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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인의 자성과 미래

흔히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 하거나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즉 생활을 담는 공간이기에 인류에게는 필수적인 존재이며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척도가 된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이후 건축이 자산적 가치를 지니면서 그 의미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변하였다. 부정적으로 변한 건축 이미지나는 건축학과 교수로서 요즘처럼 제자들을 보기가 민망한 때가 없다. 근래 한국건축계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아 이들에게서 밝고 원대한 직업인으로서 미래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 지난 얘기이지만 10여년 전에는 건축학과 지망생들의 성적이 공학계열에서 최고였다. 심지어 의과대학 수준을 추월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취업률은 고사하고 일부 학생들의 로망은 공무원이나 의학계전문대학원 진학이다. 꼬르뷔지에나 라이트처럼 위대한 건축가가 되는 꿈을 접고, 더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자 하는 것이 현실이다. 건축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 했는데 정말 사회상을 나타내는 계측기가 되고 있다. 국가발전의 원동력이었던 건설산업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다. 대도시 아파트는 줄서서 사려했고 부의 척도였는데 이젠 팔리지 않아서 난리다. 경향각지에 있는 건설사들은 부도가 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근자에 회자되는 몇몇의 사건들은 건축인들의 자존을 더 상하게 한다. 건설산업의 일환인 4대강사업은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고 숭례문 복원과정에서는 자조적인 한탄도 들린다. 천천히 강의 의미를 탐색하며 주요한 강부터 하나씩 정성들여 가꾸어 갔다면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시공사 선정과정에서 많은 전문가들이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고 있다. 서로 짜고 하는 게임이라고 누구나 쉽게 말한다. 이는 전적으로 건축인들의 탓이다. 우리나라 건축재료로서 가장 많이 사용돼 왔던 소나무는 마르면 조금은 갈라지고 단청은 벗겨지기도 한다. 일본의 삼나무나 편백나무에 비하면 더욱 수직 균열이 많다. 그러나 온 국민이 눈뜨고 바라보고 있는데 왜 그리도 조급하고 대충했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 보란 듯이 천천히 우리 건축장인들의 멋진 솜씨를 만천하에 보여줄 수도 있었는데 참으로 아쉽다. 이 또한 건축인들의 잘못이다. 건설분야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정말 뼈아프게 자성하고 새로운 사고를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국내에서 새로운 시장이 나타나지 않으면 외국시장이나 통일 후 북한지역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외국건설시장도 우리의 인건비가 높아 경쟁력이 없다. 인구 비례 건축학생수는 우리나라가 제일 많다 한다.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건축학과 학생들이 진출할 곳이 어디 있겠는가. 건축이 아름답지 않고 위대한 과업이 아니라면 어느 학생이 자신의 미래를 걸고 건축학과로 진학하겠는가.새로운 건축 장르 찾아내야그러나 기회는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우선 건축인들의 수효를 줄여가야 한다. 또 새로운 건축적 장르를 찾아내야 한다. 초고층건축에 대한 한국기술자들의 역량은 이미 세계적으로 입증돼 있다. 에너지 제로건축도 새로운 분야이다. 친환경건축과 지속가능한 건축도 가능성이 높은 분야이다. 정보통신과 접목한 스마트빌딩, 생체지향적 건축도 미래가 밝다. 특히 근자에는 도시재생을 통한 도심활성화 시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류 열풍으로 한옥건축도 세계시장을 넘나들고 있다. 온돌을 쓰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추운 나라에서 온돌만큼 매력적인 난방방법은 없다.사막에서 외화를 벌어들여 국가건설의 밑거름을 하였던 건설역군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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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29 23:02

대한 사람, 대한으로

해외에서 영주권을 가지고 살면서도 고국으로 돌아와 병역의무를 다하는 해외동포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해외 영주권자의 자진 입대 희망자를 위한 ‘영주권자 입영’제도가 2004년 실시된 이후 외국 영주권을 취득해 병역을 면제 받지만 자진 입대한 젊은이가 1000명을 넘었다.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이다. 극히 일부 이긴 하나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부당한 방법을 쓰는 젊은이들이 있는 요즈음 병역의무가 면제됐음에도 군 복무를 자원하는 것은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깊은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해외 영주권 있어도 자진 입대 많아자원입대하고자 귀국한 재외동포 젊은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군 생활을 통해 조국에 대한 자부심, 정체성을 얻기 위해 입대한다고 말한다. 많은 경우 부모님들의 권유가 있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훈련 중인 국외 영주권자들을 대상으로 입대동기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라는 응답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구촌 170여 국에 퍼져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각자의 거주국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는 애환과 그 들의 성공담은 늘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특히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젊은이들은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늘 안고 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고, 넘어야 할 숱한 고비가 눈앞에 펼쳐지는 시기에 고국에서 병역을 이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닐 테나 이들이 자원 입대한 것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얻은 결단이요 용기의 산물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관계로 우리말도 서툴고, 거기다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기도 쉽지 않을 것을 알면서 군 생활을 지원한다. 그들이 정말이지 대견스럽다. 물론 군복무를 하지 않은 영주권자들이 한국에서 취업이나 경제활동을 하는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군에 입대하는 것은 아니다. 고국에서 병역의무를 마친 젊은이들 대부분 다시 거주국으로 돌아가 학업이나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있다.애국심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체득하는 고귀한 가치라고 한다. 최근 한류 붐을 타고 젊은 재외동포들의 고국체험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군 복무까지는 아니더라도 방학을 맞아 병영체험을 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재외동포사회의 젊은이들이 조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조국을 알기 원하고 우리 공동체의 일부가 되기 원한다는 표시다. 이제 재외동포사회도 변화의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 이민 1세대들이 점차 현역에서 은퇴하고, 2~3세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고 있다. 현지에서 교육받고 현지문화에 익숙한 그들은 창조적인 변신을 통해 거주국의 주류사회로 진출하며 새로운 모습의 동포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700만에 이르는 재외동포들을 국가자산으로 삼아야 할 이 때 많은 젊은이들이 모국에 대해 깊은 뿌리의식을 지니고 정체성을 굳건하게 지키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이 여간 반갑지 않다.재외 동포도 한민족 공동체 일원국내든 해외든 어디에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한민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어디에 살든 우리 한민족 공동체의 일원이요 자랑스러운 대한국민인 것이다. 이제 재외동포를 그저 바다 멀리 떨어져 사는 동족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를 힘껏 부르는 그들을 민족의 영광을 함께 만들어 나갈 동반자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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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22 23:02

'원화 한류'를 기다리며

지난달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5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한국의 경상흑자는 총 422억 2000만 달러로 같은 기간 일본의 415억 3000만 달러를 제쳤다. 이것도 사상초유의 일이다. 10월 기준 외환보유액은 3432억 3000만 달러까지 증가해, 역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최근의 원화가치 상승은 이러한 한국 경제의 실적을 바탕으로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 경제를 믿는 마음이 반영된 측면도 있으므로 가슴 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약간의 뿌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원화가치의 상승은 수출업체들에게는 바로 수주 물량의 감소와 채산성의 악화를 의미하는 것이다.국제사회에서 원화로 지급 결제우리나라는 최근 인도네시아(100억 달러), UAE(54억 달러), 말레이시아(47억 달러)와 통화 스와프 협정을 맺었고 호주와 조만간 통화 스와프를 추진하고 있다. 종전까지 통화 스와프가 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확보해 두려는 목적이 강했던데 반해 이번 통화 스와프는 서로 자국 통화로 교환하는 LC(Local currency) 통화 스와프 방식을 통해 무역 결제 기능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8년 12월 중국과 체결한 560억 달러 상당의 한·중 통화 스와프도 위안화와 원화 간 스와프 방식이다. 한국은행 김중수 총재는 지난달 25일 공식석상에서 "중국이 23개국과 스와프를 맺어 위안화 시장을 만든 것처럼 최근 3건의 통화스와프 체결은 원화 국제화란 큰 길에서 작은 걸음을 뗀 것"이라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바가 있다. 한국은 한 해 수출입이 1조 달러를 넘는 세계 8위 무역대국이지만 원화 국제화가 이뤄지지 않아 무역대금의 결제에 막대한 거래비용을 부담해 왔는데, 이제 원화 결제가 확대되면 환리스크 축소와 더불어 거래비용 절감효과도 기대된다. 원화의 국제화란 우리나라 통화인 원화가 가치저장 수단과 지급결제 수단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원화가 결제 수단으로 인정 받는 것과 가치저장 수단으로 인정 받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외국의 수출업자가 원화로 수출대금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그 원화를 투자할 수 있는 국채시장이 획기적으로 확대돼야 할 것이다. 미국 달러화의 경우 발행액의 40~60% 가량이 외국에서 국제화폐로 수요되고 있다고 한다. 원화발행액 중에서 국제화폐로 통용되는 금액이 증가하는 만큼 국채시장이 확대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국채시장에 외국투자자의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국내 자본시장에 유동성이 공급되는 것이고, 국채시장에서 발생한 유동성은 각 단계의 금융시장으로 파급돼 전체적인 금리인하를 가져오는'원화 국제화 특수'가 기대된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시뇨리지(Seigniorage) 효과' 라고 한다. 국민 자부심 매우 커질 것으로 기대외국인들이 가치저장 수단, 지급결제 수단으로 널리 인정해 원화의 국제화가 나날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보다 낮은 인플레이션과 보다 낮은 환율변동성이 필수적이다. 이 또한 정책당국에는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지만 국민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덧붙여 원화의 국제적 통용으로부터 오는 국민적 자부심은 그 가치를 얼마로 셈 할 것인가? 현재 세계 경제는 새로운 균형을 모색하며 시계가 불투명하다. 불투명을 극복하고 위기를 기회로 삼는'원화 한류'를 기다린다. △금요칼럼 필진에 새로 참여한 옥성수 센터장은 연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퍼듀대(Purdue University)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을 지냈으며 지난해 8월부터 부산경제진흥원 경제동향분석센터센터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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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5 23:02

청와대 대문의 일본식 석등 철거하라

대한민국 권력의 최고 심장부 청와대 대문에는 일본식 석등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통미술사에 의하면, 궁궐이나 민가에 석등이 설치된 전례가 한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의하면, 석등은 묘지나 사찰에서만 발견될뿐이다. 석등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조명기구가 아니라 죽은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종교적 이유'로 설치되는 구조물이다.야스쿠니 신사 양식과 비슷다시말해 청와대 대문의 석등은 최소한 우리 문화적 전통에서 볼때는 대단히 이질적인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좀더 심도 있게 살펴보면 우리는 청와대 대문의 석등양식이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일본 신사의 양식이란 사실과 조우하게 된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궁궐건축은 일본식 조경에 많이 오염될 수 밖에 없었고, 해방이후 궁궐의 일본식 조경문제는 사회문제가 되어 지속적으로 철거 되어 왔다. 최근에도 창덕궁 앞의 일본식 석등, 환구단의 일본식 석등, 국립서울현대미술관의 일본식 석등 등이 잇달아 철거된 것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청와대는 원래 조선시대 경복궁의 일부였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에 청사(廳舍)를 신축하면서 1927년 오운각(五雲閣) 외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이곳에 짓는다. 따라서 역사적 경위를 고려할 때 , 청와대가 일본식 조경에 오염될 여지가 많았고, 실제로 이미 학계와 문화재청에 의해 '일본식 조경'문제가 지적된 사항이었다. 그러나 다른 궁궐의 일본식 조경이 철거되거나 개선된 것에 반해, 청와대의 일본식 조경문제는 아직까지 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흐름들에 힘입어 나는 2013년 1월 청와대의 석등에 대해 철거를 요청하는 소장을 서울중앙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청와대 석등이 일본식 석등으로부터 파생한 것인지에 대해 문화재청에 사실조회를 신청했었다. 문화재청은 석등은 궁궐조경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사찰과 묘지에만 나타나는 점, 일본 신사에 출입문에 석등이 설치된다는 점, 그리고 청와대 석등이 일본 신사의 석등과 유사성을 일부 보이는 점 등을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끝내 청와대 석등을 철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의 한 사람이 정부기관의 구조물에 대해 철거를 신청할 민사상의 권리가 있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되돌이켜 보면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시점에도 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상대로 무모한 소송을 진행했던 적이 있었다. 국과수에 보관된 여성생식기 표본을 폐기하라는 소송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일제시대 유명한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표본을 보관하고 있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명월관 기생 명월이가 사망한 뒤, 일본 경찰이 성적인 호기심에 의해 , 명월이의 생식기를 절취, 인체 표본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확인 결과 소문은 사실이었다. 나는 성적 호기심에 의해 여성 생식기를 표본으로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반인권적 행위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표본의 파기와 장례절차를 봉안해 줄것을 사법부에 요청한 것이었다. 사법부는 국과수에 대해 표본의 파기를 하는것이 좋겠다는 화해권고를 제시했고, 국과수는 이를 받아 들여 여성생식기 표본을 파기했다. 재판에는 졌지만 이른바 패배가 결국에는 승리로 이어진 셈이었다. 한국미 풍기는 전통 솟을대문 기대청와대의 정문은 우리나라 얼굴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와대 정문이 솟을대문과 같은 모습으로 건립된다면, 경복궁의 풍광과도 어울릴뿐만 아니라 전통의 한국미를 고상하게 풍겨낼수 있지 않을까?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의 전통양식을 배제하고, 굳이 일본 야스쿠니 신사같은 일본식 석등을 언제까지 그곳에 남겨 놓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즉각 항소를 결정했고, 조만간 고등법원에서 청와대 일본식 석등 철거의 2차전을 준비중이다. 문득 언젠가 청와대 앞길에서 한국미가 물씬 풍기는 전통 솟을 대문을 만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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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8 23:02

인생이라는 긴 여행

지난여름 이름하여 회갑여행을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평소에 가고 싶은 곳을 숙의하던 중 서유럽의 박물관이 있는 대도시를 가자는 데 동의하고 10여일만에 여기저기를 주마간산격으로 점 만 찍고 다녀왔다. 뒤늦게 사진을 정리하며 여행지를 되돌아보니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여기를 또 갈까 하는 생각에 아쉬운 느낌도 든다. 여행 자체가 좋아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그냥 허둥지둥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이 차분히 보고 느끼고 올만큼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냥 허둥지둥 살아가는 것이지 여행처럼 선택하고 준비하고 나중에 스스로 되돌려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운 생각이알랭드 보통은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고 말했다. 비행기나 배, 기차보다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사이에는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유도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어려운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에 따라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빅토르 위고는 '여행이란 지극히 아름답고 너무 커서 좁은 시야를 벗어나 버리는 어떤 것'이라고 말했다. 여행은 새로운 것에 눈을 뜨는 것이다. 따라서 여행은 우리의 삶에 다양한 의미를 준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의 삶이라면 여행만큼 역동적으로 풍부하게 드러내준 것은 없다. 일상에서의 벗어남, 만남과 헤어짐, 현실과 로망, 새로움에 대한 열망, 일과 생존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자주 나타나는 문제는 기대와 현실의 관계와 간극이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 특히 누구와 함께 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숱한 문제와 접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조언들이 있지만 어디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가? 모두 자신의 몫으로 던져진다. 여행을 위해 몇 권의 책을 보았다. 특히 설혜심 교수의 〈그랜드투어〉는 여행의 의미를 알게 하는 귀한 자료였다. 최초의 여행은 정복자들의 전쟁였고 무역을 위해 동서양을 건너는 모험도 있었다. 서양역사에서 최초 여행자는 그리스인 헤로도토스이다. 그는 발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본 것과 들은 이야기들을 꼼꼼히 기록했다. 또한 순례자들은 예루살렘과 로마 등 성지를 속죄 차원에서 순례여행했다. 특히 영국인들에게 있어서 여행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에 콤플렉스를 느껴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엘리트교육의 최종단계였다. 애덤 스미스는 영국 젊은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에 보내지 않고 곧 외국여행을 시키는데 대단히 발전돼 귀국한다고 여행의 가치를 평가했다. 여행으로 삶의 긴 여정 준비그런데 우리네 청년들은 어떤가. 취업을 위해 자신의 스펙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도 여행의 참 의미를 새겨 또 다른 여행에 도전해 봐야 할 때다. 실크로드를 걷고 차마고도를 넘어보며 히말라야 계곡을 트래킹해본 자가 영어를 잘하는 자보다 더 창의적 사고를 하고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잠재적 능력이 있지 않을까? 아프리카에 봉사여행을 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평화운동 여행을 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위해 진정 의미 있는 준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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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1 23:02

한상(韓商), 글로벌 코리아 기수

19세기말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 목사이자 동양학자 그리피스(W. E. Griffis)는 조선에 한 번도 와보지 않고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만 의존해 조선역사에 대해 글을 쓰고 책명을 '은둔의 나라 조선(The Hermit Nation Corea)'이라 붙였다. 은둔이란 단어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나 결국 그가 서양에 소개했던 조선은 쇄국으로 빗장을 걸어 잠근 무기력한 이미지의 나라였다. 그리피스가 무역으로 세계 10위권 국가경제 규모를 만들어낼 진취적인 기상이 우리 핏속에 흐르고 있었음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다시 태어나 세계 5대양 6대주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부를 일구고 있는 우리 한인들의 모험 정신을 본다면 한국을 운둔의 나라가 아닌 어떤 나라로 소개할지 궁금하다.175개국 700만 동포 활동 활발한상(韓商)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5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이민사에서 한상은 1960년대 미주지역으로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출현했고 8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성장했다. 한상은 아직 전체적으로 경제규모면에서나 영향력에 있어 세계의 대표적인 민족 네트워크인 중국의 화상(華商) 이나 유대인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 비해 짧은 기간 중 한상이 보여준 성장세는 참으로 놀라울 정도다.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 일본에서 성공한 한상들은 물론이지만 아프리카 오지를 비롯해 극도로 치안이 나쁜 중미지역, 문화적인 어려움과 제약이 그 어느 곳보다 심한 중동 지역, 보통사람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서태평양이나 카리브해의 조그만 섬나라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서 수 없이 많은 한상들이 우리 민족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근면 성실함으로 현지에서 뿌리내리고 경제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앞으로 한상이 성장할 잠재력은 무한하다. 개개인의 역량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현재 세계 175개국에 퍼져있는 700여만의 재외동포를 연결하는 세계적 차원의 한민족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국내경제와 연계될 때 그 시너지 효과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런 한상들의 가장 큰 비즈니스 교류의 장인 제12차 세계한상대회가 '창조경제를 이끄는 힘, 한상 네트워크!' 슬로건 아래 29일부터 사흘 간 광주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 해외 한상 1000여명, 국내 기업인 2000여명이 참석하는 이번 대회는 식품외식, 첨단 IT, 섬유 패션 등 분야에서 기업 전시회, 일대일 비지니스 미팅, 국내 중소기업들과 멘토링 세션과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에서 온 한상들과 국내 경제인들이 전문정보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상생발전 방안을 모색하고'한민족 경제인 네트워크'의 확장을 도모하는 소통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45세 미만의 한상들의 교류모임인 영 비즈니스 리더 네트워크(YBLN) 활동이 본격화 되면서 젊어진 한상대회가 될 것이며, 이들이 국내 청년 기업인들과 함께하는 모임은 모국과 재외동포사회가 상생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글로벌 한민족네트워크의 비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29일 광주서 제12차 한상대회오늘날 세계화 조류 속에서 국가 간 경계는 흐려지고, 민족 간 유대가 강화되고 있다. 또한 국가보다는 지방자치정부, 기업, 개인이 경제활동 주체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모든 나라가 해외에 있는 자신들의 민족 집단 의미와 가치에 대해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는 이유다. 얼마 전 이민관련 학술모임에 참석차 서울에 온 한 그리스 학자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계화시대에 세계를 아우르는 민족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한민족 동포사회는 한국의 미래에 큰 축복이라고 했다. 한상들이야 말로 국가경제영토 확장의 상징이요 글로벌 코리아의 기수다. 제12차 한상대회의 성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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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25 23:02

다양한 개성을 꽃 피우기 위해

팔공산 부근의 후배 시인 집에서 야생화를 구경하고 온 적이 있다. 7월말 정원은 스산한 느낌이었다. 상사화나 도라지꽃, 산나리꽃을 몇 송이 보았을 뿐 만개한 무더기꽃은 볼 수가 없었다. 화원의 주인은 40여년 야생화를 가꿔온 고수답게 야단스런 수사로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 않았다. 모든 꽃은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 화원은 넓이의 한계가 있어 필요한 것을 그 꽃의 특성에 맞게 심고 그 특성에 맞게 관리한다는 것, 재배할 자신이 없는 꽃을 아무 곳에서나 구해 와서 심어놓고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잔잔하게 설명했다. 들꿩나무는 물을 많이 요구하고 산수국은 수정이 되고나면 돌아앉고 능소화는 독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식물들은 저마다 다른 특성이 있다. 양지를 좋아하는 꽃이 있고 음지에서도 잘 피는 꽃이 있다. 계절 따라 피는 시기도 색깔도 모양도 다른 것이 꽃이다. 획일·서열화 교육, 개성 발현 방해돌아올 때 내 등 뒤에 흘리던 말이 지금도 여운으로 남아 있다. 옛날에는 분에 담아 키워서 가끔 선물로 했지만 지금은 줄 수도 없고 주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왜 주고 싶지 않다고 했을까? 우선 자기만큼 꽃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애지중지 키운 꽃의 미래를 맡기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화원은 철저한 계획 하에 짜여진 것이어서 어느 꽃 하나도 빠져나가면 전체의 조화가 깨어져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가꾸어온 많은 꽃들은 그 꽃 각각의 특성으로 그 화원의 아름다움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는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꾸 되새겨 진다. 가령 우리 한국시단에 시인이 너무 많다고 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아서 좋을 수가 있다. 다만 그 많은 시인들이 존재해야할 이유를 증명할 만한 개성적인 작품을 쓰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이 경우는 화가에게도 음악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할 기준이다. 대가들의 흉내를 내는데 평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 아예 시인이나 화가나, 음악가라고 하기엔 부끄러울 만큼 못 미치는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자기만의 향기를 지닌 작품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자명한 이치를 다시 되뇌며 곰곰이 주위를 살펴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건 개성의 발현을 오히려 방해하는 일들이 대세처럼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대학에서 취직 안 되는 학과들이 퇴출되고 있다. 철학과, 독문과, 불문과에서 드디어 국문과까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좋건 싫건 여러 사정을 살펴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까지 안정을 찾기 어렵다. 로스쿨, 의학대학원의 출현은 그 영향력이 가히 태풍급이다. 바람직한가? 이런 세태에서 열심히 한 길로만 가면 된다고 충고한들 묵묵히 자신의 길로 갈 수 있을까? 다양한 가치 추구해야 인생이 풍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 그 다양한 가치야말로 인생의 풍요로움과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서열화를 부추긴다. 획일화를 부추긴다.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는 학생에게도 성적이 우수하면 법대를 가게하고, 물리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학생에게도 의대 지망을 강요한다. 결국은 권력을 쥐고 돈을 버는 학과를 학생에게 강요하여 스스로 가고 싶은 길을 막는다. 여기에서 획일화의 무서운 부작용을 발견하게 된다. 스스로의 미래를 꿈꾸며 설계할 학생의 모습이 희미해진다. 문득 야생화를 그 특성에 따라 심고 가꾸던 팔공산 그 화원의 주인이 더 크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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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8 23:02

도쿄에 잡혀간 조선 국왕의 투구를 보다

한마디로 좀 놀랐다. 지난 1일 설레는 마음으로 도쿄 국립박물관 동양관 전시실을 들어 섰을 때, 그토록 바라보고 싶었던 조선 국왕이 착용한 '대원수 투구'가 전시돼 있었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황금 용문양과 백옥 장식을 넘어서 거기에는 분명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투구를 직접 보기 직전까지 이것이 조선왕실에서 대대로 고종까지 전래된 '조선 대원수 투구'임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섞어서 질문하던 기자들조차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투구에 서린 장엄한 아우라는 군신(軍神)의 수호가 함께 하는 제왕의 투구임을 분명히 느끼게 했다. 국내에는 한 점도 존재하지 않았던 완벽한 형태의 투구를 결국 찾아 냈구나! 바로 이 투구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데 무려 3년의 노력이 필요했다. 돌이켜 보면 기적과 같은 사실의 연속이었다. ■ 일본 도굴왕 목록서 '임금 투구' 확인2010년 10월'조선왕실의궤 반환 절차'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도쿄에 갔을때, 문화재 환수운동의 협력관계에 있는 도쿄 고려박물관 이사 이소령 선생에게서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일제강점기 도굴왕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직접 유물의 출처를 기록한'오구라 컬렉션 목록'이란 책을 구했다고 했다. 이소령 선생이 보여준 책을 펴자 마자 나는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의 용봉문 투구에 대한 출처부터 확인해 보았다. 오구라는 이 투구가 '조선왕실 전래품'이라고 기재해 놓았다. 그때까지 막연한 추정만 있었던'제왕의 투구'가 문서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이 기록은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 근거까지 제시해 주고 있었다. 조선왕실의 소유품이라면 개개인의 매매로 유통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궁내부장관'이란 부서가'조선 왕실의 유물과 재산을 관리했기에, 허가없이 왕실 물건이 민간이나 해외로 유출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하물며'임금 투구'와 같이 상징성 큰 물건이 매매돼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도굴 혹은 절도가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였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오구라 컬렉션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조선 대원수 투구'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하고 이 투구의 특별열람과 공개를 신청해 왔다. 그리고 여기에 더 큰 명분을 갖기 위해 일본 시민단체들과 연대하는 한편 고종의 후손인 황사손 이원씨를 찾아가 함께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해 왔다.지난 2월 중순 나는 일본 사람 8명과 동시에 도쿄 국립박물관에 열람신청서를 접수하고, 더 이상 공개를 거부한다면'정보공개 청구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최후 통첩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도쿄 국립박물관으로부터 뜻밖의 낭보를 전달받았다. 지난 1일부터 12월 23일까지 한시적으로'조선 대원수 투구'를 공개하겠다는 통보였다. 드디어 조선 최고 군 통수권자인'대원수 투구'를 직접 보게 되겠구나! 나는 어린아이 처럼 몇 달간 마음이 설레어 하루하루를 손꼽아 기다리며 도쿄로 향했다. ■ '조선 대원수 투구' 귀환을 기다리며대원수 투구를 본 뒤 일종의 놀라움과 분노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가시지 않는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군 최고 통수권자의 투구를 어떻게 탈출시켜야 하는가! 끝도 없는 고민을 놓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다. 도쿄에서 조선 국왕을 만난 분노는 아무래도 가시지 않고, 무심히 방관하는 우리 정부에 대한 원망이 피어 오른다. 무턱대고 나는 도쿄 국립박물관에 아래와 같은 짧은 편지를 보냈다. 마음이 아프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 것일까!"일본 국민의 양심에 묻습니다. 나는 왜 일본에 있는 것입니까? 나는 한때나마 조선의 국왕이었습니다." - 조선 대원수 투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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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1 23:02

우리의 행복지수가 말해주는 것

국민의 행복감 정도를 조사하는 전문 기관들이 발표하는 국가별 행복지수 순위는 그야말로 들쑥날쑥이다. 우리나라는 지난달 발표된 유엔의 2013년 세계행복보고서에서 조사대상 156개국 중 41위를 기록했다. 그 이전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갤럽 조사에서는 146개국 중 97위를 한 적도, 몇 년 전에는 100위 밖으로 벗어 난 적도 있다. 한편 이번 유엔 보고서는 가장 행복한 국가들로 덴마크를 위시한 북유럽 국가들을 꼽았는데, 영국 신경제재단(NEF)은 오래전부터 부탄, 방글라데시, 파나마, 쿠바 등 동남아와 중남미 저개발국을 행복지수 상위권의 국가로 평가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을 행복지수 150위, 개인소득 4만 불의 싱가포르를 최하위 권으로 평가한 기관도 있었다. 이는 조사기관의 평가기준이나 조사방법이 다른 탓이겠으나, '당신은 행복 합니까?' 라는 질문에 응답자들이 각각 해석하는 행복의 의미가 다른 것에도 그 이유가 있다. 문화권별로 가치와 관습이 다르고, 또 행복이란 지금 내가 처한 상태에 대한 감정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이웃에 비해 어떠하며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문화와 관계없이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질 높은 삶, 좋은 건강, 안정된 미래를 위해 많은 소득과 사회적 성취를 원한다. 그런데 얼마만큼의 재산과 성취에 만족하는가 하는 것은 다분히 상대적이다.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밀(John S. Mill)은 사람은 '부자'가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부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듯 우리는 그것이 재산이던, 명예이던, 성취감이던 내가 가진 것을 내 주변 이웃의 것과 비교하여 만족감 또는 불만을 느낀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남과의 차이를 더 의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이니, 경쟁의 룰이 공정하지 못한 사회라면 상실의 불만은 분노로 변하고 사회의 행복지수는 더욱 떨어 질 수밖에 없다. 어제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 대한 비교도 개인의 행복감을 좌우한다. 사람은 과거보다 좋아진 나를 발견할 때 만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에 대한 비교이다. 수십억 원의 로또 당첨자의 행복감이 대부분의 경우 짧게 끝나고 마는 이유는 로또 당첨 행운과 함께 온 재산과 변화된 생활방식이 앞으로의 행·불행의 비교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연봉인상, 승진, 결혼, 주택구입 등 행복해 질수 있는 요건을 이루었을지라도, 이 성취는 조만간 평소의 상태가 되고 성취에서 왔던 만족감은 이내 사라진다. 그리곤 다시 지금의 자신과 앞으로 예견되는 자신을 비교하고 미래에 기대를 갖거나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은 행복 하다. 당연히 미래에 낙관적인 사람이 많은 사회의 행복지수는 높다. 유엔의 보고서를 작성한 컬럼비아 대학 지구연구소가 북유럽 국가들을 톱5로 판단한 것도 이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성장 잠재력과 복지제도가 국민들로 하여금 미래에 낙관적일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한편 시장경제의 경쟁구조가 초래하는 불평등에서 오는 갈등과 불만은 사회적 통합과 공동체 의식을 저해하며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되기 어렵다. 미국, 영국을 비롯한 적잖은 경제대국들이 국력에 비해 의외로 낮은 행복지수를 기록하고, 반면에 일부 저소득 국가들의 행복지수가 높게 평가되는 것은 국가 전체의 행복에 있어 사회적 평등과 온전한 공동체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행복지수 평가 결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때만이 사회 구성원의 행복감이 높은 공정사회로 가는데 요구되는 법의 지배, 도덕과 윤리, 관용과 개방의 가치를 구현 할 수 있다. 물질만능의 풍조 속에서 우리는 흔히 경제성장을 단순히 소득의 문제로만 생각하기 쉬우나 지속적 경제성장은 금전의 문제를 넘어 전반적인 사회발전에 필요조건이 된다. 정체된 경제에서는 사회 구성원 간 양보와 타협, 협동이 어렵게 되고 이런 상태에서 불평등 해소, 공동체 의식 함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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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04 23:02

길로 소통하다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참으로 많은 길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당시 로마가 세계최강국이었기 때문에 모든 인적 물적자원이 중심인 로마에 있고 이들이 서로 지역을 달리해 쉽게 통한다는 의미다. 사실 로마의 길은 원래 군사적이고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제국 로마를 통치하는 방법은 법과 군사력에 의한 엄격한 규율이었다. 따라서 제국의 이해와 권위에 반하는 경우 신속하게 군사를 이동시켜 이를 굴복시키는 것은 석재로 잘 포장된 도로였기에 가능했다. 이 길이 결국 상업을 위한 길이 되고 사람들이 많이 소통되자 자연스럽게 로마식 문화를 전파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흔히 비단길이라고 부르는 실크로드는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을 이어준 육해교통로를 말한다. 총길이 6400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길은 중국 중원지방에서 시작해 하서회랑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변을 따라 파미르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말이 실크로드이지 목숨을 건 머나먼 행로였다. 이 길은 처음에는 전쟁을 위한 길이고 문물을 거래하는 길이며 종교적으로는 포교의 길이 됐다. 실크로드가 처음으로 열린 것은 前漢(기원전 206-기원후 25) 때다. 한무제는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장건을 중앙아시아에 파견했는데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및 지중해의 동편에 이르는 서방 각지와 문물이 왕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절과 민간인의 왕래는 문물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고 구법승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많은 인도승려들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오기도 했다. 기독교가 번성했던 중세이래 유럽인들은 크고 작은 많은 순례지들을 돌아 다녔다. 그들에게 성지순례는 살아있을 때나 죽고 나서 속죄를 위한 중요수단이 됐다. 본인이 신체적으로 불편하면 대리인을 보내기도 했다 한다. 어디로 순례를 다녀왔는가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는데 예루살렘이 최고의 등급이고 로마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그 다음 등급이었다. 특히 북부 유럽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순례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고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스페인 북부의 모든 길은 이곳으로 이어졌다. 순례자들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있다는 대성당을 찾았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750㎞에 달하는 여정을 도보 순례를 하고 있다. 장대한 산악지대와 고풍스런 마을들, 숲으로 뒤덮인 길을 걸어 성지에 도달하는 영적 희열은 대단하다. 우리에겐 어떤 길이 있었을까? 요즘 경주에서는 문화엑스포의 일환으로 경주와 이스탄불을 잇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있다. 중국 서안에서 출발하는 실크로드가 아닌 경주에서 시작점을 잇는 실크로드다. 일본에서는 해양 실크로드라 하여 역시 일본까지 잇고 있다. 8세기의 신라승려 혜초는 요즘의 인도인 천축을 다녀와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행문을 썼다. 파미르고원을 넘고 타클라마칸사막을 건너 40여개국을 돌아보고 기록한 것이다. 경주에는 서역인의 모습을 하는 석상(石像)이 있고 신라시대에는 서역의 물건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한반도 서측의 해안에 형성된 고대 해양로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잇는 길은 가장 활발한 문물의 교통로였다. 고대에는 육지에 가까운 해안을 따라 항해해 중국에서 한국에 까지 약 2주정도 걸렸다한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조류와 풍향에 따라 2, 3일 이내에 도달하기도 했다. 신안 해저에서 발견된 배에서 수많은 송대 도자기가 실려 있어서 많은 상선이 드나들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길은 여기저기 생기기 마련이다.요즘 사회의 여러 현상이 모두 막혀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막힘은 단절이요 이어져 뚫림은 소통인데 어찌 모두 닫고 살려 하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홀로 있지 않고 남과 연계속에서 소통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가치가 서로 이어져야 더 높은 가치를 낳는 것이다. 정치는 대화가 중지됐고 경제는 선순환이 되지 않아 계층간에 갈등이 심하니 국민의 삶이 갈수록 어렵다. 국민들의 얼굴이 근엄하고 웃음이 적은 것도 소통이 잘되지 않음일 것이다. 소통으로 길을 열 지도자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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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27 23:02

노산과 가고파

노산 이은상, 현대시조 개척의 선구자다. 특히 1932년 발표된 「가고파」는 김동진이 작곡해 고향이 어디에 있건 향수에 젖어들면 누구나 부르곤 하는 국민 애창 가곡이다. 이 노래가 발표된 지 81년만인 올해 허인구 마산역장은 문화적 관문으로 역의 분위기를 가꾸고자 하는 의욕에서 남마산로타리클럽과 힘을 모아 「가고파」시비를 세웠다. 그러나 민주성지 마산을 부르짖는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시비 존폐문제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차제에 「가고파」시비 존립의견을 지지하는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갈등 종식에 조그마한 지혜를 보태고 싶다.첫째 「가고파」는 작가의 생애보다 작품에 포인트를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산의 관문인 마산역에 「가고파」시비를 세운 뜻은 정감 있고 아름다운 마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노산의 생애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국민이 알고 함께 부를 수 있고, 미항마산의 모습을 잘 알릴 수 있는 시로 「가고파」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둘째 노산은 친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때 '친일혐의' 운운하면서 워낙 많이 언론에 오르내려서 지금도 노산을 친일인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은상은 올려있지 않다. 1903년에 태어나서 1982년에 타계한 노산의 일생을 살펴볼 때 일제통치 36년이 그대로 그의 생애를 관통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인사는커녕 오히려 일본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른 애국투사였다. 셋째 노산은 권력에 연연한 인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노산의 중요 프로필을 보면 대학교수, 언론사 간부, 문화단체 회장을 지낸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시조시인 협회장, 한국산악회 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예술원 회원, 이충무공 기념사업회 회장 등 정치권력과는 먼 거리에 있는 단체에서 봉사했다. 그가 권력에 집착했다면 장관이나 총리, 국회의장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넷째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대체로 옹호하는 입장에 섰지만, 그의 일관된 진심은 민족사랑, 조국사랑이 바탕이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노산은 일제하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 조국을 잃고 젊은 날을 보낸 그에게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산문, 그의 시조 편편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펼치며 문필생활을 영위했다. 그가 친정부적이었고 독재옹호에 기여했다는 비판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노산의 편에서 바라본다면 억울할 수 있는 것이다.다섯째 3·15에 대한 노산의 견해를 지나치게 비판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마산 일부 시민단체가 노산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3·15에 대한 노산의 태도에 대한 불만이다. 그 불만의 근거가 되는 기록은 1960년 4월 15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마산 사건의 수습책'이란 제목의 기사다. 여기에는 6개 항목의 설문에 대한 국가 원로들의 답변이 실려 있다. 이은상은 다른 원로들과 다른 태도에서 답변을 내놓고 있다. 다른 태도란 가장 적극적인 답변을 했다는 점에서이다. 가령 어떤 원로는 답변을 회피했고, 어떤 원로는 극히 단순하게 답했다. 고향을 생각하는 노산은 사실상 정부의 총사퇴를 주장하면서도 고향 마산사람들에게 피해가 최소화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3·15가 민주주의 역사의 발자취로 인정받고 교과서에까지 기록된 지금 우리가 보는 3·15와는 다르게 그 당시의 혼란스런 정국 속에서의 노산의 심정을 배려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노산은 조국과 고향 사랑의 마음을 가장 절실하게 시조의 가락에 담아낸 시인이라는 점이다. 「가고파」, 「가윗날에」, 「옛동산에 올라」가 고향사랑의 노래라면 「길이 끝났네」, 「고지가 바로 저긴데」, 「기원」 등은 조국사랑의 노래다. 수많은 강연과 산문 집필을 통해 청년들에게 국가관을 심어주었고 스스로 국토의 구석구석을 밟으며 노래로서 의미를 새겨 놓았다. 그러나 노산인들 한 인간으로서 어찌 결함이 없었겠는가. 우리가 지금 「가고파」시비를 지키려함은 완전한 노산의 생애를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고향을 사랑하고 각박한 현대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시정(詩情)에 젖어가며 오늘의 고달픔을 이겨나가자는 데 있다. 이런 소중한 의미라면 돌에도 마음에도 새겨 간직함이 옳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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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13 23:02

경복궁 이승만 대통령 낚시터

지난해 7월 청남대에서는 '건국의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를 즈음, 그와 관련된 희귀 사진들이 대거 공개됐다. 우연히 이승만 대통령의 희귀사진들을 보다가 나는 뜻밖에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대통령이 창덕궁 정자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와 낚시하는 사진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이 대통령의 낚시 취미에 대해 깊이 있게 조사했고 재미있는 가설에 도달했다.이 대통령의 일생은 낚시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이 대통령과 관련된 우스개 소리중 그 유명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란 아부도 낚시중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이 농담은 이 대통령이 진해에서 낚시를 즐기던 중 있었던 일로, 지금도 그 곳은 이 대통령 별장과 정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5호)로 잘 보존돼 있다고 한다. 화진포에 있는 이 대통령 별장도 낚시와 뗄 수 없는 장소다. 이 대통령이 휴양을 위해 찾았던 화진포 별장에는 생전 유품들을 복원해서 생동감있게 전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족들이 기증한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이 사용하시던 낚시대가 전시되어있다. 이곳 화진포 별장에서 즐겨 낚시를 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전시하고 있는 듯 했다. 이 대통령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던 날도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일 아침 오전 8시경 대통령은 창덕궁 후원에서 낚시를 하던 중, 황급히 달려온 국방무 장관으로부터 북한의 남침사실에 대해 보고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그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던 4·19 의거에도 낚시가 있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전국민의 분노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던 4월 11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 도중 사라진 17살의 남학생의 주검이 발견됐다. 어떤 낚시꾼이 마산항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시위중 실종됐다고 알려진 김주열 군이었다. 당시 김 군의 주검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참혹한 상태였다. 김주열의 죽음은 부패한 정권에 대한 분노의 폭발점이 되어, 마침내 4·19를 통해 12년간 장기독재하던 이승만 정권의 숨을 끊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에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한뒤 병사할때까지 낚시로 소일했다고 한다.최근 나는 이 대통령의 낚시취미 때문에 문화재청과 논쟁중이다. 경복궁 경회루 옆 하향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는 조선시대 지어진 정자가 아니라 이 대통령의 낚시질을 위해 지은 정자란 소문이 있었다. 최근 설마 진짜 그러기야 하겠냐는 반신반의 심경으로 문화재청에 사실확인을 요청해 보았다. 정말 햐향정이 조선시대와 아무런 연관없이 이 대통령이 낚시를 위해 지은 정자가 맞는가를 확인해 달라는 취지였다.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사실이었다. 경회루 옆 하향정은 조선시대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이후 이 대통령의 여가와 휴양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대통령이 낚시질을 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나를 더욱 의아하게 만든 것은 아직도 하향정이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현실이었다. 경복궁 복원과 보존에 대한 문화재청의 행정원칙은 1894년 경복궁 중건 당시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런 고증자료 없이 경복궁의 원형에 일방적으로 손상을 가한 대통령의 낚시터는 마땅히 철거돼야 할 것이 아닐까? 게다가 하향정이 마치 조선시대 궁궐의 일부였던 것처럼 아무런 설명없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0보를 양보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경회루에서 낚시질 하기 위해 정자를 지었다는 것은 그다지 흔쾌한 일은 아닌 듯 싶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동안 경복궁 경회루 옆에 잘 있었으니 그 또한 역사의 일부이고 소중히 보존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그도 그럴법 하다. 그렇다면 썩은 이빨은 왜 뽑고, 보기싫은 흉터는 왜 성형수술을 해야 하는걸까? 썩은 이빨과 보기싫은 흉터도 자신의 몸의 일부이고 인생의 자취일진데, 왜 사람들은 제몸을 함부로 뽑고 고치려고 하는 것일까?경복궁의 하향정은 우리 시대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른바 헌법 전문에 규정한 대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해서 세워진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지.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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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06 23:02

새 시대를 여는 한민족 네트워크

네트워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개인·기업뿐만 아니라 국가·민족까지도 네트워크를 통하여 소통의 기반을 넓혀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네트워크는 또 다른 네트워크를 낳고, 수많은 네트워크가 모여 하나의 허브를 만들고, 서로 다른 허브들이 연결되어 더 큰 네트워크를 만든다. 이제 사람들이 국경과 국적, 시간과 공간, 언어와 문화, 심지어 이념과 종교의 벽을 넘어 작은 것 하나라도 공감하고 공유하는 개방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1+1=2로만 인식되던 것이 100도 되고 무한대도 되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사회적 연결고리'가 활성화된 결과이다.그런 시각에서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보자. 150여 년 전, 당시 조선사회에서 전개되었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하에서 어쩔 수 없이 내 나라를 등져야만 했던 해외 이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제법 큰 규모의 집단 이주지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은 국권상실과 함께 졸지에 외지에서 나라 없는 백성이 되고 만다. 일제 강점기에도 강제 동원, 강제 이주, 징병 등등의 이유로 원하지 않는 해외 이주가 계속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되었지만 이들은 남북이 갈라지고 국경이 가로막혀 돌아오려야 돌아올 수 없었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사람들의 해외 이주는 계속되었다. 해방 전 이주는 자기의사에 반한 이주였거나 국내사정이 워낙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강제이주라면 해방 이후의 이주는 보다 나은 삶을 찾기 위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해외 이주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과 그 후예들이 오늘날 전 세계 170여 개국에 720만 명에 이른다. 태평양 바다 건너에서, 중앙아시아와 동북만주에서, 일본열도에서, 그리고 5대양 6대주 이역의 땅에서 우리와 아무런 관계없이 살고 있을 걸로 생각했던, 나라를 떠난 이들과 그 후손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뿌리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쿠바의 한인 후손 3~4대들이 인천의 이민 박물관을 방문하여 100여 년 전 제물포를 떠났던 선조들의 사진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면은 그들이 이제 모습은 달라졌을지언정 우리와 뿌리를 같이하는 한민족의 후손임을 말해 준다. 또 특기할 만한 것은 한인들 대부분이 어느 곳에서건 할 것 없이 각자의 거주국에서 성실과 강인함으로 수난과 차별을 극복하고 주류사회 속으로 꾸준히 파고들어 오늘날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그들은 모국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글로벌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 변화·발전하고 이제 국가의 경제영토를 확장하는데 소중한 자산이 될 역량을 갖추고 있다. 아직 우리 주변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들어 재외동포사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재외국민용 주민등록증 발급, 복수국적 허용연령 확대, 우수동포인재유치, 한글교육 및 한국문화·역사교육 확대, 분야별 전문네트워크 확충 등 재외동포를 싸안으려는 정부의 노력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해외동포를 품어야 한다는 국민공감대도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역이민동포, 국내체류·취업동포, 영주귀국동포, 국적취득동포, 국제결혼가정자녀 등 다양한 유형의 디아스포라를 글로벌 한민족공동체라는 큰 틀 안으로 통합하려는 뜻있는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이 그것이다.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의미와 잠재력에 대하여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정부는 국익과 국민행복의 관점에서 정책과 사업의 우선순위를 재검토하고, 재외동포의 정체성과 뿌리의식을 함양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이미 구축해 놓은 재외동포사회 내 각종 네트워크를 더욱 확대하고 모국과의 연결밀도를 더욱 정교하게 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에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더 큰 대한민국, 희망의 새 시대'의 든든한 후원군으로 역할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사고와 시각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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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30 23:02

근대유산과 인문학을 통한 도시재생

인간이 집짓기를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안전하고 편리하며 아름다운 집을 원하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곤충과 같은 동물에게도 집짓기 본능이 있듯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건축물을 만들겠다는 열망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종교적 건축물을 웅장하고 높게 짓고 군주들의 묘지를 장대하게 조성하려는 시도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 사람이 몰리면서 교통및 주거 환경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현재 세계적으로 50% 수준인 도시화 추세도 20년 후가 되면 75%에 이를 것이라 한다. 인간이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세계를 원하는 것은 항상 있어 온 일이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는 경제적으로 공유하고 종교의 자유를 제공하는 도시 왕국을 꿈꾸었다. 그가 제시한 이상적인 도시 구조는 자급자족하면서 인구를 통제하고 같은 건물 내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가 제시한 논지 중 상당수는 근대적 도시계획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도시 공간이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9세기 말 영국의 하워드는 전원과 도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자족적인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황폐화된 삶의 공간을 개선하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건축가 라이트가 '브로드 에이커 시티'라는 이상 도시안을 내놓았다. 저밀도 도시에 거주자 모두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헬기를 대중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도시다. 입체화된 도로에 철도, 화물수송차. 모노레일 등이 운행되고 도심이 따로 없는 도시다. 학교와 그 주변에 화랑과 공연장을 겸한 작은 공원이 마련되어 있다. 전기, 석유, 가스 등 에너지는 배급을 받고 그린벨트 기능을 하는 수목 띠로 자연 환경을 보호한다. 이 모든 계획을 지방분권적 행정조직 내에서 건축가가 계획하고 관장하는 도시를 이상형으로 그렸다.이런 혁신적인 사상가와 건축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 속의 도시는 실패를 거듭했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한 도시들은 작은 공간 안에 엄청난 사람과 건물을 몰아넣었다. 도시는 확장을 거듭하고 전통적인 도시는 공동화를 거듭하면서 정체성을 잃어 갔다. 이처럼 도시는 오랜 세월과 더불어 생겨나고 변해 가는 공간이다. 도시의 품격은 사람과 공간, 전통과 일상 문화가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그 속에서 역사가 싹트고 삶의 흔적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 때 기품이 더해지는 것이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앞으로의 도시개발은 기존 시가지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의미 있는 정책 대안이다. 그동안 지방도시들은 인프라가 좋은 신도시 쪽으로 인구가 집중되는 추세를 보여 왔다. 그 결과 구도심이 공동화되고 내부 불균형이 심화되는 현상을 빚었다. 하지만 역사 유적을 활용한 구도심의 활성화는 이미 세계적으로 실효성이 입증된 사례가 많다. 전통공간을 문화적으로 재생시켜 주변을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근대건축이나 유적도 그 몫을 크게 하고 있다. 인천과 군산, 목포 등은 일제강점기의 항구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대전의 경우도 철도청 옛 관사를 활용한 구도심 활성화가 진행 중이다. 통영의 동피랑은 벽화로 명소가 되었다. 붉은 벽돌로 만든 근대적 건축물 외에도 소금창고와 골목길, 교도소 등등,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은 엄청나게 많다. 최근 유럽은 문화예술로 도시를 재생하는 추세다. 철도역사를 재생시킨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이나 발전소를 문화공간으로 바꾼 영국의 테이트모던미술관을 언급하는 것 등은 벌써 한물간 얘기들이다. 요즘 떠오르는 화두는 인문학이다. 인문학으로 현실의 도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다. 최근 광주의 푸른길을 살리자는 공동체에서는 폐기차 안에서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몇 시간 강의로 전체 인문학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을 배제시킨 건축과 도시공간에서 인간중심으로 함의와 접점을 끌어내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생성원리에 대한 고민 없이 일방적으로 조성되어 온 우리의 도시들. 그 양적 성장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 가는 과정 속에서 인문학이 해법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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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23 23:02

한 여름밤의 영웅론

가끔 밤하늘에 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유성을 발견할 때가 있다. 아, 또 지도자 한 사람이 세상을 뜨는구나. 혼잣말로 탄식한다. 그런 상상력은 유년 시절 어른들이 들려 주신 이야기가 갖게 한 것이다. 여름이 되면 별식을 만들어 함께 먹으면서 식구끼리 멍석이나 마루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곧잘 옛 얘기를 해 주셨다. 귀신이나 호랑이, 도둑 얘기도 하셨고 권선징악의 고전도 스스로 스토리를 꾸며 가며 흥미를 돋우어 주셨다. 때로 그 이야기 담당이 아버지가 되거나 형님이 될 때면 이순신, 을지문덕, 강감찬 또는 세종대왕, 링컨, 간디 등 다양한 인물들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우리는 그런 영웅들의 얘기를 들으며 꿈을 꾸었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대였지만 그런 얘기들이 꿈을 심어 줬다. 삭막한 세상을 건너면서 허방에 쉽게 빠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영웅을 닮고 싶었던 소박한 소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웅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탄생될 수 있지만 대체로 수난의 시대에 나타난다. 주권을 상실한 나라, 민권을 탈취당한 독재정권하, 전쟁과 기아상태에 있거나 민족이 곳곳에 흩어진 불행한 나라, 이런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 그 어둠을 헤치고 일어서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여 존경을 받게 되는 사람이 영웅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영웅의 탄생이 어려워졌다. 대체로 많은 나라들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정이 운영돼 명분 없는 전쟁을 할 수가 없고 매스컴의 발달이 한 개인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용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내면까지 낱낱이 밝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정상적인 나라의 국민들은 영웅이 출현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또 아무나 영웅이라 말할 수도 없다. 토머스 칼라일은 영웅의 조건으로 성실성과 통찰력을 들었다. 그래서 평생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는 소신을 실천한 걸인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영웅으로 인정하면서도 통찰력이 부족한 나폴레옹은 인정하지 않았다. 동서양이 인정하는 현존하는 영웅이 있다면 그 호칭에 가장 적당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 답변으로 만델라를 든다면 나는 기꺼이 찬성할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실시한 최초의 평등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뽑힌 만델라는 필생의 목적을 성취한 90대 중반의 유네스코 친선대사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도했던 인물이다. 감옥생활 26년 만에 출소하여 62%의 지지로 대통령이 되자 진실과화해위원회(TRC)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과거사를 청산하여 국가에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흑백차별이 지나쳤던 나라에서 민주화와 안정은 세계평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경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영웅이 과연 필요한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민주화가 많이 진전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가 되려면 모든 국정이 시스템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런 기반을 갖춘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투른 영웅적 오버액션이 평안을 깨뜨릴 수도 있는 나라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고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다. 적지 않은 충돌이 해마다 일어날 뿐 아니라 상대는 이제 핵으로 위협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집단이다. 그럼에도 우리 민족은 하나같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고 그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민족에게 국군포로 귀환, 개성공단의 정상화,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관광문제 등 적지 않은 현안이 쌓여 있을 뿐 특별한 묘안은 없다. 신뢰를 쌓아 가면서 상호 협조해야 하지만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할 경우 좌시할 수 없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또 어떤 묘안으로 한 겨레 한 나라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통일이 되는 날 칠천만 동포는 그 선봉에 섰던 가장 헌신적인 지도자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것이다. 그런 영웅이 출현한다면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영웅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고민하고 땀 흘렸던 우리의 동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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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16 23:02

도산서원 대통령 기념식수는 가짜

학창 시절 도산서원에 간적이 있었다. 거기서 거짓을 행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했던 조선시대 올곧은 선비정신에 대해서 들었다. 그리고 천원짜리 지폐의 뒷면에 그려졌던 나무 '금송'을 기억한다. 금송의 표지석에는 " 이 나무는 박정희 대통령각하 께서 청와대 집무실앞에 심어 아끼시든 금송으로서 도산서원의 경내를 더욱 빛내기 위해 1970년 12월 8일 손수 옮겨심으신 것입니다" 라고 새겨져 있다. 거기서 나는 친구들과 유명한 나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던 추억이 남아 있다.2011년 나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도산서원 관련 파일을 읽다가 도산서원의 금송이 혹시 가짜가 아닌가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결국 나는 문화재청과 안동시에 도산서원에 심어진 금송이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인지의 여부를 묻는 사실조회를 신청했고, 두 기관은 고심 끝에 ' 현 금송은 1973년 4월 22일 새로 구입한 것을 원위치에 재식수한 것' 이라고 답변했다. 국기기록보존소에 보존된 문서에 의하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금송은 2년만인 1972년 고사했고, 현 금송은 안동군이 당시 예산 ₩500,000원을 들여 한국원예건설을 통해 1973년 심은 나무로 판명되었다. 대통령 기념식수가 관리소홀로 고사하자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해 몰래 새 금송을 심은뒤, 지금까지도 사실을 은폐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도산서원의 금송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일본 특산종이란 이유로 여러차례 구설에 올랐었다. 금송은 소나무가 아닌 낙우송과로 일본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이며 일본 왕실과 사무라이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점에서 화폐의 도안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도산서원의 경관을 가리는 등의 문제로 안동시는 2003년 금송을 이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문화재청은 금송이전에 대해 '대통령 기념식수'라는 이유로 이전할 수 없다고 반대, 실행되지 못한 적도 있었다.충격이었다.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40년간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 안동시가 2003년 금송을 이전하겠다고 했을 때, 문화재청은 가짜란 걸 알면서 왜 대통령 기념식수란 이유로 이전할 수 없다고 했던 것일까? 2011년 12월, 문화재청은 금송 앞의 표지석을 철거하고, 새로운 표지석을 설치했다. 바뀐 표지석에는 '이 곳은 1970년 12월 8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청와대의 금송을 옮겨 심었던 곳이나 1972년 고사(枯死)됨에 따라 1973년 4월 동 위치에 같은 수종(樹種)으로 다시 식재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표지석 철거후 나는 또 다른 의문에 사로잡혔다.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가 아니라면, 일본 특산종 나무는 왜 거기 있어야 하는걸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법원의 결정을 묻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2013년 8월 1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는 도산서원 금송 철거 여부를 놓고 재판이 열린다. 논점은 2003년 안동시가 제출한 금송의 이전승인신청에 대해 문화재청이 '대통령 기념식수'란 이유로 이전금지 시킨 것은 부당한 행정행위란 취지이다. 도산서원의 금송은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것이 아니라 안동군수가 심은 나무임이 밝혀진 지금, 문화재청은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나무가 무슨 죄냐고? 이건 나무이야기가 아니라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퇴계 선생이 평생 실천하고 가르친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無自欺)' 란 말이 무겁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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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09 23:02

백범 김구 선생의 꿈을 생각하며

국가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꿈을 꾼다. 1776년 대서양 연안에서 출발했던 신생 미국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도달하는 꿈을 꾸었고, 그로부터 70년 후 멕시코와 전쟁 끝에 지금의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5개주를 매입함으로서 20세기 팩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열었다. 우리에게도 꿈이 실현되었던 위대한 역사의 장이 많다. 멀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대정복과 신라의 삼국통일 위업도 꿈의 결실이고, 가까이는 1960년대 잘 살아보세 꿈과 80년대 민주화의 꿈은 오늘의 발전된 한국의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중국도 꿈을 꾸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작년 11월 당 총서기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한 '중국의 꿈'(中國夢)을 천명하였다. '중국의 꿈'이 아메리칸 드림과 같이 13억 모두가 잘살고 행복한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해석도 있고, 중국 전래의 유교문화와 공자사상의 회복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시 주석이 '중국의 꿈'을 발표한 장소가 국립박물관이라는 사실이 내용보다 더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국립박물관은 아편전쟁(1840)이래 중국이 서방 열강에 의해 당했던 '굴욕의 세기'를 공산당이 영광스럽게 만회했음을 가르치는 선전의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꿈'이 어떤 함의를 갖던 그 것이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거인의 귀환과 같이 불안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한편 일본의 아베 총리가 꾸는 꿈에는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있다. 작년 말 재집권에 성공한 이후 아베 총리가 보인 대외침략 부인 발언,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허용 등 우경화 행보는 그의 역사 인식이 퇴행적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더욱이 지난달 참의원 선거 압승으로 상하원을 다 장악한 아베의 자민당이 이른바 보통국가로 가기위한 평화헌법 개정과 같은 국수주의 기치를 더욱 노골적으로 내세우지 않을까 걱정된다. 만에 하나 중국의 정책에서 패권주의적 색체가 엿보인다면 우리는 우려와 이의를 제기해야하며,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조짐에는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역 내외 국가들과 공동 대응하는 외교적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가 되어야하는가" 에 대한 답을 우리 스스로 찾는 일이다. 과연 우리의 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해답을 백범 김구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919년 3.1 운동이후 4반세기 동안 중국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며 해외독립운동의 본산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45년 8.15 해방이후 혼란의 좌우대립 속에서 민족자존과 독립사상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분투하였던 백범이 꿈꾸었던 나라는 민족이 하나 되어 문화로 융성하는 나라였다. 그러기에 선생은 "몸이 반으로 갈라질지언정 허리 끊어진 조국은 차마 볼 수 없노라" 절규했고, "한없이 갖길 원하는 것은 경제력도 군사력도 아닌 오직 높은 문화의 힘" 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21세기, 더욱 빠르게 진전되는 세계화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생존경쟁의 단위로서 민족의 개념이 중요시 되고 문화와 지식이 한 나라 국력의 척도가 되고 있다. 분단을 극복하고 하나 된 우리민족이 창의문화로 우뚝 서길 바랐던 백범의 꿈이야 말로 참으로 오늘 이 시대를 예견한 혜안이요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평생 교육자로 자처했던 선생이 저서 〈백범일지〉를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로 마무리 지으며 글 끝에서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 호소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들리는 요즘이다. 이달 17일(음력7월11일)은 백범 탄신 137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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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8.02 23:02

환갑 즈음에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벌써 환갑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60갑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지만 자꾸 이를 거부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다들 건강하고 오래 사니 환갑이라 하여 어디에다 명함도 못 내놓는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음은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늙어감이다. 어느덧 눈도 침침해지고 다리에 힘도 없고 인지능력도 많이 떨어져 간다. 제자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자꾸 섭섭함을 느끼는 것이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나이 예순에 이르자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하여 이순이라 하였는데 아무리 보통사람이라고 하여도 난 도무지 그렇지 않다. 명색이 교수이고 이제 손자까지 보았는데 오히려 화를 더 자주 내고 잘 토라지고 갈수록 어린 애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적은 일에도 자주 토라지고 서운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젠 욕심을 버리고 적당한 위치로 물러나 자족하고 은둔하듯 지내야 할 터인데 아직도 꼭 이름 석자를 어딘가에 올리려 하고 가지고 갈 수도 없는 재산을 모으려 한다. 이런 나의 모습이 마치 떨어지려는 밧줄이라도 잡고 바둥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불편하다. 나보다 생일이 빨라 이미 환갑을 지낸 아내는 이미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인인 아들 내외는 일생 아들만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온 엄마 환갑엔 전혀 관심도 없었다. 엎드려 절 받는 것처럼 내가 며칠 후면 엄마 환갑이야! 라는 정보를 미리 주어 겨우 몇 푼 용돈을 받아내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어떤 친구는 자식들이 유럽여행을 보내주었다, 누구는 수백만 원짜리 가방을 사주었다, 구구절절 다 섭섭한 얘기만 듣고 슬퍼하는 아내의 입장이 오히려 이해가 되었다. 예전엔 거의 아들과 동지적 입장에서 공감하였던 내가 이젠 아내의 편이 되었다. 아니 더 솔직히 얘기하면 나도 몇 달 후면 환갑이 되어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 아들 편이 되지 않고 아내와 동지가 된 것이다. 우리가 어찌 키운 자식인데 말이야! 자식들 다 필요 없어 우리 둘 뿐이야! 응, 알았지?사실 난 몇 년 전부터 노후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있다. 건강관리, 정년 이후 일거리 찾기, 악기연주와 합창단 활동, 환갑 이벤트준비, 아내가 모르는 비자금 모으기 등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였다. 물론 계획보다는 반 정도만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열심히 운동을 하여 아직 정기건강검진에서 지적받는 사항이 거의 없다. 일자리 찾기는 포기하였다. 내가 정년 이후에 돈을 버는 일을 하려 하면 제자들과 부딪치기 때문이다. 색소폰은 몇 달 연습하다 자연스레 그만 두게 되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연습장소 구하기가 어려웠다. 합창단 활동은 내가 선택한 큰 행복이다. 4부 혼성합창은 화음도 아름답고 남녀가 함께하니 즐겁기도 하다. 환갑 이벤트로 해외여행을 가려한다. 아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선택하여 좀 럭셔리하게 해주고 싶다. 그러나 경비가 만만치 않아 자식들의 도움이 필요한데 얘기도 꺼내지 않는다. 아내가 모르는 비자금을 모으다 정말 혼이 났다. 남자만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선배님들의 충언에 몇 년간 모은 돈을 몽땅 털리고 또 배신감에 분해하는 아내에게 부도덕한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이를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나의 환갑 즈음의 푸념은 남들이 보면 염장 지른다고 할 속없는 호사가 아닌가. 아직까지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것도 65세까지 해먹는(?) 직업으로 평생 공부하며 가르치는 행복함이 얼마나 큰가. 나를 평생 웬수라고 부르는 아내가 곁에 있어 더욱 행복하다. 얼마 전에 태어난 손자 놈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이제 그동안 잠시 쉬었던 성당에도 다시 나가려 한다. 갈 곳이 없는 탕아가 다시 왔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느님이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화를 내고 토라지는 것은 자기 콤플렉스라고 한다. 근자에 나의 못난 마음과 행동은 늙어감을 또 부족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 현명하다면 이만큼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 천 교수는 고려대대학원 건축공학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문화예술특성화사업단장, 영산강연구센터 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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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26 23:02

철없는 철새들

젊은 영혼의 편력을 도시적 감수성으로 노래해서 화제가 되었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쓴 최영미 시인이 새로 펴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에는 '한국의 정치인'이란 작품이 있다. '대학은 그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고/기업은 그들에게 후원금을 내고/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병원은 그들에게 입원실을 제공하고/비서들이 약속을 잡아주고/운전수가 문을 열어주고/보좌관들이 연설문을 써주고/말하기 곤란하면 대변인이 대신 말해주고/미용사가 머리를 만져주고/집안 청소나 설거지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도대체 이 인간들은 혼자 하는 일이 뭐지?)'지나치게 직설적이어서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여기 그려진 현실은 당연히 작품 속의 '가상 현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 속의 가상 현실을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실제의 풍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 시에 공감하는 독자가 많다. 깨어 있는 일부 정치인들이 이런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꾸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안타깝게도 눈에 뜨이는 성과가 별로 없다. 또 이 풍경이 중앙정치의 한 단면일 뿐이라고 우기는 사람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주기가 어렵다. 학식도 인품도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예사로 주는 지역 대학들이 있고 무소불위의 파워로 제왕적 지자체장을 지낸 뒤 사법 처리되는 경우를 우리는 허다하게 보아 왔기 때문이다.지금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풍이 불기 시작했다. 지역 정가의 미풍은 태풍을 예고하는 신호다. 텃새들은 텃새들대로 새로운 일전을 준비하고 있고 철새들은 철새들대로 성공을 꿈꾸며 조심조심 끼어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텃새라고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철새라고 굳이 내칠 필요도 없다. 여러 지역, 여러 기관에서 경험을 쌓은 눈 밝은 철새들이 있다면 근시안적이고 비전 없는 텃새들보다 훨씬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 때만 고개 숙이고 찾아오는 철새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을 더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첫째, 당신은 정말 이 지역을 사랑하는가. 둘째, 당신은 이 지역에 대한 사랑만큼 철저한 공부를 하고 왔는가. 셋째, 중앙정치의 어떤 힘만을 믿고 지역 일을 맡으려는 것은 아닌가. 넷째, 이 일을 맡게 된다면 스스로도 행복하고 지역민도 행복해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당신은 봉사하는 습관이 있는가.흔히 외지에서 갑자기 날아온 철새들의 수사는 상투적이다. 이 지역이 고향과 같다고 한다. 제2의 고향이라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는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는 지키기 어려운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금력이 유일한 실력인 철새의 경우 정작 일전을 벌이게 되면 룰과 관계없이 심각한 위법행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중앙 정치에 연줄을 대며 우쭐거리는 철새는 대개 지역 관리 대리인 수준이다.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마스터키를 가진 권력자가 어디 있는가. 대부분 이런 철새들은 허풍과 비현실적인 공약을 남발한다. 지역 단체장이 되거나 의원이 될 사람은 지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직무를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 그런 자세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습관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 따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울러 열과 성을 다해서 주민들의 신임을 얻으면 자연히 권력자가 된다. 자기가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가질 수밖에 없는 영향력이 권력이다. 직무와 관련된 공권력과 주민의 신임으로 얻게 되는 영향력이 합쳐지면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생긴다. 그 힘을 자제하고 현명하게 쓸 줄 아는 지혜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철저한 자기 검정도 없이 권력의 맛을 보려고 뛰어드는 철새가 있다면 철없는 철새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유권자들은 벌써부터 그런 철새들을 가려내기 위해 조심조심 눈과 귀를 열어 놓고 있다. △ 이 이사장은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2008년 가람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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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19 23:02

LA박물관 조선왕실어보는 도난품

2010년 이후부터 미국 LA로 건너간 조선왕실의 어보(御寶)의 행방을 추적 중이다. 현재 LA의 주립 박물관에 전시중인 이 어보는 높이 6.45㎝, 가로, 세로 각 10.1㎝ 크기로 거북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어보에는 조선 11대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를 가리키는 '성열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중종의 아들인 명종이 1547년 "경복궁 근정전 섬돌 위에 나가 '성렬인명대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리고 덕을 칭송하는 옥책문과 악장을 올렸다"는 실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서울 종묘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어야 할 조선왕실의 어보가 어떤 이유로 LA까지 흘러가게 된 것일까. 어보의 존재가 밝혀진 것은 2010년의 여름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미국지역에 있는 한국 문화재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LA의 주립 박물관에 소장된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정부는 6·25를 전후한 시점에 이 어보가 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경위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문화재청은 "LA주립 박물관 소속 학예사로부터 수년 전 한 개인 수장가한테서 어보를 구입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상세한 과정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다. 재단 기금으로 구입한 합법적인 소장품이어서 반환은 불가능한 것으로 안다"고 소극적으로 밝힌 박물관 측 입장까지 들었다. 그 무렵 필자는 미국 메릴랜드에 있는 국가기록원을 방문, '아델리아 홀 레코드'라는 이름의 문서 전문을 입수했다. 미국 국무부 소속 아델리아 홀 여사가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문서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불법으로 미국으로 흘러간 문화재 현황과, 그 문화재들을 본국으로 반환한 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6·25전쟁 당시 한국에서 문화재를 약탈한 미군 범죄에 대한 조사 보고서와 반환 경위에 대한 사항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 마이크로필름 4 :774에는'한국의 도장(Korean official seals)'이란 이름의 파일이 있었다. 그 안에는 1956년 5월 21일 아델리아 홀 여사가 당시 양유찬 주미 한국 대사와 전화로 나눈 통화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조선왕실어보 47개가 미군에 도난 당했다고, 신고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의 보물이 사라졌다'는 제목의 신문기사도 수록되어 있었다. 1953년 11월 17일 볼티모어 선 신문에 실린 기사였다. 양유찬 주미대사는 이 기사를 통해 "47개의 조선왕실의 도장이 미군에 의해 도난당했으니 행방을 아는 사람은 주미대사관으로 신고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후 필자는 '문정왕후 어보를 되돌려 달라'는 내용의 반환요청서를 수차례에 걸쳐 LA 주립박물관에 보냈다. '6·25 전쟁 중 미군이 약탈한 문화재인만큼, 본국으로 돌려주기 바란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LA 주립박물관 측은 답이 없었다. 무심하게 세월만 흐를 뿐이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희망이 없는 싸움처럼 보였다. 지난 1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현지 교포들과 문정왕후 어보를 되찾기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 교포 회원들과 LA주립박물관 앞에서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 측에 문화재를 돌려 달라'고 외치는 시위도 벌였었다. 국내에선 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LA소장 문정왕후 어보 반환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정치권의 호응이 뒤따랐다. KBS에선'미국에서 찾은 국보'란 이름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TV로 방영하는 등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각계 여론이 빗발치자 LA주립박물관도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난달에는 LA 박물관 측으로부터 "아직 한국정부로부터 문정왕후 어보가 도난품이란 어떤 지적도 없었다. 만약 문정왕후 어보가 도난품이 확실하다면 관련된 증거를 제출해 달라"고 대답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뿐만 아니라 11일 오전 (현지 시간) LA주립 박물관 당국자와 면담 약속까지 받아 냈다.이날 면담에서 문정왕후 어보를 반환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아델리아 홀 레코드 등 각종 증거자료들을 제시할 예정이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도 움직인다'고 했던가. 오는 27일로 다가온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비록 민간 차원이지만 전쟁 당시 약탈된 문화재 반환협상이 시작된다. 과연 문정왕후 어보가 다시 우리 민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면 내 가슴이 뛴다. 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를 깬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 혜문스님은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사무처장으로 활동중이며 2012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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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1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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