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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시대와의 불화 겪는 한국정당

정당은 “민주주의의 생명선”이다. 정당 없는 대의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작년 총선은 1987년 이후 무소속 당선자가 한명도 없는 첫 총선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소속이 300석 중 283석이다. 2022년 지방선거의 광역의원 872석 중 양당이 862석을 차지한다. 정당은 권력의 성패를 결정한다. ‘윤석열 권력의 실패’는 여당의 기능부전에서부터 출발했다. “삼권분립은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라는 언급은 ‘이재명 권력의 민주당’을 상징한다. 개인화된 정당과 권력종속의 여당은 ‘정당과 정치 그리고 권력의 연쇄 실패로 이어지는 필요조건’이다.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붕괴는 ‘정당 좌절’의 전조 증상이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윤석열의 여당보다 나을지’우려하는 이유다. ‘정당의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당의 제자리 찾기’가 핵심이다. 정당 특히 집권 여당의 제 역할 회복 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정당의 연구는 다양한데 첫째, 조직 차원에서 정당의 구조와 운영방식을 분석한다. 한국의 정당은 “간부정당,카르텔 정당 그리고 선거전문가 정당”이다. 둘째, 기능적 차원으로 정당의 역할과 기능을 분석한다. “포괄정당”이 대표적이다. 셋째, 체계의 차원으로 정당 간 상호작용과 정당 체계의 특성을 분석한다. “경쟁적 정당체계,양당제와 다당제”등으로 분류하는데 한국정당은 포괄정당으로 다당제의 경쟁적 양당제다. 최근 정당연구의 방법론적 측면에서 거시적+미시적 접근의 융합이 등장한다. 정당의 역사적 맥락과 구조적 요인을 분석하는 거시적 입장과 개별 정당의 조직과 행태를 분석하는 미시적 접근의 결합이다. 연구의 적실성을 높이려는 노력이다. 전통적 정당연구의 제도와 구조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있다. 정당의 내부 문화와 조직 행태에 주목하는 ‘정당 문화론적 접근’이다. 한 정당의 문화가 그 정당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다. 예를 들면 정당 엘리트와 당원 수준의 조직 문화와 행태를 설명하고 계파와 이념적 분화 등을 설명한다. 정당 민주주의 또는 당내 민주주의도 다양성과 함께 중요한 관심 대상이다. ‘당직과 공직후보 선출과정의 민주성과 당내 의사결정구조의 성격 그리고 당내외 계파갈등의 양상’ 등이 초점이다. 정당 내부의 파벌구조와 문화적 역학 그리고 정당 지도부의 성향과 배경 등이 정당의 조직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다. 정당 내부의 비공식적 규범과 조직 관행 등이 새롭게 주목받는다. ‘스페인 포데모스와 이탈리아 5성운동’을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두 정당의 후보자 선출과정은 정당의 조직 문화와 관계있다.’고 한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 구조와 문화를 가진다. ‘이데올로기 중심의 운동체로서 교리적 순수성을 중시하는 비즈니스 문화의 공화당’과 ‘이익집단 연합체로서 수평적 연대와 내부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문화의 민주당’이다. 한국의 정당 문화연구는 아직까지 간접적이다. ‘당원 충원방식과 조직 효용성 분석’은 공개된 당원 수와 실제 유효당원 사이의 큰 차이를 발견한다. 당원 충원이 주로 선거 입후보자를 매개로 한 동원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정당의 당내 민주주의 연구에 따르면 정당 엘리트의 의사결정과정의 주도성이 관찰된다. 진보정당에서조차도 ‘권위주의적 운동문화가 정당 내부로 이전되어 당원 주도형 제도가 사문화’되었다고 한다. 성 평등 차원에서 한국정당의 조직문화 분석도 있다. 정당 사무처의 남성 중심적 조직 문화가 여성 당직자의 정치 세력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여성 당직자들이 남성 중심적인 정당 조직문화로 인해 부서배치 차별과 인맥 형성 소외 등을 경험하는 것을 확인한다. 한국정당의 조직 문화와 행태는 첬째, 중앙당 중심의 위계적·집중적 구조로 정당의 주요 의사결정은 당 지도부와 국회의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둘째,당 보다는 ‘후보자 개인’에게 충성하는 인물 중심적 문화와 당원의 수동적 참여다. 당의 신뢰와 충직함 보다는 ‘공천권’이라는 교환 관계를 매개로 한 인물 중심의 충성 문화가 지배적이다. 셋째, 한국정당은 남성 중심적 인사구조와 계파 문화로 여성·청년·소수자 당직자들의 문화적 소속감과 의사결정 참여가 제한적이다. ‘빠른 추격자’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는 대한민국 공동체는 정당이 시대변화와 그 흐름에 적응하기를 요구한다. ‘자율과 책임의 극대화와 다양성 제고’가 시대의 방향이다. 정치적 책임감과 공동체 우선의 공적 마인드는 전제조건이다. 과연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시대와의 불화를 넘어 설 수 있을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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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7 18:37

[금요칼럼] 여름과 후무사 자두와 연애

무슨 자문회의를 하러 서울에 나갔다 마치고 돌아온다. 나는 서울에 나갔다가 폭염에 화들짝 놀란다. 올여름 일사광은 비명이 나올 만큼 뜨겁다. 공중이 하얀 화염에 정령된 듯한 이 폭염은 열탕 지옥이다. 공중에서 새가 폭염에 기절해서 갑자기 추락할 수도 있겠다. 건설 현장에 나갔던 외국인 노동자와 땡볕에서 밭일을 하던 노인이 온열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졌다. 어쩌다 한반도가 열탕에 갇히게 되었을까? 내 스물 살의 여름도 더웠다. 여름이니 더운 게 당연하고 여겼다. 하지만 그 시절의 더위는 올여름 같이 사납지는 않았다. 가정교사인 나는 여름 오후 4시에 폭염에 갇힌 거리를 지나 가여중생의 집으로 간다. 아이는 수학과 영어 공부는 싫어하지만 피아노를 잘 진다. 아이는 나 들으라고 피아노 연습곡을 치는데 검은 머릿결에서 햇빛이 빛난다. 월말에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월급을 받는다. 그는 염전의 사장이고 나이가 많다. 딸은 늦둥이인 셈이다. 그는 월급을 주며 늦둥이 딸이 공부를 열심히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애매하게 대답한다. 서창에 해가 기운 뒤 버스정류장에서 퇴근하는 애인의 기다린다. 애인은 저녁 7시쯤에 도착한다. 우리는 칼국수를 먹은 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를 걷는다. 나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이라는 음반을 사러 음반가게를 간다. 또 다른 날엔 애인과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영화는 알랭 드롱이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다. 푸른 바다에서 요트를 운전하는 알랭 드롱이 너무 잘 생겨서 질투가 날 지경이다. 애인은 비가 오면 반바지를 입고 빨간 장화를 신었다. 애인은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우리는 영화를 본 뒤 칼국수를 먹고 돌아와 집으로 돌아간다. 스무 살에 시작한 우리의 연애는 스물한 살에 끝났다. 왜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더위에 늘어진 플라타너스의 잎들과 먼지가 떠다니는 버스정류장 일대의 여름 저녁 풍경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여름 저녁 7시에 더는 버스정류장에서 나가지 않게 되면서 내 여름은 시시해졌다. 나는 여름비와 붉은 배롱나무 꽃을, 제주 협재 바다를, 후무사 자두와 복숭아를 사랑한다. 여름비는 온수 같이 따뜻하다. 빨간 장화를 신은 애인은 내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그 웃음으로 내 마음과 세상의 명도는 얼마쯤은 더 높아졌을 테다. 길바닥에 도랑을 이룬 빗물을 보며, 그 웃음을 만져볼 수 없구나, 생각하니 쓸쓸해진다. 장마가 끝나면 여름의 파란하늘에는 흰구름이 뭉개뭉개 피어오른다. 나는 샐러드를 씹어 먹는 어린 사자처럼 기분이 좋아져 시립도서관을 간다. 참고열람실에 구석 자리에서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읽는다. 비 그친 여름밤에 맹꽁이들이 운다. 축축한 공기가 떠다니는 여름밤에 후무사 자두를 먹는다. 후무사 자두는 달고 시다. 그 달고 신 것을 먹고 달고 신 맛이 나는 시를 쓴다. 스무 살에 후무사 자두 세 개를 먹고 쓴 시에서는 후무사 자두향이 난다. 손에 묻은 후무사 자두향 냄새를 맡을 때 내 기분의 고도는 낮아진다. 언젠가 후무사 자두를 먹을 수 없겠지. 두꺼운 절망이 얇게 펴지면 우울로 변한다. 맹꽁이들이 맹렬하게 울어대는 여름밤에 나는 조금 우울하다. 여름은 아스팔트의 아스콘을 끈적이도록 만드는 태양의 계절, 비온 뒤 맹꽁이가 맹렬하게 울어대는 계절, 달고 신 후무사 자두를 먹고 달고 신 맛이 나는 시를 쓰던 계절, 흰구름 아래서 사자가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 계절, 스무 살의 청년들이 도서관 복도에서 서성이는 계절이다. 수많은 여름들이 지나갔다. 숱한 이들이 내게로 왔다가 떠나갔다. 나는 그 여름들의 과거이자 미래다. 나는 폭염을 견디면서도 여전히 여름을 사랑하지만 이제 여름이 마냥 즐겁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여름의 기대, 여름의 소슬한 꿈은 물거품처럼 꺼졌다. 그렇건만 새로운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첫 연애의 기억과 함께 죽었던 연애세포가 오롯하게 살아난다. 여름에 만나서 여름에 헤어진 애인은 어디선가 이 폭염을 견디며 잘 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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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0 18:52

[금요칼럼] 잘 지나 간 시인의 하루

아침 일찍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30분 걷고 집에 와서 아침을 먹을 까 하다가 어제 읽었던 단편 소설을 다시 한번 읽기로 했다. 어제 읽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책 줄거리가 드문드문해서 다시 읽었다.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창밖에서 새가 울었다. 처음 울음을 시작할 때는 낮은음으로 시작해서 점점 높은 음으로 울어가다가 아주 높은 음에서는 일정한 음으로 울다 그치고 울다 쉬며 반복해서 울었다. 높은음으로 길게 울 때는 슬프기도 했다. 책을 읽다가 책 내용 속으로 새소리가 찾아들면 내용을 놓치곤 했다. 줄거리가 잘 이어지지 않을 때는 줄거리가 끊긴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 줄거리를 이었다. 도대체 어떤 새가 저리 예쁜 소리를 낼까, 궁금해서 책을 들고 창가로 가서 여기저기 뒷산 밤나무 숲속을 찾았지만, 새우는 소리는 또렷한데, 새는 찾지 못했다. 책을 다 읽고 아침밥을 대신해서 먹는 누룽지를 끓이고, 쌀을 씻어 밥하고, 집 뒤 안 살구를 두 개를 따 씻어 먹었는데, 익지 않아 떨떠름한 맛이 입안 가득 찼다. 냄비에 누룽지가 자글자글 물 닳아지는 소리를 냈다. 얼른 달려가 식혀서 먹었다. 그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새는 그치지 않고 울었다. 부엌문을 살며시 열고 서서 뒷산 커다란 느티나무에서 새를 찾아보았다. 그때 새 울음소리가 문득 그쳤다. 문 여는 소리 때문인가, 가만히 서 있었다. 새가 울지 않았다. 저 새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설거지하는데, 이번에는 까마귀 움을 소리 물까치 울음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다른 쪽 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까마귀기가 전깃줄에 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 주위를 맴돌며 물까치와 꾀꼬리들이 까마귀를 공격하고 있었다. 물까지와 꾀꼬리의 집중 공격과 까마귀의 필사적인 방어를 겸한 공격은 격렬했다. 까마귀 한 마리에 꾀꼬리가 세 마리, 물까치 대여섯 마리였다. 싸움은 길고, 공방전은 치열했다. 새들이 공격하는 동안에도 까마귀는 전깃줄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새들의 공격이 더 치열해지자 견디지 못한 까마귀가 진지인 전깃줄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새들은 함성을 지르며 까마귀를 쫓았다. 푸른 하늘에 새들의 공중전은 볼만했다. 까마귀는 회문산 멀리 사라지고 꾀꼬리와 물까치는 마을로 귀환해서 흩어졌다. 싸움이 끝났다. 한숨 돌린 나는 댐의 방류로 불어난 큰 강물을 뒷짐 지고 서서 구경하였다. 큰물일수록 소리를 감추고 묵묵하게 흐른다. 오후에는 새로 나온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 소설집을 읽었다. 두어 편은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글이지만 다시 읽었다. 본 영화를 다시 볼 때처럼 기억나지 않은 새로운 장면들 때문에 글은 새로 읽혔다. 김애란의 소설집을 다 읽고 ‘문지’의 ‘소설보다 봄’ 속의 성해나의 단편 ‘스무드’를 읽었다. 선이 굵직굵직하고 이야기가 힘차게 뻗어 나갔다. 글발이 흐르는 강물처럼 출렁이고 꿈틀거린다. 밥 먹기 전에 읽은 단편은 김지연의 ‘무덤을 보살 피다’ 였다. 무더위가 일찍 시작되었다. 벌써 뙤약볕이다. 올 날씨가 심상치 않다. 이렇게 더울 때는 주로 소설을 읽는다. 책을 읽을수록 읽을 책이 자꾸 새로 나타난다. 그것이 좋다. 아직도 책을 읽을 힘과 글을 쓸 힘이 내게 비축된 긴장을 느낀다. 대통령은 부지런히 여기저기 다니며 나랏일을 하고, 자주 웃고, 아무 밥집이나 들어가 편하게 밥 잘 드시고, 국회에서 선배님을 만나 악수하며 어깨도 툭 친다. 별로 웃기지는 않지만, 뼈 없는 농담도 해서 대통령 본인도 속 편하게 웃고 착한 우리 국민 맘 편하게 해서 좋은 거 같다. 남 탓 별로 안 하고, 나라 일하면서 큰소리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하지 않고도 공무를 보는 이들을 은근히 긴장시킨다. 취임한 지 한 달 되었는데, 오래된 대통령처럼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익숙해지고 있는 것도 같다. 크게 속상한 일들도 큰 소리 나지 않게 순리대로 잘 풀리길 바란다.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흐르면 일이 저절로 해결되게 하는 정치의 기술도 있다. 나는 오늘 우리나라 시인으로 우리 마을과 함께 하루해가 잘 넘어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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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3 19:25

[금요칼럼] 종소리가 외치는 삶의 우선순위

지난달, 모교에서 고위정책 과정의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KTX와 광역버스, 시내버스 등 대중교통으로 여유 있게 움직이다 보니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강의 장소에 도착했다. 여유 시간에 옛 추억이 어려있는 모교의 복도를 천천히 걷다 보니 장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학생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복도 한쪽에는 옛 스승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 걸려 있었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70년대 초,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국토계획과 환경정책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학자들이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남성, 여성의 평균수명은 각각 80.6세, 86.4세이다. 인생 2라운드를 사는 필자도 새삼 ‘세월이 참 빠르구나’ 생각을 하면서 ‘무엇이 진짜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 곰곰이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천문시계 ‘사도들의 행진’을 본 적이 있다. 매시 정각이면 성 비투스 대성당 앞에 있는 시계탑에서 인형들이 나오는데 관광객들은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 그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4개의 조각상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조각상이 종을 울리는 줄을 당기면, 그 옆에 있는 ‘탐욕’, ‘허영’, ‘쾌락’을 상징하는 세 조각상이 나와서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장면이다. 죽음을 경고하는 종소리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욕심에 집착하는 모습이 필자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도 시계탑에 있는 네 개의 조각상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건강,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행동 등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뒤로 미루고 당장 눈앞에 있는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종소리는 ‘너의 삶의 우선순위를 정리해라.’라는 충고의 말처럼 필자의 가슴을 두드렸다. 일단, 내게 주어진 귀한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적절히 관리하며 의미 있게 사용하는 지혜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을 건강한 생각으로 시작하고 작은 일이라도 시간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집중하고 난 후 휴식하며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이지만 ‘오늘 하루를 잘 보냈어!’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들고 싶다. 또, 내 주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 지금까지는 나 중심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아내, 가족, 친구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배려해야 할 시간이 왔다. ‘내가 좋으면 그들도 좋은 것’이라는 일방적 행동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라도 알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마지막으로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정리하는 일이다. 읽지 않는 책, 입지 않는 옷, 무의미한 교제 등 욕망으로 끌어안고 있던 짐들을 하나하나 덜어내야겠다. 정작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 쓰겠지 하고 쟁여놓았던 물건,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했던 관계, 나의 경직된 프레임으로 만들어 놓은 고민들. 훌훌 버려야 진정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남은 하루는 의미 없게 낭비하는 1년보다 훨씬 귀하다.’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가 필자에게 해준 말이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 있다. 삶의 끝이 언제일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매일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 싶다. 오랜만에 방문한 모교에서의 기억은 필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마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한자리에서 마주한 듯한 시간이었고, 그 속에서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프라하 천문시계 조각상처럼 내게 들리는 종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일상을 돌이켜보며 정돈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매일의 일상을 보내면서 유한한 인생임을 자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정돈하는 그 시간. 즉, ‘삶의 우선순위’를 정돈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되고자 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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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6 18:33

[금요칼럼] 이재명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

내년 6월 3일 지방선거 결과는 어떨까? 오늘 시점에서 보면 ‘민주당 승리 예측’이다. ‘대통령 후광효과’로 선거가 취임일에 가까울수록 여당에 유리하다. 2018년 지방선거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년 즈음으로 당시 그의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선거 전날 ‘북미정상회담’은 민주당 압승의 확인이다. 2022년 지방선거는 대통령 취임 22일 만으로 ‘허니문 효과’다. 윤석열 대통령 재임 중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가 이 때다. 2018년과 2022년 지선 모두 ‘대선의 연장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지방선거 결과는 ‘양대 정당독점과 반복되는 특정정당의 쏠림’이다. 2022년 지방선거의 광역의원 872석 대부분을 국민의힘(540석/62%)과 민주당(322석/37%)이 독점한다. 양당의 독점은 자신의 텃밭 지배로부터 출발한다. 국민의힘은 영남권에서 민주당은 호남에서 광역의회 의석의 90%이상을 차지한다. 대구는 32석 중 31석 광주는 23석 중 22석이다. 양당은 교대로 ‘특정 정당 쏠림의 정치적 행운’을 누린다. 2018년 광역단체장 기준 ‘민주당(14) vs. 자유한국당(2)’은 2022년 ‘국민의힘(12) vs. 민주당(5)’로 바뀐다. 기초단체장도 2018년 ‘151 vs. 53’은 2022년 ‘63 vs. 145’로 역전된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서울시 의회 110석 중 102석을 얻는다.지역구 선거는 ‘97 vs. 3’으로 비례 포함 6석의 당시 자유한국당은 교섭단체도 구성못했다.경기도 의회도 민주당은 142석 중 135석으로 압도한다.자유한국당 4석 정의당 2석 바른미래당 1석이었다. 2022년 지방선거는 정확하게 반대다. 국민의힘은 서울시 의회 112석 중 76석을 차지하며 12년 만에 과반의석을 확보한다.경기도 의회도 민주당 압도에서 양당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서 각각 1석씩 더 얻으며 여야 동수 의회가 된다. 강원도 의회도 특정 정당 쏠림 현상이 엇갈린다.2014년 당시 새누리당(37/44석) 2018년은 사상 처음으로 민주당(35/46석) 그리고 2022년에는 다시 국민의힘(43/49석)이 압도적 의석을 갖는다. ‘소선거구+단순다수 선거제도의 승자독식 구조’의 당연한 결과로 결국 ‘양대 정당으로의 수렴’이다. 정당별 득표율과 의석수의 괴리도 심각하다. 2018년 지방선거 서울시 의회선거에서 당시 민주당은 51%의 득표율로 93% 의석을 독점한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25%를 득표하지만 의석은 5%에 불과하다. 당시 바른미래당(12%)과 정의당(10%)은 각각 1석씩 얻는데 그친다. 민주당 지지표와 바른미래당 지지표 1표의 가치가 23배 이상 차이다. ‘소선거구+단순다수제’의 대량 사표발생을 완화하자는 비례대표도 역할을 못한다. 전체의 10%에 불과하다.OECD 34개국 중 1등만 당선되는 제도를 채택하는 나라는 7개국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를 시행한다. 결과는 정치적 양극화와 거대 양당 중심의 지방정치의 대립구조 고착화다. 소수 의견은 배제되며 정치적 대표성도 악화된다. 지방의회의 견제와 균형 기능 상실도 당연하다. 텃밭의 양당 독점과 엇갈리는 특정 정당으로의 쏠림현상은 지방선거의 무투표 당선 급증으로 이어진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자는 508명으로 2002년 이후 최다다. 군소정당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지방자치와 지방정치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질 저하가 우려되는 이유다. 대안은 첫째,지역정당이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지역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다. 특히 ‘중앙당을 수도에 두도록 규정’한 것은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지방 없는 지방자치’다. 지방자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지역정당이 활발하다. 우리도 “직접행동영등포당은 문래동의 공공공지 문제,은평민들레당은 불광천 생태하천 복원,과천시민정치당은 지식정보타운 중학교 신설 문제” 같은 구체적인 지역 현안에 집중하게 하자! 지역정당은 ‘공천이 당선이고 공천권을 가진 중앙 정치인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는 지역’과 ‘중앙정치의 대리전’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이다. 의제 정당의 활성화는 정치적 소수자의 대표성 강화와 정책혁신을 통한 주민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한다. 둘째, 광역의회 중대선거구제다. 지역정당과 지방의회의 정치적 다원성은 지방의회의 견제 기능을 강화시킨다.협치의 필요성을 높이고 정책경쟁을 유인한다. 셋째, 광역단체장 결선투표제다. 원내 8개 정당 의원 11명이 공동발의에 참여한 천하람 법안이 대표적이다. 중대선거구제와 결선투표제는 지방정치의 다양화와 다당제 정치의 실험장이 될 것이다. ‘지방 있는 지방자치’가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통령 결선투표 도입을 통한 민주적 정당성 강화와 사회적 갈등 최소화’를 약속한다. 민주당과 이 대통령의 정치적 진정성을 확인하는 계기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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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9 19:16

[금요칼럼] 6월의 장미꽃은 흐드러지고

우리 시름을 덜어주던 모란과 작약꽃이 지고 나니, 이웃집 담에 걸린 6월의 장미꽃이 보기 좋게 흐드러졌다. 붉은 장미꽃은 눈에 시리도록 탐스럽고 아름답다. 이 계절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죽고 사는 일은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불가피하게 겪는 숙명이니 이걸로 누군가와 드잡이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5월에 손아래 누이가 세상을 떴다. 한 배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태어난 오남매 중 손아래 누이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조카의 연락을 받고 요양병원에 있던 누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누이는 편안해보였는데, 놀란 것은 누이가 외할머니와 판박이처럼 닮아서다. 병상에 누운 외할머니가 일어나 잘 왔다고 내 등이라도 두드릴 것만 같았다. 누이는 이태 전 암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힘들게 투병을 하다가 내게 유서라고 할 만한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오빠, 나 먼저 가. 오빠는 천천히 있다가 와. 누이는 그렇게 적었다. 죽음을 앞두고 볼펜을 쥘 힘조차 없었을 텐데 온몸을 쥐어짜 몇 자를 적었을 테다. 그 쪽지를 조카에게 건네받아 읽을 때는 눈물을 꾹 참았는데, 육개장 국물을 플라스틱 수저로 뜨다가 눈물 몇 방울이 후두두 벌건 국물로 떨어졌다. 나는 살아 있음으로 육개장 국물이 짠지 싱거운 지도 모른 채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누이의 장례 뒤 새벽에 오줌을 누러 일어났다가 고요한 거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아내와 고양이 두 마리가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시각에 나는 잠이 오지 않았음으로 거실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새벽이 오기 전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누이가 떠나고 그 부재의 현전을 실감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시각이었다. 산 자는 어떻게든 살지만 죽은 자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누이의 장례식장에서 먹은 육개장 국물의 맛을 떠올리려 했으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서럽고 애달프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마는 육친을 떠나보내는 것은 더 큰 상실감을 갖게 한다. 부모님 중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안성에 와 있던 어머니가 그 뒤를 이어 떠났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 가슴이 메말라 슬픔 한 조각도 없었던가? 퉁곡하 듯 울음을 토해낸 것은 장례 끝나고 보름쯤 지났을 때다. 이승에서 맺은 인연이 다했구나, 하는 자각이 스친 찰나 내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나는 한밤중 시골집 부엌에서 혼자 앉아서 통곡을 쏟아냈다. 우리는 죽음을 직접 겪지는 않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란 생리적인 운동과 활동을 멈추고 무존재로 돌아가는 일이다. 살아서는 겪을 수 없는 일, 누구나 단 한 번만 겪을 수 있는 실존적 사건, 살아 있음에 반대되는 것, 그 확실성이 죽음이다. 삶은 몸을 갖고 온갖 슬픔과 근심을 끌어안고 느끼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는 게 삶이다. 동양 철학자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큰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은 내가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는가(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도덕경경 13장) 오후 산책을 마친 뒤 붉은 줄장미 피어 있는 집을 지나쳐 돌아온다. 목덜미에 닿은 햇볕이 따갑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잠겨 있던 롤랑 바르트는 나날의 소회를 일기에 적었다. 그 일기를 묶은 책이 ‘애도일기’다. 스쳐 읽은 것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 왔던 것은 가고 간 것은 돌아온다. 누이가 떠나고 내 안에도 순수한 슬픔이 고인 고랑이 생겼다. 누이여, 그대 있는 곳에도 6월의 붉은 장미가 활짝 피고, 장미꽃 향기를 품은 바람도 부는가? 그대 돌아간 간 곳에서 모든 근심을 다 내려놓고 평안을 누리시게. 필경 나고 죽는 것은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는 마시게.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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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2 18:36

[금요칼럼] 대통령

이따금, 문득, 때로 내가 살고 있는지, 살아 있는지, 이게 사는 것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지금 이게 꿈속은 아닌지, 내가 나의 삶을 의심하며 내게 묻기도 하고,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내게 묻기도 한다. 내 하루하루가 초라하고 괴롭고 슬퍼지지는 않는지, 그럭저럭 그래도, 잘못 디딘 곳이 많고 볼품없고 허술한 곳이 많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런 거지 그저 이런 거지 이러면 되지 스스로 위안도 하며, 일어나 세수도 하고 이빨도 닦고, 물도 마시고 어질러 놓은 책도 챙기고, 거실도 정리하고, 밖에 나가 앞 산도 한번 보고, 뒷산도 돌아다 보고, 물도 보고, 숨도 몰아쉬며, 아침이구나, 또 하루를 시작하였다. 참새가 벌써 새끼를 기르나, 마당 가 감나무 잎 사이에 푸른 벌레를 물고 나를 경계한다. 까치가 앉아 있는 느티나무도 본다. 어? 오늘 아침에는 꾀꼬리가 날아와 나무 꼭대기에서 바람으로 가만 가만 노랗게 그네를 타는구나, 집 밖으로 걸어 나가 마늘 밭 가를 어슬렁거리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본다. 찔레 꽃은 벌써 지고 없구나. 나는 지금, 쓸쓸한가? 한가한가? 나의 시에 대한 나의 고민과 외로움과 괴로움은 정당한가. 세상에 대한 나의 말과 글은, 그 행색이 초라하지는 않은지, 내 걸음걸이는 가난하지 않고 내 얼굴 표현은 정당하고, 내 말은 저문 나무같이 아름다운가? 내가 이렇게 살자고 제법 그럴듯한 말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간섭하고 불편하게 하고, 힘든 데다 더 힘든 말을 보태지는 않은지, 불안과 적개심은 조성하지는 않는지, 마을을 돌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 앞에 샘과 뒷산 감나무를 보고 새소리들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의 시가 바람처럼, 기억나지 않은 어느 날 날씨처럼 새소리처럼 햇살처럼 없었던 것처럼 자국 없이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 생이 풀잎이나 나뭇잎을 가만히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한 점 같이 서서히 사라지면 그만이겠다.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고 앞산의 진초록은 해마다 지치지 않고 저리 진저리를 치며 푸르러질 것이다. 숨 막히던 진초록이 지나갔다, 여기까지 산은 얼마나 요동쳤는가. 그러면서 초록은 동색이 되어 성하(盛夏)의 입구에 의연하게 섰다. 올해 새로 길어 난 마당 가 감나무 가지를 뼘으로 재어보니, 30센티미터는 더 자랐다. 감꽃이 피었구나. 꽃진 다음으로 감이 커갈 것이다. 놀랍다. ‘자연은 건너뛰지 않는다’ 나는 평생을 어머님과 아버님이 사시던 집에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사시고 내가 태어나 자라 사는 집이 아니었으면 이런저런 일 속에서 사는 내 마음이 더 편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할 때도 더러 있다. 살아 온 많은 것들을 잊고 잃어버리고 사니까. 나의 삶은 고향을 멀리 두고 이따금 그리워하며 사는 일상이 아니다. 회한이 더 짙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내 삶을 내 주머니에 우겨서 넣고, 만지작거리며 날이면 날마다 강가로 걸어 나간다. 바람이 부는구나. 몇천 만개의 나뭇잎을 흔들고 몇천 만개도 넘는 바람이 앞산에 불어오는구나. 오늘은 강 건너 숲에서 새들이 많이도 우짖는다. 새들아 오늘 만은 우리를 위해 울어다오. 강가에 서 있다가 삶이 이래도 된다고, 어쩌겠냐고, 가보자고, 오늘도 강을 건너가 보자며, 그러자며 강을 건너간다. 그냥, 사는 게 이렇게 호젓하게, 삶은, 삶이 이렇게 구석구석 살아지는구나. 그래, 이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강을 건너면 산이다. 산을 올려다본다. 그 위에 구름이다. 구름은 흐른다. 때로 나를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후회하고 나를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며 세상에 나의 잘못을 인정하며, 때로는 못난 나를 스스로 위로하다, 다시 걷는다. 걷는 것이 나는 좋다. 지금을 버리고 다음을 딛고 그다음 새 땅을 디디면 또 새 땅이 온다. 나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대통령이 있는 듯 없는 듯 잘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아니라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멋진 사람’ 말이다. 나는 이 나라 백성이다. 때로는 나도 나라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룬 적은 있었지만, 대통령을 생각하며 ‘그런’ 적은 없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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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4 16:12

[금요칼럼] AI+X 시대의 새로운 도전

얼마 전 영국의 세계적 대학평가기관인 타임스고등교육(Times Higher Education, THE)가 주최한 아시아대학 총장 컨퍼런스에서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우송대의 국제화 전략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더불어 그 자리를 통해 아시아 유수의 대학 총장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고등교육의 미래를 논의할 수 있었다. 총장들은 공통적으로 대학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국제적인 대학평가의 중요성과 AI를 고등교육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발표된 아시아 10대 대학의 순위는 필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주요 대학이 당연히 순위에 포함될 것이라 기대하며 자리를 지켰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발표된 10개 대학 중 무려 7개 대학이 중국 대학이었고, 특히 중국의 저장대학교(Zhejiang University)의 성장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저장대학교의 성공 배경에는 AI를 기반으로 한 융합교육 ‘AI+X’에 있었다. 교양대학에서 인문학적인 소양 교육을 받듯이 학생들의 AI 기초 소양 교육을 의무화하였고, 이를 각 전공 분야와 융합하여 고등교육 전반에 녹여냈다. 이러한 AI 기반 교육 혁신을 바탕으로 학업이 연구, 창업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저장대학이 중국의 혁신대학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특별한 교육과정을 통해 세계적인 AI 기업 딥시크(Deepseek)의 창업자인 량원펑을 배출하게 되었고, 딥시크 AI는 저비용 고효율 모델 개발을 통해 기술 접근성이 향상되고 중국-서구 간의 AI 기술 격차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오늘날 세계는 ‘AI+X’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혁신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AI+제조업’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교육과 연구 현장에서는 ‘AI와 전공을 결합한 융합형 인재 양성’이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AI를 도구로 보는 것을 넘어 AI와 데이터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기술인 데이터 사이언스(Data Science)를 결합하여 ‘AI·DS’를 핵심역량으로 교육체계를 바꾸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학들도 ‘특성화 분야의 전공과 AI 역량을 갖춘 융합인재 양성’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이러한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취업시장에서도 과거 ‘인성’을 강조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AI 역량을 기본소양으로 갖추고 전공 및 협업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호하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AI+X’형 학습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인생 2라운드를 준비하는 세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퇴직 평균 연령이 49.4세인 현실에서 AI는 새로운 도전의 문을 여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을 없앴고 대학에서 4년간 배운 전공으로 평생을 버틸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나이와 관계없이 새로운 공부를 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기술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고 경험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시대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배워가려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음을 실감한다. AI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여 대학도 청년들만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위한 평생학습의 장, 특히 AI와 연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누구나 언제든 다시 배우고 도전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대학의 중요한 역할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AI와 함께하는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AI가 이끌어가는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기회를 앗아갈 수도 있고 다른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실력과 경험을 AI와 연결시켜 ‘AI+X’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방향성 있는 ‘새로운 도전’만이 그 기회의 문을 열 열쇠가 될 것이다. 대학은 이미 문턱을 낮추고 넓혀 놓았으니 보다 많은 이들이 기회의 열쇠를 쥐게 되기를 희망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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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9 18:14

[금요칼럼] ‘이재명의 민주당’은 ‘윤석열의 여당’보다 나을까!

‘윤석열의 권력은 실패’다. 통합의 구심점은커녕 권력은 양극화된 진영대결의 한 축으로 전락한다. 대한민국 공동체 미래의 준비와 선도도 물론 불가능했다. 권력의 실패는 ‘정치의 실패’다. 견제와 균형의 붕괴는 입법부의 기능상실과 권력 집중으로 이어진다. 문제해결 능력과 타협 부재의 정치는 정치 리스크를 높이고 결국 국민 신뢰를 잃는다. ‘민폐가 된 정치 리더십’으로의 퇴행이다. ‘권력과 정치의 실패’는 제도적 결함의 결과로 ‘정당의 실패’에서 기인한다. 정당 실패는 정당역할의 상실로 ‘제왕적 대통령과 야당대표 권력’으로의 종속과 당내 민주주의 훼손 나아가 입법부 역할의 포기로 이어진다. 대의 민주주의의 기능 부전이자 위기 심화다. ‘윤석열 권력 종속의 국민의힘’은 대통령 취임 전부터 나타난다. 2022년 4월 ‘검수완박’법안은 대통령 당선인의 반대로 여야 합의 4일 만에 무효화된다. “국민의 뜻”이라는 게 합의 파기에 대한 여당 측의 공식 설명이다. 의원총회에서 추인까지 받았던 여야 협의안의 번복은 입법부의 자율성보다 대통령의 권력이 우선임을 상징한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대통령의 “특정 세력의 유도 가능성”과 “민주당의 여론조작” 그리고 “북한 지령에 따른 행동”등의 발언들은 여당 의원들에 의해 반복 된다. 대통령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권력 복종’의 전형적인 여당 사람들이다. ‘이준석 대표 축출’과 ‘김기현 대표 당선과 강제(?) 사퇴’ 그리고 ‘한동훈 비대위원장 선임’도 대통령의 뜻으로 해석된다. 집권 여당대표의 진퇴를 사실상 대통령 한 사람이 결정한 셈이다. 여당 국민의힘의 정당으로서의 자율성과 당내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다. 김상욱 의원이 “국민의힘은 정당으로서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라며 “야당이 된다 해도 야당으로서 견제기능조차 수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이유다. 집권 여당 민주당의 가능성이 높은 지금 ‘이재명 권력의 민주당’은 “삼권분립이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를 구현하려 한다.2022년 대선 슬로선 ‘이재명은 합니다.’의 구체적인 실천이 진행 중이다. ‘이재명 재판 중지법’은 ‘피고인이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때에는 법원은 당선된 날부터 임기 종료 시까지 공판절차를 정지하여야 한다.’고 명시한다. “묻지마 이재명 당선법”은 공직선거법의 허위사실공표죄 구성 요건 가운데 '행위'를 삭제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들의 뜻대로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재명 후보의 해당 혐의는 자동 면소된다. 헌법 제84조의 ‘불소추 특권’을 둘러싼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허위사실공표죄의 ‘행위’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2021년 합헌결정을 내린 상황이라 위헌소지가 있을 수 있다. “사법권 침해” 우려와 정치적 압박 비판은 무시 된다.민주당은 “사법 쿠데타”나 “사법살인”으로 본다. ‘재판 4심제’로 불리는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 확대안과 대법원장 청문회와 탄핵론으로 이어진다. 지난 3년에 걸쳐 완성된 ‘이재명의 민주당’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압도적 당 대표 재선과 “비명횡사”의 2024년 총선공천으로 마무리되었다. 윤석열의 여당과 이재명의 민주당 모두 (대통령이든 야당대표든 제왕적인) 개인권력 중심의 정당이다. 한국 정치에서 정당은 견제와 균형의 원칙보다는 권력의 맹종을 우선 한다. 집권당은 언제나 “청와대(용산) 출장소”였다. 귀결은 입법부로서의 독립적 역할과 견제 기능의 상실이다. 당내 민주주의의 붕괴도 마찬가지다.‘정당-정치-권력의 연쇄 실패’는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이다. ‘이재명 개헌안’은 ‘대통령 권력의 분산과 국회 권한과 기능의 강화’로 요약되는데 입법부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전제 될 때 성공 한다. 대통령과 입법 권력의 민주적 견제와 협력의 동적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제도적 협치 시스템은 권력의 건강한 긴장관계에서 시작한다. 정당의 실패는 다양성과 역동성의 당내 민주주의의 파괴로 결말은 정당의 사회적 대표성 약화와 결여다. 유권자 10명 중 6명 이상은 “정당이 자신의 의견을 대변하지 못한다.”며 “현재의 정당체제로 민주주의 유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당의 제자리 찾기(성공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당내 민주주의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통한 권력 견제의 제도화가 요구된다. “권력은 조심히 사용해야 하고 민주당 안에서 견제와 균형을 찾아야 한다.”며 “권력폭주가 있을 때 ‘이러면 안 됩니다.’라고 직언한다.”는 김상욱 의원의 다짐이 민주당에서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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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2 18:33

[금요칼럼] 다들 잘 알지만 쉬쉬 하는 작가들의 사정

나는 집필노동자다. 보통은 시인이나 작가라고 불리지만 서른 두 해 동안 나를 버팅기도록 도와준 건 집필노동이다. 집필노동자의 수입원은 두 가지다. 매체에 기고하면 나오는 원고료와 출판사와 저작권계약을 맺고 낸 책에서 발생하는 인세 수입이다. 우리나라에 문학(시인, 소설가, 수필가) 종사자를 알려주는 국가통계 따위는 없다. 어림짐작으로 30만명쯤 되리라 생각한다. 이들 중에 저작 활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작가는 넉넉하게 잡아도 300명을 넘지 않을 테다. 오직 0.001 퍼센트에 드는 사람만이 글을 써서 먹고 산다. 오직 집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작가는 천운 덕분이다. 작가들은 생계를 꾸리려고 교사, 대학교수, 언론출판계, 의사, 건축가 같은 일을 하고 그 나머지는 비정규 노동자 처지와 다를 게 없는 학원강사, 판매직, 자영업, 공사장 잡부, 대리기사, 시간강사, 자서전 대필 같은 허드렛일을 한다. 글쓰기 외의 직종에서 일하는 작가들은 직장에서 퇴근하고, 혹은 주말에 몰아서 글을 쓴다. 드물게는 이종격투기나 장례지도사나 연예인 같은 직종의 일을 하면서 쓰는 이들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될 테다. 얼마 전 한 후배가 대리기사를 한 경험을 장편소설로 써서 책을 냈다. 신문사 두 곳 신춘문예 공모에서 시와 소설이 잇달아 당선되며 유망한 신인작가로 주목을 받은 작가다. 그가 유력 출판사들에서 출판 제의를 받은 게 16년 전 일이다. 그 뒤로 시집과 소설책 몇 권을 냈으나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가 받은 인세는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했을 테다. 그는 무명작가로 살지만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저러다가 굶어죽지 않을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업계의 사정을 흘리자면 원고료는 40년 전과 똑같고, 작가들이 몇 해에 걸쳐 쓴 작품이 출판사와 저작권 계약을 맺더라도(그건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책이 중쇄를 찍는 경우는 훨씬 더 드물다. 나는 종종 성인 열 명 중 여섯이 일 년 내내 책 한 권 읽지 않는 척박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나온 건 기적 그 이상의 일이다. 그보다 작가들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아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게 더 기적일지도 모른다. 여섯 해 전 한 시인이 굶어 죽은 일이 일어났다. 죽은 뒤 보름이 지나서야 비참한 상태로 발견되어 지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게 외부로 알려진 건 그가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육체쇼와 전집’ 같은 시집으로 주목을 받고 유명 문학상을 수상한 덕분이다. 이런 업계의 참담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신문사나 계간지의 신인작가 공모에는 수 백, 수 천의 작품들이 몰린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선하는 건 단 한 사람이다. 그들이 머잖아 처하는 사정은 앞서 밝힌 것과 어금버금하다. 이 업계가 처한 현실을 잘 알지만 다들 쉬쉬 하며 말을 꺼내지 않는다. 나라 경제 규모는 40년 전보다 훨씬 더 커졌지만 작가들은 최저 생계수준에서 허덕인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기금을 주고,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문학 우수도서를 뽑아 간접 지원을 하고는 있지만 그건 언 발에 오줌누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출판 편집자 15년 경력을 뒤로 하고 불가피하게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 서른 두 해나 우직한 회사원처럼 글 쓰는 데 매달렸다. 나는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흥청망청 한 기억도 없다. 한때는 방송 패널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했지만 들인 시간과 노고에 견줘 수입은 보잘 것이 없었다. 집필노동으로 생계를 꾸린 일에 한 줌의 자부심이 없지 않은데, 물론 이건 재능이나 성실함 때문이 아니라 행운 덕분이라는 걸 잘 안다. 어쨌든 빈사상태에 빠진 이 업계를 살리려면 정부가 지금처럼 뒷짐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한시도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작가의 생계나 복지 실태를 살펴보고, 40년 째 그대로인 원고료를 올리며, 작가에게 노후 연금을 지급하는 지원책 등을 내놓아야 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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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5 18:08

[금요칼럼] 나무와 어린이와 대통령

나는 우리나라가 나무를 ‘제일로’ 사랑하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오래된 나무들은 더 오래 살도록 보호해 주고 어린 나무들은 나라의 곳곳에서 자기가 사는 땅을 기름지게 할지니, 잘 자라도록 돌보고, 길을 내거나 집을 지을 때, 나무 한 그루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오래 토론하고 그 나무를 보고 사는 사람들의 의견들을 모아 나무의 운명을 결정하면 좋겠다. 오래된 나무들이 공사판에서 함부로 뽑히고 찢기고 잘린 체 하얀 속살을 보이며 나자빠져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고 부아가 치밀 때가 많다. 내가 다니는 강변길에서 자란 기세가 좋거나 장래가 엿보이는 나무들을 나는 가꾼다. 칡넝쿨같이 강한 넝쿨들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걷어주고, 웃자란 가지들을 다듬어 준다. 인간에 대한 모독이 인간만을 상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얽힌 사연들을 함부로 내팽개치는 인간들의 무심하고 무지한 행위가 어떤 범죄 행위보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런저런 공사로 마을 강변에 오래 버티고 있던 나무와 바위들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나무도, 오래된 돌들도 호적을 만들면 어떨까. 마을의 나무나 강변의 큰 바위들을 관리하는 나라의 ‘관리 부서’가 있어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 때문에 하나의 커다란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그 나무를 돌아가고 멀리 구부러진 길을 갖고 있는 나라는 아름다움을 지키는 나라다. 길이 조금 구부러지고 공사에 돈이 조금 더 든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나무 한 그루 때문에 길이 구부러져 있는 것을 본 어떤 어린이가 “아빠, 저 나무 때문에 이 길을 이렇게 멀리 돌아가는 거야?”하고 물을 때 아빠는 무슨 말을 할까,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질문과 대답이 그려진다. 우리나라가 어린이들을 ‘제일’로 생각하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나는 어렸을 때 마을 어른들에게 네 가지 말을 들으며 살았다.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공부만 잘하면, 뭐하냐, 사람이 되어야지’ 아이들이 싸우면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냅둬라, 애들은 싸워야 큰다”. 싸우면서 아이들은 자잘못을 스스로 알고 뉘우치고 깨달아 자기를 고치고 바꾸어 마을 사람들과 생각을 맞추며 살아가도록 했다. ‘남의 일 같지 않다.’고 가르쳤다. 마을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들이 다 내 일 이었다.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마을에 한 아이가 태어나면 온 마을이 다 그 어린이의 선생이었다. 도둑질하면 안 되고, 거짓말하면 안 되고 막말하면 안 된다고 나는 마을에서 배웠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라를 어떻게 가꾸겠다는 말은 안 하고, 입을 열었다, 하면, 험한 막말로 남이나 헐뜯고, 초등학교 앞에서 엄청 난 숫자의 어른들이 모여 고함을 지르며 막말하며 다툰다. 어린이들이 듣고 보고 배운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 다니고, 나라의 일을 관리하는 공무(?)원이 되면, ‘좋은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은 ‘나랏일’과 ‘나랏돈’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나무도 돌도 어린이도 힘이 없다. 어른들의 생각대로 배워 세상으로 나간다. 나무와 어린이들이 저 5월의 푸르른 산처럼 바람을 타고, 강물처럼 출렁이며 흐르도록 해야 한다. 연두색에서 초록의 건너가는 앞산에 꾀꼬리가 날아와 운다. 저 산 아래에서 우리 사람이 해야 할 말을, 할 짓을 생각해 보자. 멋진 어른은 없는가. 아름다운 말을 하는 어른들은 없는가. 대통령이 되면, 의원이 되면, 도지사 군수 시장이 되면 뭐 하나?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좋은 대통령, 좋은 공무원이 되어야 하지.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있는가.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높은 곳(?)을 차지한 사람들의 파렴치함 이 나라의 기강과 인간의 근본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다. 대통령은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나라의 선생님이다.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은 다 대통령 탓이다. 저 산의 나무들과 저 하늘의 별들과 강가의 돌과 저 학교의 어린이들과 우리 국민에게 인간 교육을 담당할 ‘선생님’이 될 자신 없으면 지금 당장 그만두라.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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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8 14:43

[금요칼럼] 따뜻한 5월에 기억되는 일들

'가정의 달'인 5월이 될 때면 머릿속에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 부모님의 은혜와 희생을 생각하며 어버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 제자의 성공을 보면서 기뻐하는 스승의 마음을 회고해보면 봄날씨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제주 태생의 반항아 애순이와 팔불출 무쇠같은 관식이의 삶에서 우리 부모님 세대 삶의 모습과 자식을 위한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 등의 모습이 비춰지며 매회 드라마를 볼 때마다 마치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눈시울 붉어지며 콧등이 시큰거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부모님의 모습과 함께했던 일화가 떠오른다. 중학교 시절, 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한 점심 도시락을 잊고 등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내 이름을 외치며 도시락을 들고 뛰어오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아들이 굶을까 싶어 체면 가리지 않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선연히 남아있는 것은 당시 어머니의 애정을 모르고 부끄러운 마음에 짜증만 냈기 때문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종종 그때 그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걸 보면 못난 나의 행동에 대한 자책이자 반성이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와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필자의 아버지는 당시의 다른 아버지들처럼 희로애락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분이셨고 고생스러운 삶을 그저 담담하게 살던 분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이 떠오른다. 고사장에서 시험을 보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12월 한겨울 날씨에 교문 앞에서 기도하며 종일 서 계셨다. 시험이 끝나고 나가니 아버지는 '고생했다. 밥 먹으러 가자.'라며 중국집으로 필자를 데리고 가셨고 별말 없이 짜장면을 나누어 먹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그 당시가 뇌리에 남아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사는 여동생과 통화를 하며 처음 듣게 된 이야기인데 필자가 박사학위 시험에 통과했다는 국제전화를 받으시곤 너무 기쁘신 나머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고 한다. 감정표현을 잘 안 하시던 아버지에게 그런 모습이 있었다니! 또, 그렇게 기뻐하셨다니! 돌아가신 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필자를 포함한 네 자녀를 공부시키고 독립할 수 있도록 고생과 희생을 했지만 조용하고 덤덤하고 꾸준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불평 없이 불만 없이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것을 내어주셨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지도해주셨던 헨켈교수님도 부모님과 같은 분이다. 재직 중이던 대학을 휴직하고 유학을 떠났기에 정해진 기간 내에 학위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던 사정을 고려하여 필자보다도 훨씬 더 신경을 쓰셨다.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한 필자의 노력을 존중하면서도 '박사논문은 그 분야에 학문을 시작하는 단계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좀 더 하고 싶은 내용은 박사 후에 심층적으로 연구를 펼쳐나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책임지듯이 헨켈교수님은 한-독 국제 공동연구를 제안해서 연구과제 제안서를 손수 준비하고 본인의 뛰어난 연구실적을 바탕으로 본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몇 번이고 정부에 설명하였다. 막 박사학위를 취득한 초년병인 필자는 교수님 도움으로 수준 높은 국제연구의 공동기여자가 될 수 있었다. 2년간 열심히 했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시던 기억이 난다. 무심하게 살아왔지만 돌아보면 온통 감사할 일로 가득하고 특별히 내 인생에 불을 밝혀 앞길을 편히 갈 수 있도록 말 없는 다정으로 나를 응원해주신 분들이 있다. 언제나 묵묵히 곁을 지켜주신 부모님,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등대가 되어주신 스승님. 5월의 푸르고 따뜻한 계절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또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부모님, 스승님을 떠올릴때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가 생각난다. 울창해진 나무가 숲을 보호하며 자연을 살리다가 나중에 장작이 되어 태워지는 것처럼 자녀, 제자를 위한 희생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셨음을 새삼 느낀다. 올해 가정의 달에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과 스승에 대해 회고하면서 감사를 기억하고 그분들에게 말로 다 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을 모아서 자녀와 제자들에게 내리사랑의 마음으로 전해주고 싶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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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1 18:22

국민의힘 당원과 지지층의 선택은 무엇일까?

6·3 대선을 향한 양당 경선이 한창이다.민주당은 “어대명을 넘어 구대명”으로 당내경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90% 득표 중으로 사실상 요식절차만 남았다. 그는 본선을 겨냥하며 ‘전략적 침묵 중’이다. 논쟁이나 논란 대신 ‘포용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초점이다.예전의 ‘사이다 맛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오더라도 ‘규제 완화 대신 규제 합리화’나 ‘의대 증원 대신 의대정원 합리화’ 라고 말한다. 갤럽기준으로 최근 이재명 후보 지지율은 연이어 최고치를 경신하며 30% 박스권을 탈출하는 모습이다. 전국지표조사(NBS)의 가상 3자 대결에서 그는 국민의힘 3강 후보 중 누구와 붙어도 45%를 득표한다. 이준석 후보와 국민의힘 후보 지지율을 산술적으로 모두 합해도 25%에서 31%에 불과하다. 가상 3자 대결에서 이재명 지지율이 50%선에 근접한다는 예측조사도 나왔다. 12월 계엄이후부터 최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67개를 종합한 지지율 예측조사로 이에 따른 그의 지지율은 49.8%다. 이재명 대권의 걸림돌은 대부분 사라지는 모습이다. 내부적으로는 호남 경선의 투표율과 득표율이 관심일 정도다. 본선 차원에서 보면 “이례적”이라는 대법원장의 직접 전원합의체 회부와 당일 바로 합의기일을 정한 것인데 대선 전에 대법원 결론이냐가 핵심이다. 지금 현재로는 ‘정확한 시점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이제 남은 변수는 ‘제3지대 반명(反明) 빅 텐트’다. 미래 지향형 단일 후보로 ‘1:1 양자대결’이어야 그나마 해볼 만한 선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출발점일 수 있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성공조건은 까다롭다. ‘이재명은 안 된다.’가 출발점이지만 유권자 58%가 “반대만 하는 연대는 지지하지 않겠다.”는 것이 부담이다. “빅 텐트”의 성공을 위한 ‘비명+반명 세력의 정치개혁의 연결고리’가 필요하고 단일 후보의 리더십과 다양한 참여세력 간의 정치적 신뢰도 전제되어야 한다. '빅 텐트'는 일단 한덕수 참여여부부터가 결정적이라고 한다. “90% 확률로 출마할 것”이라는 전망과 “한덕수가 나오는 순간 검증이 시작될 거고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엇갈린다. 그의 참여는 디딤돌이자 걸림돌이라는 뜻이다. “범보수 대선후보 적합도 1위”이자 “54명 의원으로부터 출마요청”을 받지만 동시에 “탄핵받은 정권의 총리가 대통령에 나오겠냐!”라는 우려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몸값”이 될 이준석의 참여는 “빅 텐트”의 완성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은 1라운드를 마치고 4강전을 향한다.4강은 ‘찬탄과 반탄 반반’으로 평가된다. ‘나경원 탈락 이변’으로 “경선 외면했던 유권자들이 돌아보게 됐다.”는 말도 나온다. 1라운드는 ‘일반국민 여론조사 100%’로 지지자와 무당층만을 포함하는 역선택 방지조항에 따라 사실상 당심이 결정적일 것으로 봤다. 그래서 ‘나경원 탈락’은 의외다. “이념이 곧 밥”이고 “체제 전쟁의 선거”라며 반탄 집회의 주요연사였던 그녀의 ‘드럼통 무리수’ 결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안철수 4강’은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으로 해석된다. 사람들이 이제는 ‘탄핵 찬반 여부는 안 따진다.’며 중도 확장성과 ‘그를 이길 수 있는 후보’가 누구냐는 본선 경쟁력의 기준으로 투표한다는 말이다. 안철수 후보는 “탄핵된 전직 대통령의 탈당은 책임정치의 최소한”이라며 “윤석열 탈당”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의 4강 진출은 국민의힘 경선이 ‘찬탄 vs. 반탄 구도’를 넘어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윤석열 전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예상과 기대보다 빠른 ‘윤석열 아웃’의 모양새다. ‘윤 어게인 신당창당론’은 그에게 비판적인 중도층 여론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는 “이기고 돌아왔다.”며 “이번 선거에서 우리 당이 승리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확증적 망상”으로 “병원 가야”한다는 반발과 “당에 부담만 될 뿐”이라며 “중도층과 합리적 보수를 떠나게 할 수 있다.”는 비판을 듣는다. 관심은 2강 압축이다. “1~3위 후보들은 사실상 의미 없는 수준의 차이”로 “반탄 vs. 찬탄 득표율은 6:4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당원투표 50%로 더 보수적일 가능성”이라는 전망과 ‘탄핵의 강을 건너는 전략적 판단’일 것이라는 예상이 엇갈린다. 대선은 근본적으로 ‘국민의힘 책임선거’다. 그들의 ‘야당 할 준비’가 원칙적이다. 이번 경선은 단기적으로는 대선 이후 진영과 당의 성찰과 책임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미래를 향한 준비의 개혁 리더십을 결정하는 출발점이다. 국민의힘 당원과 지지층의 선택을 주목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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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4 18:39

[금요칼럼] 무심과 평안

봄이 늦은 파주 교하에도 마침내 벚꽃이 피고 작약 움은 돋는다. 버드나무 가지마다 연두색이 짙어가는 화창한 봄날에도 나는 마냥 즐겁지는 않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맥이 풀리고 울적하다. 어쩐지 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무한한 공간의 왕”(연극 ‘햄릿’의 대사)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파트는 높아졌지만 시야는 좁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 배움의 이력이 늘어 쓸데없는 지식은 많아졌지만 정작 어떻게 살지를 모를 때 마음은 갈팡질팡 한다. 쩨쩨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소란스럽다. 그러면 ‘나는 비정하지만 조용합니다/무심하지만 평온합니다/나는 잘나지 못했지만 혼자 잘났습니다’.(김경미 ‘약속이라면’) 같은 시를 읽으며 마음의 소란을 다독이는 것이다. 살아가는 날마다 중대한 결심이 필요치는 않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의 완만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평정심을 갖는 게 더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멍청해지기로 하고, 어제보다 오늘 더 빈둥거려도 좋겠다. 항상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세상을 끌고 내달리니까. 세상은 더 풍족해지는 듯하고 데이터의 양은 나날이 쌓인다. 그 양적 팽창이 만드는 지식은 삽시간에 전지구로 퍼진다. 과학, 산업, 기술은 혁신을 좇는 가운데 세상이 퇴보할 거라는 생각은 설 자리가 없다. 그 대신에 기술과 산업의 발달로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질 거라는 기대는 부푼다. 더 많은 이윤을 내는 게 최선이라고 선전하는 세상에서 최선이 아닌 것은 최악 취급을 당한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덜 영악하고 잇속을 덜 밝히고 어슬렁어슬렁 거닐며 바보로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합법칙적인 물질세계에 산다고 말한 이는 유명한 과학자다. 그는 인간 본성을 탐구한 연구자이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다. 바로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낸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이란 책에서 ‘별들의 탄생에서 사회제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중략) 물리적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인간은 이전 세기보다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게 된 사실조차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과거보다 분자, 원자, 생태계, 세포, 유전자, 염기서열, 별, 우주를 훨씬 더 많이 알게 되고, 과거와 견줘 생활의 편리는 늘고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며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과연 인류는 얼마만큼 더 똑똑해지고, 우리 삶은 어디까지 향상될 것인가. 한편으로 플라스틱 폐기물이 바다를 떠돌고, 엄청난 양의 핵폐기물은 지구에 쌓인다. 과학만능주의가 퍼뜨린 미래에 대한 낙관은 더 난망해지고, 과학이 기후재난 같은 인류의 숙제를 해결할 거란 기대는 어그러진다. 삶을 기계적으로 계측하고 항상 예측가능한 것으로 바꾸려는 이성의 기획에서 제 몫을 찾는 과학자와는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게 시인들이다. 과학자들이 물질을 계량하고 수치화해서 합목적적 논리 속에서 모든 것을 법칙과 원리들로 환원시킨다면 시인들은 자연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영감과 상상으로 존재의 숨은 숭고성과 신비를 콕 집어낸다. 오직 시인만이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라고 쓸 수 있을 테다. 봄날의 하루가 아무 일이 없어도 저무는 동안 나는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펼쳐들고 겨우 한 줄의 시를 읽었다. 먼저 핀 목련꽃들이 하르르 떨어지는 봄날 오후는 고요로 들끓고 마음은 심심했다. 무심과 평안 속에서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오늘 하루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다. 잘 가라, 오늘이여. 봄밤에는 모든 이들에게 더 다정해지기로 한다. 까칠했던 마음도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는 착한 생각을 하면서 누그러지는 것이다. 그 찰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데 그 미소는 오늘도 무사히 지났다고, 내일도 그렇게 지날 거라는 안도와 기대의 표현일 테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만개한 벚꽃을 더 볼 수 있는 날이 이어질 수 있도록 좋은 날씨이기를, 바보 이반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어리석은 누군가도 오늘보다 더 자주 웃으며 착해지기를 바란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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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7 13:19

[금요칼럼] 새봄이 왔어요

아침에 늦잠을 잤다. 이불 속에서 평소보다 오래 누워 있었다. 내가 이렇게 아침 이불 속에 누워 늑장을 부린 적이 없었는데, 일어나야겠다. 일곱 시가 다 되었다. 거실로 나가 누워서 하는 스트레칭(내가 스스로 개발한 열 서너 가지)을 하였다. 몸 컨디션이 괜찮다. 스트레칭을 하고 창을 가린 블라인드를 올렸다. 햇살이 밝고 맑다. 물을 마시고 서재로 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옆에 샘물이 맑다. 며칠 전 봄비가 왔었다. 비가 오면 샘물이 맑아진다. 샘에는 샘 물길을 내주는 가재가 살고 찬물에서만 서식하는 옴 개구리(이 개구리가 옴 개구리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가 산다. 비가 오면 바위 틈에서 나와 노는 가제와 개구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때가 아닌 모양이다. 샘을 둘러싸고 있는 돌들과 샘 위에 바위에는 이끼가 푸르다. 이끼를 자세히 보았는데, 이끼 꽃이 벌써 맺혀 있다. 우리 집 샘 가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그 바위에는 사시사철 이끼가 산다. 이끼는 겨울철에도 물기만 있으면 눈 속에서도 푸르다. 바위 바로 위에 아주 작은 조팝나무 한 그루를 가꾸고 있는데, 그 조팝나무 작은 실 가지를 뚫고 돋아나 있던 잎 눈이 푸른 잎 눈을 틔웠다. 금방 잎이 피고 그곳에서 바로 작은 꽃대들이 오복 하게 솟아 금방 금방 흰 꽃이 하나둘 셋 넷, 일일이 툭툭 터질 때, 아니 튀밥처럼 툭툭 튈 때, 나는 봄에 감격하고 감동한다. 이 조팝나무 온몸에 지는 햇살이라고 떨어지면, 오! 이런, 세상에 이런 일이, 이렇게 새롭고, 이렇게 신비롭고, 이렇게 생생한 감동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마당을 내려 섰다. 작년 잔디는 노랗게 아주 눕고, 그 사이 사이에 작은 못 끝같이 생긴 푸른 새싹이 돋는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 새로 단장해 놓은 화단에는 며칠 전부터 수선화가 피어났다. 수선화는 노란색이다. 앵초 꽃이 피고 있다. 할미꽃, 돌 단풍 꽃은 진즉 피었다. 오늘 아침에는 드디어 봄맞이 꽃이 피어난다. 이 희고 작은 꽃잎이 다섯 장인, 이 똑똑한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시려서, 내 눈이 실눈이 된다. 무릎을 꿇어야 잘 보이는 흰 냉이 꽃도 곳곳에 피어났다. 물 까치들이 아침을 먹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날아다닌다. 뒤 안에 작은 살구나무 꽃이 핀다. 빈집 샘 가 앵두 꽃이 피어난다. 집 뒷산에 심어 놓은 작은 벚나무 꽃이 피어나고, 마을 뒷산 4백 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와 마을 앞 2백 년에 되었다는 느티나무와 50년이 넘은 느티나무들은 연두색 불꽃이 터진다. 느티나무 세 그루는 해마다 마을의 새 역사를 쓰고 내게 새 시를 쓰게 하고, 새 정부를 세운다. 봄 비로 몸 단장을 한 까치는 흰 날개를 펼치고 난다. 딱새는 아직 짝을 찾지 못했는지, 전깃줄에 앉아 애타는 연정의 노래를 작곡하여 노래 부른다. 지금 쯤 우리 마을을 향해 꾀꼬리와 파랑새와 호반 새는 날아오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시를 써야지, 새와 바람과 논과 밭과 작은 벌레들과 오래된 농부들의 농사와 떠다니는 아침 구름과 저문 노을에 대해서, 달을 따라다니는 길을 따라 걸으며 시를 쓸 것이다. 나는 이유 없이 도도해지고 싶다. 명랑해지고 싶다. 그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아첨하지 않고, 앞 산 푸른 소나무에 기죽지 않은 아름다운 시를 쓰겠다. 그날 그때, 문형배 헌법 재판관이‘대통령 윤석열 탄핵 판결 문’을 읽어가다가 ‘민주 공화국의 주권 자인 대한 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하였습니다.’는 판결문에서 ‘대한 국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울컥 먹먹했던 것은 나만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판결문은 이 땅에 사는 우리 개개인의 삶과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국가 공동 운명 체에 답하는 역사적 기록 문이었고 훼손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 내야 한다는 명문이었다. 꽃피고 새우는 우리나라 우리 봄이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우리 집 작은 한옥 처마 밑 기와 틈에 참새 한 쌍이 짝을 짓고 새로 집을 짓느라 바쁘다. 나는 기쁘고, 나는 이 봄이 좋다. 저 참새 부부가 집 짓는 공사장으로 새참이라도 챙겨가서 이런저런 우리나라 봄을 이야기하며 같이 먹고 싶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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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0 18:53

봄볕처럼 따뜻한 사랑, 서서평(徐舒平)

늦은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개나리와 목련은 한껏 꽃을 피웠고 옷이 조금씩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이제는 완연한 봄이다. 그러나 최악의 피해가 예상되는 영남의 산불, 정치적 불안감, 얼어붙은 취업시장, 물가 상승과 경제적 침체,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자국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미, 중, 러 리더들의 행보 등으로 마음은 겨울보다 더 무겁다. 이런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우울해지고 현실에 비관적으로 되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잠시 멈춰 서서 깊이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면 좋겠다. 난관을 이겨내고 멋진 삶의 궤적을 이룬 사람의 봄볕 같은 희망이 우리에게 서서히 스며들기를 바라며 독일 출신 미국 간호사 서서평(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을 소개한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이타적인 삶’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녀는 3살에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 어머니 대신 할머니 품에서 자랐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기대를 품고 방문한 생모에게 다시 거부당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불행함에 함몰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약대로 삼아 단단함과 아량을 갖춘 사람이 되었다.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동료에게 조선에서 환자가 치료받지 못하고 길에 버려진다는 말을 듣고 1912년 운명처럼 조선으로 와서 선교사의 삶을 시작한다. 광주에서 가난하고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도왔는데 주로 버려진 과부와 고아들에게 남다른 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사회에서 외면당한 윤락여성들의 아픔을 공감했으며 과부들을 보살피고 14명의 고아를 수양딸로 삼아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하면서 고국에서 지원받은 얼마 안 되는 생활비와 후원금까지 함께 나누어 썼다. 키가 매우 컸던 서서평이 5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난 원인이 영양실조였다는 사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길거리에서 추위에 시달리는 거지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담요의 절반을 나누어 준 일화는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그녀의 성정을 보여준다. 봄볕이 만물을 따뜻하게 품듯 어려운 모든 이를, 어떤 상황에서도 기댈 수 있는 어머니 리더십으로 많은 이들에게, 특히 조선의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조선에 와서 여성들에게 자립의 삶, 간호사로 일하며 나와 남을 도울 수 있는 삶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35살이 되던 해에는 병원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화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앉은뱅이 환자를 업어서 구출했던 일도 있었다. 광주에서 미국에 기금을 요청해 양잠업을 지도하고 제주에서는 고사리 채취를 도우며 여성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자 애썼다. 여성들이 스스로의 힘을 믿고 자립하고 또 그 힘을 주변에 나눌 수 있는 역량을 키우도록 힘썼다. 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2년 동안 일제강점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광주 궁핍한 지역, 제주, 추자도 등지에서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들을 돌봤다.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그녀의 운구 뒤로 소복을 입은 수백 명의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던 모습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서서평은 검소했지만, 먼 이국 조선의 어려운 이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내어준 ‘이타적인 낭비’를 하며 살았다. 자신의 시신은 의학용으로 기증할 정도로 삶은 물론 육체까지 조선에 모든것을 주고 떠났다. 어머니에게 거부당하고 기댈 곳 없이 외로웠던 그녀는 바람, 햇살, 숲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그것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물설고 낯선 이국의 사람들에게 온통 베풀고 떠났으며 그녀를 아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절이 수상해서…, 경제가 불안정해서…, 희망이 없는 시대야….’라는 불평은 서서평의 삶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가진 것 없어 보였던 그녀가 희망이 없어 보였던 조선 땅에서 펼친 것은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수많은 사람에게 기적이 되었다. 어려운 시절이다. 올봄에는 그녀가 남긴 봄볕 같은 따뜻한 사랑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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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3 18:17

윤석열 대통령만 남았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이재명 2심 무죄’로 ‘사법 슈퍼 위크’의 4가지 시나리오 중 두 개가 사라졌다.‘이 대표 피선거권 박탈+윤석열 대통령 복귀’와 ‘피선거권 박탈+파면’은 없다.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 항소심에서 서울고법은 무죄를 선고했다. 1심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피선거권 박탈형’이 뒤집힌 것이다. 이 대표와 관련하여 이제 남은 변수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 시점과 윤석열 탄핵심판의 헌재 선고일이다.예상과 기대(?)보다 늦어지는 헌재 선고는 빠르면 4월 2일 4일 또는 11일이란다. 그 다음은 4월 18일이다. 이 대표는 현재 총 5개 사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조기 대선이면 대선 전에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사건은 이번 선거법 사건이 유일하다. 대법원 상고심 판결 시한은 6월 26일이지만 빠르면 5월 초도 가능하다는 건 이론적 전망이다. 설령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유죄 취지로 파기하더라도 고등법원에서 다시 재판을 거쳐 대법원이 최종 확정해야 한다.조기 대선 전에 결론이 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2심 선고도 1심 선고 후 4개월 11일만이었다. 사법 리스크를 털어낸 이 대표와 민주당은 ‘후보 추대론’과 함께 헌재 앞으로 향한다. 그들은 ‘윤석열의 신속 탄핵’을 촉구하며 광화문 철야농성의 강공에 집중한다. ‘이재명 2심 무죄’ 이후 시나리오 #1은 ‘이재명 무죄 + 윤석열 파면’이다.이 대표는 유력주자로 조기 대선의 독주체제를 강화하고 민주당은 입법부에 이어 행정부 권력까지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선의 첫 쟁점은 ‘이재명이냐? 아니냐?’다. 윤 대통령 파면 결정에 대한 여론의 반향과 평가가 결정적이다. 윤 대통령의 내란관련 사법처리가 가속화되면서 특히 여권 강성 지지층의 탄핵불복 여부가 주목된다. 46%의 보수 유권자가 “탄핵이 인용되면 시위에 참여하겠다.”고 한다니 정치적 양극화는 악화되고 국민적 불안감은 높아진다. 국민의힘은 적절한 대선후보를 빨리 찾아야 하는 부담을 갖는다. 탄핵 불복의 강성 지지층 이탈을 막으면서 동시에 중도보수의 소구력을 갖춰야 하는 상반된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여당의 대선 후보선출 룰이 중요한 이유로 ‘범보수 원샷(또는 투샷) 경선’론이 나오는데 여당 지도부의 정치력이 결정한다. 이때 핵심은 윤석열 전(前) 대통령이다. 여당 대선 후보경선은 ‘반탄의 윤 계열 vs. 찬탄의 개혁파’ 경쟁으로 출발한다. 헌재와 민주당 기득권에 저항하다 부당하게 탄핵 당한 ‘피해자 윤석열 서사’의 영향력이 중요하다. 탄핵 심판 직후 윤 대통령의 첫 메시지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이재명 2심 무죄’ 이후 시나리오 #2은 ‘이재명 무죄 + 윤석열 복귀’다.‘ 윤석열 vs 이재명의 연장전이자 최후의 대회전’이다. 여소야대는 이어지며 ‘강 vs 강’ 대치는 이전보다 더 악화된다. “윤 기각 땐 나라 망한다.” vs “이 대통령 되면 진짜 망국”의 대결은 ‘광장 정치’의 “민주주의 후퇴” vs. “법치주의 수호”로 연장된다. “49 vs 51 ‘피 흘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우려가 퍼진다. ‘국민적 불안감이 가장 큰 최악의 상황’은 이미 진행 중이다. “국민 73%는 계엄과 탄핵 의견 다르면 같이 밥 먹기도 꺼리는 상황”이고 “의견이 다른 사람이 증거를 제시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이 79%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석회화된 진영 갈등’의 상징이다. 양 진영 지지층의 상호 불신도는 89%로 2020년 대비 34%p 증가한 수치다. 특히 20대 남성의 68%가 이재명,60대 이상 여성의 72%가 윤석열을 지지하는 세대·성별 격차는 극단화되었다. 결과는 정치적 소외의 확산이다.2030 세대의 68%가 “탄핵 심판 결과와 무관하게 정치 체제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고 한다. 이미 “양당 구도에 회의감을 느낀다.”는 젊은 세대의 투표와 정치참여 하락은 불가피하다. 역시 윤 대통령이 결정적이다. 직무에 복귀한 대통령은 내란 혐의의 사법 리스크와 함께 한다.정치적 혼란은 경제와 안보 상황의 어려움을 더 가중시킨다. 상처받은 윤 대통령의 권위와 신뢰를 계엄 전으로 회복하기는 불가능하다. 계엄과 탄핵의 혼란과 위기에 대한 책임이 윤 대통령의 인식과 행동 변화의 출발점이다. 복귀 직후 대통령의 첫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다. 어떤 시나리오든 한국정치는 상당 기간 동안 불확실성의 도전 앞에 선다. 경험한 적 없는 ‘소용돌이의 정치’다.대통령 파면이든 복귀든 대한민국 운명의 갈림길은 윤 대통령에서부터 시작한다. 대통령만 남았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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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7 16:37

들어라, 봄의 속삭임들

3월 다 가는데 날은 여전히 스산하다. 영등할매가 오는 봄에 심술 내듯 한파를 몰아온 탓이다. 영등할매 늦추위에 장독이 깨지고 중늙은이는 얼어서 죽는다고 했다. 영등할매는 음력 이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땅에 머물며 비와 바람을 쥐락펴락 다스리는 가신(家神)이다. 이월 초하루를 영등날이라고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 고향 선배인 박용래 시인도 영등할매에 관한 시를 남겼다. ‘김칫독 터진다는 말씀/2월이 떠올리라/묵은 미나리깡 푸르름 돋아/어딘서가 종다리 우질듯 하더니만/영등할매 늦추위/옹배기물 포개 얼리니/번지르르 춘신 올동말동’.(박용래 ‘영등할매’) 며칠 전엔 절기를 잊은 폭설로 내가 사는 파주는 온통 흰눈으로 뒤덮인 설국으로 변했다. 저 멀리 보이는 심학산 봉우리도 눈 쌓여 희끗희끗 했다. 작년 이맘때 출판단지 안 매화나무 검은 가지마다 밥풀떼기처럼 자잘한 흰꽃이 피었었다. 올해는 한파 영향인지 매화꽃 필 기미가 안 보였다. 올 꽃소식은 유난히 늦은 셈이다. 옛 어른들은 아침이 오기 직전 새벽이 가장 어둡고, 봄 오기 전 추위가 매섭다고 했으니, 옛 어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맘땐 묵은 김치에 질린 탓에 봄동 같이 상큼한 푸성귀 햇것이 먹고 싶어진다. 요즘 먹을 반찬이 마땅치 않다고 툴툴대던 아내가 오늘 아침엔 달래를 넣어 끓인 된장찌개, 갓김치, 구운 고등어를 상에 올렸다. 공기밥 한 그릇을 거뜬하게 비우고 나와서 교하도서관 열람실에 앉아서 반나절을 읽고 싶던 책을 찾아 읽었다.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와 쾌청한 하늘 아래 오솔길을 걸었다. 찬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중앙공원 분수대의 물은 얼어있는데, 얇은 얼음장 아래에선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오솔길을 걸으며 자꾸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 뜨고, 초록 제비 묻혀 오는 하늬바람 우에 혼령 있는 하눌이여.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는 싯구를 혼자 중얼거렸다. 미당 서정주의 ‘봄’이란 시다. 아무 병도 없으면,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니! 시인이란 무탈하게 지나는 봄날의 심심함도 그냥은 견디기 힘든 족속인 모양이다. 저녁밥 먹고 일찍 잠든 날엔 꼭 새벽에 한번쯤 깨어나곤 한다. 식구들 다 잠든 방에서 혼자 깨어나 앉아 있으면 적적하다. 고요한 한밤중 누군가 육체라는 조그만 막사(幕舍) 안에 갇힌 채 ‘도와 달라!’고 외친다. 그는 몸부림친다.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나는 깜짝 놀라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외침에 집중한다. 물론 내가 들은 외침은 환청에 지나지 않는다. 내 안에서 몸부림치고 웃으며 부르짖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내 안의 또 다른 나, 숨어 있는 가 아닐까? 곧 매화 꽃망울 터지고 제비꽃 싹 트고 울 아래 작약은 움이 돋을 테다. 봄날은 그렇게 만개한다. 젊은이들의 심장 속에선 춘정이 돌아 새로운 사랑도 시작되리라. 그건 다 생명의 약동에 따른 일들이다. 큰 야망을 품고 살라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 지금은 봄이 아닌가? 살아있다는 건 꿈틀대는 것, 갈망으로 타오르는 피의 명령에 무언가를 하는 것, 죽을 만큼 힘을 다해 무언가를 이루는 것! 이렇게 밥이나 축내고 군고구마 몇 개나 입속에 우겨넣으며 군살이나 찌우고 멍청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다못해 방바닥에서 머리카락 몇 올이라도 정성들여 줍고, 양지 바른 데서 겨우내 긴 손톱 발톱이라도 깎자. 지아비는 지어미에게 제주 귤 하나라도 까서 건네자. 눈꼽챙이문 밖 하늘에 떠가는 구름 몇 조각이라도 바라보자. 월동 마치고 북녘 고향으로 떠나는 쇠기러기의 무사귀환이라도 빌어주자. 불타 올라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몰두하라. 삶도 죽음도 두려워마라. 이건 삶의 숭고함에서 나온 명령이다! 살아서 비명이라도 지르라. 살아 있다고 큰소리로 외쳐라. 오늘이 마치 생의 마지막 날인 듯 살아보자.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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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0 18:50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 오세요

이른 새벽 홀로 일어나 시를 읽다가 잠이 오지 않아 산책 나왔다고 말하며, 내 고민 좀 들어 주며 조금만 같이 걸어주지 않겠냐는 대통령을 만나보고 싶다. 텔레비전에 나와 이번에 이런 책을 읽었다고 좋아하는 총리와 장관들과 국회의원을 보고 싶다. 중고등학교에 강연을 가서 나는 이번 휴가 때 이런 영화를 보았다고 뽐내는 재벌 총수를 보고 싶다. 때로는 우리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한 장의 그림을 보았노라고, 어느 전시 때 본 그림을 찍은 핸드폰 사진을 보여주는 정당 대표들을 지하철에서 만나보고 싶다. 거리를 걸으며 아이들과 만나 키를 낮추고 공부에 지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고 손에 들고 있는 책에 대해 말해 주는 교육감을, 그리고 이 책 갖고 싶으면 주겠다고 말하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나에게 이 책 읽어보았냐고 읽던 책을 내밀어 보이는 선생님, 공무원을 만나보고 싶다. 아파트 공원 의자에 앉아 신간을 읽는 젊은 어머니 곁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는 아이를 보고 싶고, 승용차 안에 읽다 만 이마누엘 칸트의 책이 있는 단체장을 만나보고 싶다. 도시의 변두리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돋보기를 코에 걸고 앉아 독서 중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곁에 누워 책을 읽다가 코 골며 잠든 기초의원들을 보고 싶고, 어느 소도시 작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젊은 연인의 잔잔한 사랑을 보고 싶다. 남의 시집을 사 들고 걸어가는 시인을 어느 거리에서 만나, 요새 읽었던 시집 이야기를 하는 시인들을 만나고 싶고, 지난번 시집 잘 사 보았다며, 나는 이 시가 좋다고 젊은 시인의 시구절을 읽어주는 노시인의 보고 싶다. 남의 소설책을 사는 소설가들을 책방에서 우연히 만나보고 싶다. 파도치고 갈매기 날아다니는 해수욕장에서, 깊은 계곡 물소리, 바람 부는 들 길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서, 나비가 앉은 풀꽃, 느닷없는 들길의 소낙비, 봄비 속에 개구리 울음소리, 이른 아침의 새소리, 푸른 산 위로 솟는 뭉게구름,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흐르는 강물 곁에서, 그런 것들과는 무심하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곁에 가만히 앉아 눈송이로 녹고 싶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어디를 멀리 갈 때는 올라브 하우게의 시집 ‘어린나무 눈을 털어 주다’라는 작고 가벼운 시집을 들고 간다. 올라브 하우게는 노르웨이 시인이다. 몇 년 전 노르웨이로 강연을 갔었다. 서점이 있는 문화 공간에서 강연 후 작가와의 대담 자리가 있었다. 대담하는 도중 나는 시집 한 권 때문에 올라브 하우게가 살았던 노르웨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번역된 이 시인의 시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우게라는 시인의 시집이 한국에서 독자들이 좋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사람들이 놀랬다. 하우게는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과수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평생을 살았다. 나는 작은 이 시 집의 시중에서 이 시가 좋다.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 대양이 아니라 물을 원해요/천국이 아니라 빛을 원해요/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세요/새가 호수에서 물방울을 가져오듯/바람이 소금 한 톨을 가져오듯’ 올라브 하우게의 ㅡ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ㅡ 전문‘ 나는 그의 시집 뒤에 실린 글도 좋아한다. ’하우게는 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작은 스푼으로 마치 간호사가 약을 주듯 먹여준다. 그는 옛날 방식으로 죽었다. 어떤 병증도 없었다. 단지 열흘 동안 먹지 않았다. 슬픔과 감사로 가득했던 장례식은 어린 하우게가 세례받은 계곡 아래 성당에서 있었다. 말이 끄는 수레가 그의 몸을 싣고 산으로 올라갔다. 작은 망아지가 어미 말과 관을 따라 내내 행복하게 뛰어갔다.” ―로버트 블라이(시인)‘ 나는 평생 이만한 시 한 편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좋다. 이 시집을 읽게 되어서. 이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나는 무엇이 부럽지 않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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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3 18:58

지혜로운 삶을 준비하는 원리, 3C(Curriculum, Community, Characteristic)

겨울의 끝자락, 봄의 기운이 슬며시 느껴질 때면 캠퍼스는 가벼운 설렘, 미래에 대한 가벼운 불안으로 가득하다. 졸업생들을 보내는 따뜻하게 배웅과 앳된 신입생들을 맞는 반가운 마중이 교차하는, 대학 일정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총장으로서, 삶을 앞서 살아온 선배로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삶에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는 말은 뭘까 깊이 고심하게 된다. 4차를 넘어 5차 산업혁명(Industry 5.0)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업과 사회의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AI와 로봇을 활용한 기술은 2023년 기준, 적게는 38.8%, 많게는 70% 이상의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했으며, 2030년까지 우리나라 일자리의 90%가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이 예측대로면 대학에서 배운 전공이 직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간은 채 10년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고 입학과 졸업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3C’를 갖추면 당당한 사회인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축사했다. 3C란 커리큘럼(Curriculum), 공동체(Community), 품성(Characteristic)의 앞 자를 딴 것이다. 남이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커리큘럼(Curriculum)이 있다면 다양하고 복잡해진 직업 세계라 해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AI 등 첨단기술 활용 능력, 다른 학문 분야 응용 전공지식 습득 등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자신만의 커리큘럼을 준비하여 변화하는 미래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다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협업공동체(Community)가 중요하다. 새롭고 혁신적인 프로젝트일수록 혼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함께 상의하고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나 스스로 열린 마음과 좋은 품성(Characteristic)을 갖추고 사람들이 함께 있고 싶은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사람 주변엔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자연스레 모이게 되고 서로 존중하며 협력해 나가면 시너지가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입학생들에게는 열린 마음과 긍정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같이 생활하고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접근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성공적인 대학 생활의 기본이자 행복의 기본 조건이 될 것이다. 축사를 천천히 되뇌어보니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적용해보면 좋을 듯 싶다. 다만 나이가 든 우리 세대는 우선순위를 바꿔 열린 마음과 좋은 품성(Characteristic)을 앞에 두고 협업공동체(Community), 인생의 커리큘럼(Curriculum)순으로 가치 기준을 달리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변에 친한 벗들과 접점이 점점 줄어들고,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낄 때 왠지 작아지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젊은 시절과 다른 색의 행복이 필요하고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지는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과 긍정적 태도를 지닌 좋은 품성(Characteristic)은 인생 후반을 잘 살기 위해 무척 중요하다. 좋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협력 공동체를 형성하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커리큘럼을 구성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은 언젠가부터 나를 이끄는 문구가 되었고 3C 즉, 좋은 품성, 협업공동체, 나만의 커리큘럼을 갖춘다면 누구나, 충분히 가능한 인생의 길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나의 학생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축사의 말이었지만 우리들에게도 필요하며 그 목표를 따른다면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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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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