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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칼럼] 전북이 꼭 기억해야 할 사람 - 김영원

김영원(전주박물관장)

전북이 역사적으로 내세울만한 구체적인 대상이 누구이고, 또 무엇인지. 몇 달 전부터 문서, 책자 등의 관련 유물과 유적들을 살피던 중 박물관에 근무하는 우리들에게 뛸 듯이 기쁜 일이 생겼다.

 

다름 아닌 전북을 대표할 인물과 관련된 유물들이 여러 점 우리 국립전주박물관에 기증된 것이다. 이 인물은 조선시대의 묵암(墨巖) 이계맹(李繼孟, 본관 전의全義) 선생이다. 선생은 세조 4년(1458) 전북 여산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성장했고, 중종 18년(1523) 김제에서 돌아가셨다.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친 관운이 남다른 분이다.

 

묵암 선생이 거친 관직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라도·경기도·평안도의 관찰사, 한성부 좌윤, 예문관 제학, 형조· 예조·호조·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등. 이렇듯 선생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필자는 선생의 또 다른 업적을 부각하고 싶다. 그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며 고려 왕을 4명이나 죽였다'는 중국 명나라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은 점이다. 선생은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명회전(大明會典: 명나라 법전)'에서 잘못된 기록을 발견하고 조정에 보고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597년(선조 30) '대명회전'의 잘못된 기록을 고치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에 대한 중국 역사의 잘못을 고치기까지 조선은 건국 후 무려 200여년이 걸렸다.

 

만일 중국 역사에서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조선 왕실의 계보를 돌이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이 고려되어 선생은 돌아가신지 70년 가까이 지난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선생의 행적은 대외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로 세운 공로로 높이 평가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봐도 달리 평가될 수 없다.

 

선생에 대해 기록한 '묵암선생실기(墨巖先生實紀)'의 행장(行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선생은 사람됨이 맑고 가지런하며, 대범하고 기개가 빼어났다. 안으로 강하고 밖으로 조화로웠으며, 지조를 지켜 한결 같았다.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이 사귀려 했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모두 심취했다. 주변에 사정이 급한 사람이 있거나 환난이 닥치면 반드시 힘써 도왔다.' 또 '세상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선생의 인품은 시류(時流)에 민감한 현대인들에겐 호흡을 조절할 여지를 준다. 선생의 국정을 처리하는 자세에 대해선, '반드시 여러 번 살펴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히 마땅한 결론에 이르게 했다.'고 소개했다.

 

김제에 있는 선생 묘소의 신도비는 창강(滄江) 조속(趙速 : 1595~1668)이 김제 군수로 있으면서 1648년에 세웠다. 조속은 조선 후기의 서화가로도 이름난 분이다. 신도비의 글은 충절로 유명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짓고, 조속이 글씨를 썼다.

 

태조 이성계의 역사를 바로 잡은 묵암 이계맹. 그래서 더 전북이 기억해야 할 묵암 선생. 그 최초의 전시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4월 7일~5월 17일 개최된다.

 

/김영원(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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