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동학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우리는 군주사회를 차치하고라도 100년 가까이 자유를 꿈꿔왔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두근거리는 터다. 결국 자유민주주의, 자유무역에 목매게 되었다. 자유가 억압되었던 처절한 역사 경험에서 얻은 하나의 병폐는 허울 좋은 ‘자유’라는 형식적 이념에 옥죄게 된 것이다.
본래 ‘자유주의’라는 고전적 정치경제이념은 철옹성 같은 군주적 국가의 통제 완화를 주장하는데서 출발한 것으로 안다. 그러기에 자유주의의 이념은 그간의 공공이념인 다수의 행복을 위한 사회적 통제-개인의 끝없는 욕망을 불허하는 공공성의 토대-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공의 선이라는 사회적 상식(커먼쎈스)이 물처럼 통하는 사회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는 명맥이 가능했다.
우리의 경우, 군사개발독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 아래 건강한 사회적 통념-전통적인 대동사회의 커먼쎈스-을 파괴 시키며 수많은 국민을 희생 시켰다. 우리사회의 ‘자유’는 모두의 자유가 아니었다. 기득권자, 그들만의 잔치였다. 진정한 자유경제사회는 강을 건넜다.
오늘의 자유무역협상도 자신들만의 잔치 자리에 있던 이들과 그 후손들만의 자유일 뿐이다. 잔치집 밖에서 은행문턱 넘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대부분의 국민에게는 강 건너 잔치가 아니라 희생제사가 될것이다. 자유시장, 자유경쟁의 논리는 그 본래 자유라는 형식과는 달리 극소수 국가와 기득권자들의 절묘한 이기심의 발로로 변질되었다. 경쟁의 대열에 서지도 못하는 다른 이들과 다른 국가들의 핸디켑을 무시하는극단적 이기심의 발로다.
흔히 자본주의의 발상을 유럽의 중산층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생활에서 찾는다. 스위스 깔뱅의 종교적 이념을 따르는 후예들은 근면과 절제라는 윤리적 삶에 충실했고 그에 따르는 재물의 축적에도 성실하였다. 그들은 부(富)를 이루게 되었고 그 부를 자본으로 전환하는 경제적 활동을 통하여 결국 이윤추구가 종교적으로 정당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깔뱅주의자들의 삶은 끝없이 이윤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발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스위스의 깔뱅주의 신학자인 에밀 부른너는 이런 해석에 반기를 들었다. 본래 깔뱅주의를 따르는 종교사회는 근면, 절제, 저축으로 부를 축적하게 되지만 그 부는 반드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하는 철저한 종교적 명령 속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절제하였다. 이들은 축적된 ‘부’ 앞에서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극복해온 신념에 한계성을 드러내게 되었다.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폐기하고 말았다. 부의 원천으로서의 자본형성과 투자에 따르는 이윤창출의 현실을 정당한 신앙덕목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이념은 부패한 이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FTA협상은 무한 경쟁의 세계경제판에 편입되기를 바라는가? 세계자유시장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혈안이되어 상대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극단적인 이기집단의 전장이다. 이 마당에 국민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한 세기 동안 싸워 온 ‘자유’는 물론 ‘생존’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으로 세계적으로 편만한 부패한 이기심을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다.
/이영호(동학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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