소방 분야는 자기 자신을 오롯이 내려놓고 대민봉사를 하는 곳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위험해서 할 수 없을 때 나를 대신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분들이다. 날씨가 겨울을 향해 치닫고 있으니 소방대원들의 노고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진다.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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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1 16:30

사실과 진실, 대장동 사건을 보라!

윤학 변호사(흰물결아트센터 대표) 우리는 친구의 전화를 받으면 반가워하며 만나자고 한다. 그러나 만나서 무엇을 하는가? 집값이나 대장동, 이재명과 윤석열 홍준표를 이야기한다. 친구를 만나는 게 아니라 뉴스와 정치인을 만날 뿐이다. 친구를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진실은 친구를 만난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발행하는 <월간독자 Reader>를 즐겨 보낸다. 그러면 독자는 얼마나 되냐, 돈은 되냐부터 묻는다. 편집위원 중에 유명인사라도 있으면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 한다. 글에 담긴 진실을 나누고 싶은데 사실만 알아내려고 애쓴다. 언젠가 수십 년간 고위 공직에 있던 사람의 전 재산이 몇천만 원에 불과한 걸 두고 언론에서는 그가 청렴결백하다고 떠들썩했다. 알고 보니 그는 퇴근 후 술집에 틀어박혀 월급을 술로 낭비했다. 그가 청렴한 공직자였을까. 무책임한 가장이었을까? 재산이 적다는 사실만 강조하다 보면 재산을 탕진한 무책임한 진실은 덮여버린다. 현 정권은 다주택자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리면 주택값이 안정될 거라고 큰소리쳤다. 서민을 위한 정책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세금이 오른 만큼 주택값도 임대료도 올라 결국 서민들의 집 구하기는 훨씬 더 힘들어졌다. 이것이 진실이다. 미국과 패권을 다퉜던 소련이 공산화 초기 무상분배로 열렬한 박수를 받았지만 점점 국민들을 무능하게 만들어 거지꼴이 되었다. 무상으로 돈만 풀면 생산 증가는 없는데 시중에 돈만 쌓여 물가가 올라 생활은 오히려 궁핍해진다. 그런데도 현 정권은 세금을 더 부과해 서민들에게 나누어주면 소득이 늘고 소비로 이어져 경제가 성장하고 그 결과 소득이 또 증가한다는 소득주도성장을 고수했다. 부분 부분의 사실만 좇으면 서민들의 소득이 늘어야 했다. 과연 그랬는가! 소득주도성장의 허구를 현 정권이라고 몰랐을까?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뭔가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 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표를 얻기 위해 그럴듯한 이론을 사실처럼 내세워 합법적으로 돈을 뿌리는 것이 진실 아닐까. 대장동 사건도 누가 얼마를 먹었느냐 같은 단편적 사실이 강조될수록 거대한 진실은 덮이고 만다. 택지개발은 기획 단계부터 비용과 수익을 미리 계산하고 실행에 들어간다. 아파트 몇 채를 얼마씩 분양할지 곱하기만 하면 수입이 정확히 계산되고, 땅값과 건축비를 평당 얼마로 할지 곱하면 비용도 아주 쉽게 계산된다. 그런데 이재명 지사는 나중에 아파트값이 얼마나 오르고 수익이 얼마나 될지 인가할 때 어떻게 알았겠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끌어들인 그럴듯한 거짓이다. 택지개발업자가 분양가에 따른 수익과 분배를 시뮬레이션해보지 않고 개발을 시작할 리도 없고, 인가권자가 그걸 검토하지 않고 인가할 리도 없지 않은가. 이것이 진실이다. 당시 인가권자였던 이재명은 나중에 분양가가 5억으로 오르면 그 수익에 따라, 10억으로 오르면 더 많은 초과 수익에 따라 달라질 수익 분배까지도 택지개발 시초부터 훤히 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가 당연히 넣어야 할 초과이익 환수조항을 빠뜨렸다면 명백한 배임일뿐더러 스스로 부실한 행정가임을 자인한 것이다. 지금도 반값주택이니 기본소득이니 무엇 무엇을 해주겠다는 후보들이 많다. 약자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공약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반값주택이나 기본소득을 줄 만큼 돈을 가진 것도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빼앗아 주겠다는 것인데 강도나 하는 짓을 하겠다는 것 아닌가. 대장동 특혜 사건을 보라! 강도가 빼앗은 것을 강도가 갖지 누구에게 나누어주던가. 이것이 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공약에 열광한다. 거짓이 사실을 덮고, 사실이 진실을 덮을 때 세상은 암흑에 갇히게 된다. 곧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대통령감이 없어 걱정이라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거짓을 사실로 말하고, 사실로 진실을 덮는 후보들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탁한 눈이 아닐까. 진실은 진실을 찾으려는 자에게만 다가오는 선물이다. 그럴듯한 사실과 거짓으로 국민들을 눈멀게 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누구를 대통령으로 세워야 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조금이라도 더 진실하게 살아온 사람다운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우리의 맑은 눈이 간절하다. /윤학 변호사(흰물결아트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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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4 16:55

[금요칼럼] 보수는 왜 스스로 대선주자 못 만드나?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민주당과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민주당은 10일 최종후보를 확정하고, 국민의 힘도 8일 2차 경선을 통해 4명의 후보로 압축한다. 그런데 역대 전통보수는 스스로 대권주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대부분 과거 보수 대통령이나 후보는 외부에서 주요 경력을 쌓은 자산으로 대선 후보가 되었다. 정치경력을 논할 수 없었던 건국 초기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군에서 주요 경력을 쌓았다. 김영삼도 보수와 대척점에서 민주화 운동을 한 이후 3당 합당을 했고 脫군부 권위주의로 보수의 권력을 연장시켰다. 대선에 2번이나 출마했던 이회창도 영입케이스다. 이명박은 대기업에서 만든 신화였다. 박근혜조차 당시 한나라당 내 착근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막상 대통령도 박정희의 딸이라는 후광이 켰다. 역대 대통령이나 대선후보들을 보면 하나같이 보수당에서 잔뼈가 자란, 다시 말해 보수당이 스스로 키우지 않았다. 이번도 그렇다. 작년 윤석열이 조국과 대치하면서 대선후보로 부상되기 전까지는 국민의힘 중심 정권교체가 무망했다. 그런 분위기가 외부에서 윤석열과 최재형이 합류를 하면서 정권교체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보수정당 정치인들은 보수를 주장해왔다. 그러나 막상 보수에 대한 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담론이나 설명조차 잘 없다. 보수는 기존의 것을 지키는 것, 자유 우파, 또는 반공 정도로 뭉뚱그린 보수다. 보수가 무엇이며 보수의 가치나 도덕을 논하는 것은 어렵고 번거로우니 그냥 닥치고 좌파공격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수는 정치인마다 모호하고, 정치인마다 공격 좌표를 찍은 좌파가 다르다 보니 보수가 규정하는 좌파의 수도 점점 늘어난다. 큰정부나 국가주도정책도, 복지, 지역 균형발전, 평준화, 탄소제로?脫원전도 좌파다. 사회적 책임과 연예인 기부도 좌파다. 끝도 밑도 없이 좌파다. 그러다 박정희도 좌파다.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대표의 서울대 강연에서 학생이 그러면 국가주도 경제성장을 이끈 박정희 정부도 좌파 사회주의 정권이냐고 되물었다. 그렇다. 보수 논리대로 하면 국토균형 개발과 고교평준화, 국가주도 경제개발을 이룬 박정희도 좌파다. 자기부정이다. 뿐만 아니다. 서양 특권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좌파다. 그러니 보수는 가치도 시대정신도 밀린다. 논리는 꼬리를 문다. 평준화가 좌파면 국민 70%가 좌파 교육을 받은 하향평준화가 된다. 수준 낮은 따라지다. 그런데 60대 초반 이하 평준화 세대가 IT, BT, CT산업에서 한국의 세계화와 한류를 만들었다. 물론 그 이전 70년대 비평준화 세대의 산업화 역할도 있었지만, 하향평준화 소리를 들은 평준화세대 기분은 어떠할까. 보수는 이념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보수 정치인은 보전을 강조하면서 기득권을 지키는 수구화가 되었고, 상대당을 좌파 이념으로 공격하면서 교조화도 된다. 보수는 이렇게 스스로 수구교조화가 돼 거의 종교 집단의 모습을 띤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성 보수 정치인의 당내 힘은 막강하다. 그 힘은 당과 자파 결속에서 나온다. 이념과 정치적 철학이 빈약하다 보니 그냥 뭉치자다. 그것도 의리로. 안 뭉치면 배신자다. 그런데 이렇게 뭉쳐 당내에서 힘은 키웠지만, 국민의 대중적 지지를 받는 대선후보로 스스로 크지는 못한다. 아니 클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키워주지도 않는다. 국민 대부분을 좌파로 돌리고 박정희도 좌파로 만들고 있으니. 스스로 대선후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보수는 정권교체기마다 정치적 위기를 자초한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대선후보를 영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입으로 끝나지 않는다. 당의 보수노선에 신앙고백을 요구하고 선거조직을 장악한다. 이렇게 되면 영입 대선주자는 이전의 합리성, 개혁성, 혁신성의 정치적 자산은 차츰 소멸돼 대중적 지지도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보수정치인은 스스로 대선 주자가 되지도 못하고 영입된 대선주자도 망치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된다. 지금도.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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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7 14:43

운 좋은 인생

장석주 시인 인문학저술가 며칠 새 가을 기운이 완연해졌다. 푸른 하늘은 명징하다. 구름은 한가롭다. 산기슭에 구절초 꽃은 하늘거리고, 물가에 무리를 이룬 어여쁜 여뀌는 가을의 전령 같다. 대기가 맑으니 가시거리가 한껏 길어진다. 서울 남산타워에서는 인천 바다가 눈앞에 있는 듯하고, 파주 통일전망대에서는 개성이 손에 잡힐 것 같다. 먼 풍경이 가까이 다가올 때 횡재를 한 듯 기분이 좋아진다. 살아서 이런 가을을 맞으니 나는 그럭저럭 운 좋은 인생을 산 셈이다. 아침에는 강낭콩을 넣어 햅쌀로 지은 밥에 갈치조림을 먹었다. 갈치와 함께 얼큰하게 조린 가을무가 달다. 가을볕 드는 창가에 앉아 가르랑거리는 고양이를 무릎에 앉히고, 붉은빛 도는 남천나무를 바라볼 수 있다면 운 좋은 인생을 살았다 해도 좋으리라. 해질녘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 기침 하는 사람들, 입원한 혈액투석환자들,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남자, 젖 달라고 생떼를 쓰는 아기들, 사랑을 앓는 다정한 청년들이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며 사랑하고 기도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고슴도치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간다. 사람으로 사는 한 잔디 깎는 기계에 끼여 죽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다. 게다가 먼 고장에 인심이 후한 고모들 두엇이 살아 있고 그 고모의 딸들이 잘 웃는 처녀들이라면 세상은 더욱 살 만할 것이다. 어렸을 때 이웃에 진주가 고향인 아주머니가 살았다. 남편은 큰 요릿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였다. 그 아주머니와 어머니는 자매처럼 사이가 좋았다. 두 집 다 가난한 살림을 꾸렸는데, 가진 것을 자주 나누었다. 그 남편이 간혹 요릿집에서 남은 음식을 가져올 때는 우리 집과 나누곤 했다. 처음 먹는 생선 요리였는데,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그 집은 아들만 셋이고, 그 중 한 애는 내 또래였다. 세월이 오래 된 탓에 그 아주머니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 아주머니의 아름다운 진주 말씨는 잊지 못한다. 아주머니의 목소리의 맑은 울림과 진주 말씨는 정말 좋았다. 귓가에 맑은 은종이 울리는 듯했다. 몇 년 뒤 그 분이 죽었다. 일요일 종교 집회에 참석하려고 나섰다가 횡단보도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안타까운 사고지만 그 누구의 고의는 없었을 것이다. 가끔 죽은 아주머니를 생각한다. 요릿집 요리사였던 그 남편은 어떻게 되었을까? 남은 아이들은 잘 살고 있을까? 필립 라킨의 시 중에 잔디 깎는 기계가 있다. 시인이 겪은 일을 보고서처럼 감정을 섞지 않고 사실적으로 드러낸 시다. 잔디 깎는 기계가 멈췄다, 두 번째다./무릎을 꿇고 들여다보니/칼날 사이에 고슴도치가 끼여 있었다./죽어 있었다./긴 풀 속에 있었던 것이다. 잔디를 깎다가 고슴도치를 죽인 이야기다. 이 고슴도치와는 안면이 있고, 먹이를 준 적도 있지만 고슴도치는 잔디 깎는 기계에 끼여 죽었다. 신이 잠깐 한눈을 팔았던 것일까? 고슴도치에게 이 죽음은 비명횡사였을 것이다. 고슴도치의 죽음에 대한 가느다란 죄책감이나 회한이 없지는 않았을 테니, 시인은 이제 눈에 띄지 않는 그 세계를/내가 망가뜨린 것이다라고 쓴다. 수레국화가 피는 가을이 오고, 천둥과 벼락이 울려 퍼지는 이 세계에서 약간의 열망과 약간의 불안을 안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고, 건강을 누리며 사는 것은 운 좋은 인생이다. 다만 그 기적은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우연이 빚어낸다. 이 가을에 넘치는 빛의 격려, 작은 꽃들의 위로가 없었다면 인생은 삭막했을 것이다. 한 시인이 썼듯이, 나는 다른 나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태어났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 여기가 내 현존의 자리다. 나는 그것에 만족한다. 다만 나는 실수로라도 세계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운 좋은 인생을 살고 싶다. 정강이뼈가 부러져 살갗을 뚫거나 교통사고로 몸이 깨지고 부서져 생과 작별하는 불운 따위는 피하고 싶다. 오, 그게 내 뜻대로 될 일은 아니지. 하지만 우리는 크고 작은 실패와 작은 불행을, 살아 있음이 일으키는 번민을 견뎌내며 살겠지. 통장 잔고가 비었다고 비탄에 빠지지는 말자. 삶이 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애초에 삶은 우연의 조합이 빚어낸 사태일 뿐이다. 꽃처럼 고운 단풍이 들어가는 이 가을 당신이 고슴도치나 해파리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 있다는 거 자체가 당신 인생이 기차게 운이 좋다는 증거다. /장석주 시인 인문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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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30 17:02

인생은 육십부터인 이유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새해 초 여러 곳에서 주는 달력을 마다하고 하루하루 떼어내는 일력을 사다가 걸었다. 내심 올해는 日新日新 又日新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루에 한 장씩 떼어내며 새로운 날을 살아보겠다는 각오는 작심삼일이 되고 말았다. 오늘은 한꺼번에 여섯 장을 떼어냈다. 시간이 빨리 흘러서일까 달력을 떼어낼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빠서였을까. 어느새 달력의 두께는 아주 얇아졌다. 절기상으로도 상강을 향해 달려가니 월동 준비도 해야 하고 금세 새해가 올 것 같다. 올해가 아직도 두어 달이나 남았는데 내가 새해 타령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년이면 나는 육십이 된다. 내가 어떻게 육십이라는 나이를 먹지? 육십이라는 나이는 옆집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있을 나이이지 어떻게 나에게 육십이라는 나이가 오나. 이제 늙어갈 일밖에 없겠다고 인식하는 순간 덜컥 겁이 나고 두렵기도 했다. 나보다 먼저 육십을 맞은 사람들도 이런 심정이었겠지. 육십을 맞이하는 게 이렇게 두려운데 사람들은 왜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했을까. 나는 그 답을 찾아 나섰다. <논어 위정> 편은 공자가 본인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회고하는 구절이 있다. 공자는 나이 십 오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에 홀로 설 수 있었으며 사십은 불혹이라 하였고 오십에 지천명하였으며 육십에 이순하였고 칠십에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여도 법과 도덕에 저촉됨이 없다고 하였다. 어느 구절보다 육십에 귀가 순해진다는 말의 뜻이 궁금해진다. 논어를 다시 꺼내어 읽어보았다. 송대 주희가 주를 달아놓기를 육십은 마음이 통하여(心通) 무엇을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것을 아는 때라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결국 마음이란 것은 육십이 되어야 성숙해지고 무르익나 보다. 그래서 사람들과 쉬이 마음이 통하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귀에 거슬리지 않나 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신영복 교수는 오랜 수감생활 동안 본인이 읽어온 동양고전을 정리하여 강의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신 교수가 동양고전을 꿰뚫어 읽고 터득한 마음에 관한 구절이다. 마음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음이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이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100세 시대에 사는 우리는 100세 시대가 그저 반갑지만은 않다. 중간에 적어도 한번은 은퇴를 해야 한다. 수입은 적어지고 나이는 많아지고 고뇌는 깊어진다. 은퇴하는 시점을 인생의 끝으로 잡을 것인지 다시 시작하는 시작점으로 잡을 것인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고 선택이다. 육십이라는 나이는 그간의 경험과 연륜에 마음마저 통하는 때이니 인생을 다시 한번 힘차게 살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구순의 우리 어머니는 내가 육십만 됐어도 하고 싶은 거 다 해볼 수 있겠다고 지난 시절에 대한 회한이 많으셨다. 구십 세의 노 교수님은 육십오 세에 은퇴한 후 그저 쉬기만 했는데 구십까지 살 줄 알았더라면 나는 어떤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해야 했다고 고백했다. 내 인생 삼십에 홀로 설 때는 패기 하나로 살아냈다. 육십인 지금은 경험과 연륜과 나와 마음을 나눌 내 편이 곳곳에 포진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한 번 해볼 만하다. 전국의 지자체에도 50플러스라는 기관을 두고 인생 이모작을 응원해주고 있다. 내년에도 나는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에 과감하게 도전을 해보려 한다. 도전은 꿈꾸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흥분되고 설레는데 실행해 나가면 얼마나 더 가슴 벅찰까 상상해보자. 작은 도전이 큰 변화가 되고 그 변화는 내 운명을 바꿀 계기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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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3 16:38

윤석열, 그의 선거 전략은?

윤학 변호사 여권의 히어로였던 윤석열이 여권의 기피 인물이 되고 야권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2년 전 내 사무실 건너 대검찰청 앞 도로는 조국파와 윤석열파로 나뉘어 아수라장이었다. 진보진영의 후광을 입은 검찰총장이 진보의 아이콘 조국을 수사하다니. 윤석열이란 사람이 궁금해졌다. 나라를 위해 나선 것이라면 그에게 길거리의 지지와는 또 다른 위로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나 현직 검찰총장이 나를 만나주겠는가.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어느 일요일 그와 찻집에 마주 앉았다. 내 궁금증에 그는 분명하게 답했다. 우리 대통령들이 모두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정권 내부의 환부를 도려내야 합니다. 대통령도 제 마음을 아실 겁니다. 현 정권이 올바로 가도록 수난의 길을 걷겠다는 그의 결의에 내가 오히려 위로받는 것 같았다. 전 정권 수사 때는 당신 역시 정권의 개인가 했는데 현 정권까지 수사하는 걸 보니 이제 검사로 보이는군요. 무례한 내 말에 화를 낼 법한데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그릇이 작진 않은 듯해 한마디 했다. 앞으로 진보든 보수든 모두 힘들게 할 겁니다. 국민들만 보고 힘껏 나아가세요. 그 후 대통령이 불의한 내 편을 감싼다는 의구심이 커져 갔고 서울부산 보궐선거로 국민들의 마음이 확인되었다. 만약 문 대통령이 윤석열의 정권 내부 수사에 협조했더라면. 문 대통령이야말로 내 편의 잘못에도 칼을 빼어 드는 공정한 대통령이라며 국민들은 얼마나 환호했을까. 그것은 문재인 정권의 성공으로 이어지고 윤석열을 대통령으로!라는 구호는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권이 공격하면 할수록 거물이 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 박정희의 탄압이 김영삼, 김대중을 거물로 만들었듯. 문 대통령이 윤석열을 내치자, 현 정권 인사들은 무차별적으로 그를 공격했다. 윤석열을 키운 것도 바로 대통령이었다. 요즘도 여권은 그에 대한 비난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마치 그를 야권의 대표주자로 세워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작정한 것처럼. 지금 여권의 선거전략은 맞는 것일까. 정권 교체가 시대정신이라고 굳게 믿는 국민들도 많다. 그러나 정권 교체에 희망을 걸고 수없이 정권 교체를 해왔지만 무엇이 달라졌던가. 정권 교체를 내세우면 정권을 지지하는 편과 정권에 반대하는 편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세상은 내 편만 감싸는 불의한 소리로 채워지고 말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반쪽의 실패한 대통령으로, 반쪽의 실패한 국민으로 남게 된다. 정권 교체 전략이야말로 편 가르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야당은 현 정권을 편 가르기의 명수라고 극렬하게 비난해 왔다. 야당 스스로 편 가르기로는 여당의 적수가 아님을 자인하는 셈이다. 그런 야당이 정권 교체라는 편 가르기에 의지하여 선거를 치르려 한다. 지금 야권의 선거전략은 맞는 것일까. 이승만 시대부터 여당은 재집권 구호로, 야당은 정권 교체 구호로 네 편을 공격하며 내 편을 결집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적과 동지를 갈라야만 달성되는 재집권, 정권 교체는 무엇을 만들어내겠다는 전략이 아니라 상대를 무너뜨려 권력을 차지하려는 제로섬 게임일 뿐이다. 이런 선거전략으로는 어느 쪽이 선거에 이겨도 지는 것이다. 지금 정치인 윤석열은 정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며 세력을 키워가는 현실정치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현실정치가 아니라 현실정치에 진절머리 치며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갈망이었다. 그가 현실정치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그에 대한 지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금 그의 선거전략은 맞는 것일까. 국민들 역시 재집권이니 정권 교체니 하며 가족까지 갈라서는 내 편 네 편 선거에 열광하고 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재집권이나 정권 교체가 아니다. 국가의 틀을 바로 잡고, 인간다움을 회복해 선진문화국가로의 새 시대를 여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진정한 소망일 것이다. 그런 소망을 간직한 뜨거운 가슴보다 더 현실적인 선거전략은 없다. 오로지 그 길로만 가면 선거에 진다 하더라도 성공이고, 만약 당선까지 된다면 대성공인 것이다. 역대 검찰총장과 다른 길을 걸었던 야권의 유력 후보 윤석열이 그런 길을 갈 수 있을까. /윤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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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6 14:25

[금요칼럼] 386은 왜 대선후보가 없는가?

1980년대 학생 운동세력이 2000년대 본격적으로 정치에 진출하여 386으로 불렸다. 386세력의 정치권 진출 과정을 보면 이들에 대한 기대도 컸기에 정치권 진입도 특혜를 받았고, 정치에 들어와서도 특별대우를 받아 원내에 쉽게 진입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386세력은 586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과정에서 50대 또는 60대에 진입한 586세력이 대중적 정치 지도자나 대통령으로 성장하지 못하면서 정치적 존재감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이들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로 세대 인구수가 역대 어느 시기보다 많기에 세대적 지원도 클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386세력의 등장을 보면서 첫 등장부터 창대했으니 현재 586에서는 당연히 더욱더 창대하리라 전망했다. 그러나 그러한 전망은 사라지고 있다. 현재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의 차기 대선후보 경선이 진행중이지만 각 당 어디에도 586 유력 대권주자는 없다.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2강을 형성하는 이낙연이나 이재명 모두 과거 학생운동권 386이 아니다. 국민의힘 후보 중에서 원희룡 등이 있지만 윤석열, 홍준표, 유승민 등 유력 주자에 밀리고 있다. 이는 386세력이 대중적 정치인으로 성장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386세력이 많이 진출한 민주당은 당과 정부에는 자리를 잡고 있다. 송영길 당대표나 이인영 통일부 장관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들의 위치는 대중적 정치인으로서 개인적 성취라기보다는 민주당이 여당이 되면서 민주당 내 관계에서 주어지는 측면이 크다. 이는 달리 말해 386세력의 집단적 성취다. 김영삼·김대중은 이미 1970년대에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고, 61년생인 오바마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대통령을 하고 물러났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1977년생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왜 386세에서 대중적 정치인 또는 국가 리더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다양한 진단이나 원인 분석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 원인을 이들 386정치인의 민심 또는 여론을 대하는 관점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이를 대중관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386의 대중관의 가장 큰 특징은 계몽적 대중관이다. 이들은 국민들을 항상 가르치려 하고 계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대중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있다. 이렇게 되면 민심이 천심이 아니며, 민심을 받들 필요가 없다. 또한 계몽적 입장으로 인해 민심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이들은 대중을 주체로 존중하지 않고 홍보나 심하게 말하면 선전선동의 대상 즉 객체로 생각한다. 이러다 보니 민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거나 거스르고 때에 따라서는 전략적으로 바꾸려고 한다. 이런 반(反)대중적 대중관은 그들이 그렇게도 비판했던 대중을 통제 조작했던 권위주의 정권의 대중관과 다를 바가 없다. 386정치인에게는 국민보다는 과거 같이 학생운동을 해온 정치적 결사체가 우선이다. 그리고 이 정치적 결사체를 기반으로 민주당 당권을 잡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딱 거기 까지다. 이번 대선에서는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혹자는 당권 이후 대권이 586의 전략이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중관이 바뀌지 않는 한, 5년이란 시간이 주어져도 686이 되는 이들에게 대권의 기회가 올지는 미지수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관은 현재 386의 아래세대로 대중운동은 고사하고 학생운동조차 경험이 적은 40대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모습이다. 그래서 40대도 당내 패권적 싸움에는 능하지만 대중적 정치인은 잘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40대는 세대역할에서도 과거와 같은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대중관으로 386세력과 40대에서 대중적 국가 지도자가 나오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들 방식의 정치로 당내 패권은 앞으로도 계속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심과 민심의 불일치를 심화시켜 정치를 소모적이고 갈등적 대립으로 만들어 갈 가능성도 크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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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9 15:10

가을밤에 생각한 것들

장석주 시인 가을의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매미소리는 잦아들고, 밤의 서늘한 기운을 품은 풀벌레 소리의 데시벨이 부쩍 높아졌다. 불을 켜지 않은 채 풀벌레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데, 그것은 마치 영원의 저쪽에서 보내는 신호 같다. 몸 안의 가장 작은 뼈인 추골, 침골, 등골 등을 통해 이 소리가 전달된다. 이 청각의 기적을 타고 가을밤의 쓸쓸함과 멜랑콜리가 몰려온다. 물론 내 상태는 항우울제인 프로작을 삼켜야 할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19세기 초 런던 거리에는 약 4만 개의 가스등이 켜졌다. 헤드랜턴도 손전등도 없던 시절 작가 디킨스는 불면 때문에 축축한 습기와 안개가 짓이겨진 어둠이 유령처럼 떠도는 런던 거리를 쏘다녔다. 촛불과 고래 기름을 써서 어둠을 밝히던 시대는 빠르게 지나갔다. 백열구가 나오고 산업사회로 진입한 뒤 인공조명들이 밤을 장악한다. 그리고 빛공해와 소음에 의해 밤은 잠식되었다. 이론적으로 인간은 밤하늘에서 3000개의 별을 식별할 수 있다지만 많은 별과 은하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이에 따라 빛과 어둠의 순환주기가 깨졌다. 많은 양서류와 파충류들이 이것에 영향을 받아 생태적 교란에 빠졌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는 밤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 저 선사시대 인류의 뇌에 눌어붙어 있던 두려움이 유전된 탓이다. 밤마다 맹수들이 포효하고, 재앙은 어디서 덮칠지 몰랐던 시대에 밤은 지옥의 휘장이었다. 밤이면 소등과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중세 때까지 밤은 약탈과 방화가 일어나는 위험한 시간으로 인지되었다. 악령들이 출몰하는 미지와 불가사의의 시간, 갖가지 범죄들이 들끓는 시간에 인류는 전전긍긍했다. 밤은 인간 최초의 필요악이자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자주 출몰하는 두려움이다.(로저 에커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현대에 와서야 밤에 덧씌워진 사악한 이미지가 벗겨지고, 인류는 밤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밤은 어둠의 시간이다. 밤은 개와 늑대가 분별이 안 되는 땅거미 질 때 시작한다. 해 진 뒤 사위가 어둠에 갇힐 때 낮은 어둠에 삼켜져버린다. 땅거미(gloaming), 닭 가두기(cock-shut), 더듬거리는 시간(groping), 까마귀 시간(crow-time), 낮의 대문(daylight's gate), 올빼미 빛(owl-leet) 등등 이 어름을 가리키는 영어 관용구들은 많다. 야생의 밤은 달빛과 별빛을 빼고는 캄캄하다. 그 어둠 속에서 큰고양잇과 동물을 비롯한 야행성 동물과 올빼미와 같은 조류들이 움직인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좇는다. 밤은 잊힌 우리 삶의 절반이다. 우리 생의 절반은 밤에 빚어지지만 그 절반의 의미와 비중은 간과되는 것이다. 밤의 일은 낮의 노동과 성취에 견줘 대단치 않다고 여긴다. 무심코 밤을 잠과 꿈의 시간으로만 분류한다. 모든 밤은 그 이상이다. 밤은 낮의 노동, 낮의 근심으로부터의 휴식과 해방을 가져다준다. 또한 밤은 사교와 성과 고독의 시간을 베푼다. 우리가 결락시킨 밤에 이루어지는 감정생활, 밤에 은밀하게 일어난 일들을 합해야 인간의 역사는 완전해진다. 지구를 밝히는 최대의 조명기구는 태양이다. 천문학자 쳇 레이모가 말하듯이 태양은 몇 천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원반 속의 별 하나일 뿐이다라 하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광원은 지구의 낮을 온전하게 밝힌다. 밤의 시작과 함께 이 조명기구는 돌연 꺼진다. 부엌, 뒷마당, 풀숲은 어둠에 잠기고, 밤이 우리의 시각을 회수해간다. 달이 어둠 속에서 작은 조명기구 구실을 할 때 나는 가을밤의 고요와 쓸쓸함, 멜랑콜리를 맞는다. 세계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는 갈망이라는 에릭 G. 윌슨의 말에 동의하는 한에서 나는 멜랑콜리를 좋아한다. 그것은 차라리 가을밤의 특권이다. 가을밤에는 잠들고 싶지 않다. 오래 깨어서 명징한 의식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싶다. 생각한다는 것은 어둠을 찢고 삼키는 일이다. 나는 낮보다 밤을 더 충만한 의미의 시간으로 향유하고 싶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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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2 16:30

천년 음식을 만드는 스토리텔링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 현대인들은 출근길에 인터넷 뉴스 읽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서 뉴스를 주제별로 모아 놓으니 이곳에서 골라서 볼 수 있다. 오늘은 학교도 이렇게 일찍 안 갔다라는 인터넷 뉴스에 관심이 간다. 우리가 별다방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제법 근사한 상품이 나오는 날이란다. 커피 300잔을 130만 원을 내고 먹으면 받을 수 있는 여행 가방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돈을 다 지불하고 커피는 한 잔만 마시고 가방을 받아 갔다는 내용이다. 무엇이 숱한 사람들을 별다방에 매달리게 하는가? 그 비밀은 이야기다. 이곳에 가면 어느 지점을 가더라도 똑같은 맛을 유지하고 매장이 넓어서 쾌적하며 응용소프트웨어를 깔면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마케팅에서 말하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인데 스토리의 과학의 저자 킨드라 홀은 스토리가 있으면 저항이 사라지고,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도 그 음식점에 가고 싶어지고, 냄새를 맡아보지 않아도 그 향수가 사고 싶어지고, 스토리를 아는 사람들이 제품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기업에서도 생산하는 제품에 스토리를 입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지갑을 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스토리텔링은 제품뿐만 아니라 음식 분야에서도 중요시되고 있다. 스토리텔링을 잘해서 천년을 살아 내려온 요리도 있으니 다름 아닌 동파육이다. 소식은 중국 북송대의 문인이자 철학자로서 우리에게는 소동파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당시 소식은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의견을 내면서 기나 긴 시간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데 후베이성 황주(黃州)에 단련부사라는 보잘 것 없는 직책으로 좌천되어 5년간 머무르게 된다. 그의 시를 보면 황주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황주로 온 지 2년은 하루하루가 곤했다. 마정경이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불쌍히 여겨 군에 청하여 땅 몇 마지기를 얻어주어 농사를 지내면서 근근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땅이 너무 황폐해지고 가시덤불이 많은데다가 가뭄까지 들어 밭을 가는데도 기진맥진 했다고 썼다. 산이 깊으면 골이 깊다 했던가. 소동파는 황주의 생활이 힘들었지만 소식이 사는 집 동쪽에 언덕이 있었는데 동쪽 언덕에 거주하는 사람이라 하여 동녘 동자에 언덕 파라를 글자로 동파거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황주에 머물면서 돼지고기 요리를 자주해 먹던 소동파는 급기야 돼지고기를 칭송하는 저육송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제목은 돼지고기를 찬미하는 노래이지만 실제로는 동파육을 만드는 방법이다. 황주에는 맛난 돼지고기가 똥값이네 부자들은 천한 요리라고 안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요리방법을 몰라서 못 먹네, 물을 조금만 넣고 약한 불에 뭉근히 주면 저절로 익으니 매일 아침 일어나 두어 덩어리 먹으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는 것이다. 소동파는 대단한 미식가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채소, 과실, 과실 가공품, 수산물, 차, 술 등을 시의 주제로 삼았다. 그의 시를 보면 매일 매일 성대한 연회를 즐겼을 것 같다. 그는 밀주를 만들면서 밀주가라는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가 만든 술맛은 어땠을까? 북산주경이라는 술에 관한 저술을 남길 정도였으니 모두 기대를 했건만 그가 만든 밀주를 마시고 많은 사람들이 설사해서 그 다음부터는 다시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스토리텔링에는 정해진 캐릭터가 존재해야 하고 캐릭터의 나이, 직업, 외모, 그의 철학 등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본다면 소동파는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 그것이 동파육이 천년을 살아 숨 쉬는 이유다.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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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6 15:40

선(善) 자원론

윤학 변호사 선배 변호사와 함께 현장검증을 가게 되었다. 윤 변호사, 한 달에 얼마나 벌어? 내 수입을 솔직하게 말했더니 나보다 수입이 세 배나 많구먼! 놀라는 것이었다. 부장판사를 지낸 그의 수입이 초짜 변호사인 나보다 훨씬 적다니 나도 놀랐다. 경력이든 인맥이든 내놓을 것 없는 나에게 그 선배가 비결을 물었다. 판검사도 한 적 없던 내가 사무실을 열자 사람들은 브로커라도 써야 사무실 유지라도 할 거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개업한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내 사무실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법조 고위직 출신이나 브로커를 쓰는 사무실에 가보면 손님이 북적북적했지만 무슨 배짱인지 그런 변호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부인이 찾아와 남편들이 집행유예 기간 중에 더 큰 죄를 저지르고 구속되었다며 석방시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사건을 맡으면 직원 월급도 주고, 월세도 낼 수 있었다.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남편의 죄가 커서 힘들겠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고객을 놓칠 것이 뻔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한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변호사님! 이 사건 맡아주세요 의아해하는 나에게 그 부인은 말했다. 법무부 장관,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도 만났어요. 수임료만 많이 주면 석방시킬 수 있을 듯이 말했습니다. 내가 바보입니까? 나는 세운상가 일등 장사꾼입니다. 얼굴만 봐도 거짓말하는지 정직하게 말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어요. 변호사님은 믿고 맡길 수 있겠어요. 비용은 얼마 드리면 되나요? 200만 원이라고 하자 부인은 100만 원권 수표 30장을 내밀었다. 어차피 선임료로 쓰려고 가지고 다닌 돈이라며. 1987년 당시 3000만 원이면 강남에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엄청난 돈이었다. 나는 내가 말한 수임료만 받았다. 부인은 날마다 돈이 더 필요하지 않으세요? 하며 전화로 물어왔다. 전 재산 700만 원으로 전세 살고 있던 처지였지만 나는 끝내 그 돈을 받지 않았다. 다른 부인이 전직 법무부 장관을 5000만 원에 선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괜히 신바람이 났다. 열심히 변호했더니 내가 맡은 그 남편이 더 빨리 석방되었다. 그 부인이 손님을, 그 손님이 또 손님을 소개해주어 내 사무실엔 손님이 줄을 이었다. 전관예우도 현실을 왜곡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기만 하면 돈도 잘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그 후로도 체험하고 또 체험했다. 돈벌이도 어릴 적 책에서 읽은 대로 되는 것이 신기했다. 가슴속에 새긴 대로 살아가려는 순수한 마음! 나는 그것을 선(善) 자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무리 음식을 많이 먹어도 인슐린이 없으면 양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 세포는 굶어 죽고, 체내 독소로 남아 질병을 일으킨다. 음식이 좀 부족해도 인슐린이 있으면 세포가 살 수 있듯이 물적인적 자원이 부족해도 내게 선 자원만 있으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력, 지위를 쌓아도 선 자원이 없으면 남에게 해만 끼치고 결국 자신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수없이 보면서 그 확신은 더욱 커져갔다. 그런데 우리는 학력, 인맥, 경력만 높이 높이 쌓으려고 한다. 정작 삶에 가장 중요한 선 자원은 외면한 채! 남편이 착해 빠져서, 아들이 요령 없어서 돈을 못 번다고 하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마치 좀 속일 줄도 알아야만 돈도 벌 수 있을 것처럼 그 결과가 어떻던가. 다행히 선 자원은 우리 마음속에 무한히 잠자고 있다. 누구나 깨우기만 하면 무진장 캐낼 수 있다. 초라한 경력과 재산이라도 선 자원과 함께 할 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던가. 이보다 더 신나는 삶은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우리에게 대립과 투쟁을 부추기지만 선이 자원이라는 선 자원론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 모두가 훨씬 평화롭고 풍요롭게 살 거라고 그 선배에게 말했다. 인류가 자원 전쟁 없이 경쟁하지 않고도 잘살 거라며. 그러자 선배는 선을 자원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웃었다. 하지만 그가 까마득한 후배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준 것도 잠자고 있던 선배의 선 자원이 깨어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윤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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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9 16:35

대선. 더 이상 기울어진 운동장은 없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과거 민주당이 선거에 패할 때 마다 한말이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미 운동장이 기울어져서 민주당으로서는 선거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자기변명 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정당지지율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보수중도진보 이념성을 말한다. 따라서 민주당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표현은 사회가 보수화 되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는 민주당으로서는 개혁도 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진보가 소수라서 선거에 졌다는 달리 말해 패패의 탓을 국민에게 돌리는 논리였다. 그러나 보수로 기울어졌던 이념의 운동장이 박근혜 정부 탄핵을 거치면서 다시 진보 우위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부터는 보수 정당에서 반대 논리로 진보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자신들의 선거 패배를 변명하기도 했다. 그럼 왜 정치이념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하는가? 이는 이념지표, 정당지표, 지지율득표율을 나무에 비교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나무에 비유하면, 이념지표는 뿌리, 정당지표는 줄기, 지지율이나 득표율은 과일에 해당된다. 따라서 자양분을 빨아들이는 뿌리가 튼튼하게 착근이 되어 있지 않으면, 비료나 영양분을 아무리 공급해도 수확은 빈약할 수밖에 없다. 줄기도 마찬가지다. 줄기가 튼튼해야 영양공급을 원활 하고 많은 수확을 지탱할 수 있다. 따라서 여론에서 진보보수 구도에서 밀리면 정당지지율도 밀리고 후보지지율 또는 선거 득표율도 밀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울어진 운동장 논리 그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과거 우리사회는 1987년 민주화 이전에는 보수 우위였다. 그러나 87체제 이후 차츰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룬다. 90년대 한길리서치 이념 조사에 의하면 보수진보가 25%30%, 중도가 25%내외로 보수진보간 5%p 이상 격차가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비율은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항상 대선에서 보수 진보진영간 경쟁은 박빙이었다. 그래서 이 무렵 이념의 구도를 국민이 만들어준 황금율이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진보간 균형은 노무현 정부 이후 박근혜 정부까지 보수 우위가 된다. 바로 민주당이 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탄핵부터 2020년 까지는 반대로 진보우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다. 이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보수진보간 격차는 10%p 정도로 선거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올해 들어서면서 이념지표가 다시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2020년 12월 보수(21.0%)와 진보(31.1%)간 격차가 진보의 10.1%p 우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서울부산 재보궐선거와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을 거친 이후 2021년 8월 현재는 보수(27.2%)와 진보(30.4%)간 격차가 3.2%p로 오차범위내 큰 의미가 없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다시 말해 운동장 논리로 말하면 더 이상 기울어진 운동장은 없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은 40대이상이 중심이 된 이념의 전장판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그리고 그 대결도 가장 치열한 최후의 승부가 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 선거에서는 대통령을 잘할 후보가 아니라 이번 대결에서 이길 후보, 그리고 이겨서 정치적 카타르시스를 시켜줄 후보가 앞서고 있다. 그만큼 감정이 격하고 치열한 대선이다. 이번 대선 보수와 진보 누구에도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다. 즉 진보와 보수 진영이 아무리 강하게 서로 충돌하고 이념적 지지층이 다 결집해도 승부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되다보니 결국은 역대 선거에서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중도층이 선거를 결정한다. 단 이전과 다른 것은 전통적 중도층에 더해 탈이념의 2030세대까지 비슷한 표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누가 대선에서 승리할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중도층과 2030의 표심을 잡아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패하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국민을 탓할 것이 아니라 민심을 못 읽은 자신들을 탓해야 한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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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2 16:31

매너는 승리보다 더 값지다

장석주 시인 스포츠는 인간의 신체가 감당하는 중력과 무게 그리고 속도의 한계를 시험한다. 운동선수들은 강건한 신체로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제 시간과 노력을 다 바친다. 그들은 근육을 단련하고 운동 기량을 가다듬느라 숱한 낮밤을 연습으로 지새운다. 운동선수에게 기량의 양질 전환은 혹독한 연습의 반복과 그 누적에서 나온다. 승리는 피와 땀과 눈물뿐만 아니라 자기희생을 감당한 자, 즉 자기를 불사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자 그 열매다. 그런 까닭에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극의 순간은 우리를 열광으로 이끈다. 지금 도쿄에서는 2020년 하계올림픽이 한창이다. 세계를 덮친 코로나 팬데믹으로 올림픽은 한 해나 늦춰졌다. 결국 올림픽은 무관중 경기로 열렸는데, 벌써 최악의 올림픽으로 꼽힐 만큼 탈도 말고 뒷말도 많다. 하지만 폭염과 여러 난관 속에서도 각 나라 선수들의 빼어난 기량과 집중력, 담대함, 열정은 감동 그 자체다. TV중계로 올림픽 경기를 관전하며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와 휴먼드라마에 가슴이 더워질 때마다 박수를 치는 것은 무더위마저 잊게 하는 즐거움이다. 젊음의 솟구치는 기개와 단련된 육체가 뿜는 열정과 흥분에 나도 모르게 휩쓸리는 게 싫지 않다.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이바라키현 가시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질랜드와의 첫 경기에서 분패했다. 국민의 열망과 기대를 모은 우리 축구대표팀에게는 불운하고 아쉬운 경기였다. 우리나라는 1948년 이래 축구에서 뉴질랜드에 진 적이 없다. 그런 뉴질랜드에 패배한 선수들이 받은 충격과 아픔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경기가 끝난 뒤 뉴질랜드의 크리스 우드 선수가 패배로 어깨가 처진 이동경 선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이동경 선수는 악수를 거절하고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그 장면이 중계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혀 방송을 탔다. 아차, 싶었다. 이동경 선수는 나쁜 매너로 구설수에 오르며 비판을 받았다. 이겨야 할 경기에서 진 탓에 실망하고 기분이 나빴겠지만 이동경 선수는 패자의 품격을 보여주지 못했다. 남자 유도 100㎏급의 조구함 선수는 유도에서 첫 은메달을 땄다. 조구함 선수는 도쿄 일본무도관에서 열린 4강전에서 포르투갈의 조르지 폰세카 선수와 경기를 치렀다. 경기 시작 1분 만에 상대 선수는 왼손을 움켜쥐고 쩔쩔맸다. 상대선수가 쥐가 나서 뻣뻣해진 왼손을 풀려고 애쓰는 동안 조구함 선수는 공격을 멈추고 기다렸다. 경기 종료 16초를 남기고 폰세카 선수를 업어치기 기술로 이겼지만 그 승리보다 조구함 선수가 보여준 배려와 존중이 빛난 경기였다. 조구함 선수는 은메달보다 더 값진 매너로 찬사를 받았다. 경기가 끝나자 두 선수는 꼭 끌어안았다. 조구함 선수는 폰세카의 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번 올림픽에서 내가 꼽는 가장 감동을 주는 순간 중 하나다. 최선을 다해 승부를 겨룬 두 선수에게 승자와 패자라는 가름은 뜻없어 보인다. 올림픽 참가를 위해 4년 혹은 그 이상 선수들이 흘린 땀과 눈물에 메달이라는 포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올림픽은 메달 경쟁이 전부가 아니다. 올림픽은 인종종교이념을 넘어서 신체의 강건함과 갈고 닦은 기량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 제전이다. 더 나아가 스포츠를 매개로 평화와 우정을 쌓고, 인류 공동의 선을 향한 의지를 다지는 의례이자 세계인이 함께 하는 축제이다. 이런 올림픽에서 승리를 한 선수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국가의 영예를 드높인다. 승리를 거머쥐려고 최선을 다하는 운동선수들의 역동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매너가 없는 승리에의 집착은 볼품이 없을뿐더러 야비하고 추하다. 운동선수에게 승리를 뒷받침하는 기량의 연마도 중요하지만 매너를 상실한 선수의 승리와 기량의 빛은 바래진다. 매너는 배려와 존중의 시작점이다. 매너는 제 안의 사람됨이 드러나는 기초적 교양이고 예절의 토대이며 인격 그 자체다. 매너는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의 한 표준을 제시한다. 좋은 매너는 항상 참된 삶의 바탕이다. 이것이 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선수들이 더 좋은 매너를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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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5 16:37

8월 문어에게 배우는 지혜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지구상의 사람들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면서 큰소리를 치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큰소리를 치기는커녕 눈에도 보이지 않은 바이러스로 인해 겪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라는 책을 보면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전투 부상으로 죽은 사람보다 전쟁으로 발생한 세균에 희생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했다. 세균과 바이러스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밀집된 곳을 좋아하는데 우리는 산업화 도시화를 핑계로 점점 더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으니 균들은 늘 사람들 곁에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 적(?)을 파악하고 싶지만 정작 그들은 우리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미물이다. 우리의 아버지 세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열심히 사는 것은 기본이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다양한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살아야 하니 내 안에 어떤 능력을 길러야 이 시대를 살아낼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운동해서 몸 온도를 높이고 면역력을 증가시키는 일뿐인 듯하다. 사회적 관계가 줄면서 컴퓨터를 통해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을 보는 일이 점점 많아졌는데, 최근 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바다에 사는 문어를 관심있게 보게 되었다. 내가 문어를 처음 본 것은 몇 해 전 정월 전남 완도의 전복 가두리양식장이다. 그 때 양식장에 가서 전복을 가두어둔 틀을 들어 올렸는데 전복의 주 먹이는 놀랍게도 다시마였다. 비싼 전복을 먹을 필요 없이 다시마만 먹으면 되겠다 싶었는데 켜켜이 싸인 다시마 틈 사이로 문어가 전복을 먹고 있었다. 현지인 말에 따르면 완도에서는 전복보다 문어를 더 귀한 음식으로 친다는 것. 문어는 단백질이 풍부해서 겨울에 먹을 수 있는 계절 별미인데 안동지역에서는 특이하게도 문어를 제사상에 올린다. 선비의 고장 안동에서 문어를 제사상에 올리는 이유는 문어의 문자가 글월 문(文)이어서 왠지 해물 중에서도 똑똑할 것 같아서 올린다고 한다. 문어는 실제로 똑똑한 해물일까? 2020년에 나온 문어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니 문어는 지능이 좀 높아 보인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남아프리카의 바다 속을 찍다가 우연히 문어를 만나서 친구가 되고 그 모든 과정을 담은 것으로 제목은 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이다. 다큐멘터리 속 문어는 평화로운 바다에서는 유유자적하게 물살을 가른다. 여기까지만 내가 생각하던 문어였다. 그 다음부터 문어는 다양한 개인기를 보여주는데 바위 아래에 숨어 두 눈만 내놓고 바깥 세계를 살피더니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지 몸 전체를 영지버섯처럼 만들고 두 발로 바쁜 걸음을 재촉하기도 하고 위급한 상황이 생겼는지 몸을 동그랗게 만들어 바다풀 속으로 숨기도 했다. 상어가 공격해오자 상어를 피해 바위 속에 숨어있다가 다리 하나를 뜯기자 이내 반격에 나선다. 문어의 빨판에 각종 다양한 조개껍질을 고정해 자신을 조개껍데기 모양의 둥근 물체로 만들어 놓으니 상어가 문어를 한입에 넣으려 해도 넣을 방법이 없다. 상어가 문어를 포기하는 순간 문어는 상어의 등에 올라타 상어 등에 빨판을 고정해 오히려 상어를 공격한다. 문어의 눈에 게가 보이자 문어는 차렷하는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눈으로 게의 움직임만 살피더니 게가 가는 방향을 확인한 후 전속력으로 게를 향해 돌진했다. 잡히지 않으려고 전속력으로 도망가는 게와 먹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문어와 게의 한판 대결이 벌어진다. 문어가 몸을 넓게 펴서 도망가는 게를 뒤에서 바로 보쌈을 해버리니 게로서는 집게발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고 만다. 문어가 노리는 먹이는 게뿐이 아니다. 게보다 몇 배나 더 큰 바닷가재도 문어를 만나는 순간은 문어의 성찬이 되고 만다. 문어 다큐멘터리를 열 번 스무 번 다시 보기를 계속하면서 이름값 하는 대서(大暑) 더위도 떨치고 나는 내 안에 어떤 역량을 쌓아야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낼 수 있을까 생각이 깊어졌다.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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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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