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찬영(전주대 사회과학대학 교수)
지난 주 서울에서 학회가 열려 다녀왔다. 이번 학회에서는 차기 회장을 선출하는 총회가 열렸다. 대개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점심까지 1박 2일로 열리는 학술대회의 토요일 분위기는 썰렁했다. 특히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일수록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번 총회는 차기 회장 선출이 있어서, 토요일 점심시간을 넘기며 진행됐지만 비교적 많은 회원들이 남아 있었다.
학회장 입후보자는 3명이었다. A후보는 정년퇴임이 임박한 원로교수로서 부회장을 포함하여 학회의 모든 요직을 거쳐, 이제 마지막으로 학회장에 도전하는 분이었다. B후보는 자신의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데, 그 대학의 학과에서 가장 선임교수였고, 이번 학술대회를 자신의 대학에 유치하였다. C후보는 원로교수들이 돌아가며 나눠먹는 식으로 학회장을 맡아 학회가 부실해졌다며 학회개혁을 요구하는 소장파 회원들이 추대하여 출마한 50대 초반의 교수였다.
총회 전날 밤, A후보의 대학 후배들이 모여 그에게 명예롭게 퇴진하시라고 간곡하게 읍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A후보는 투표 직전 거행된 정견발표를 통해, 자신의 과거 업적과 공약을 밝혔다. 매우 자신있고 여유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후배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후보를 사퇴한다며 울먹였고, 자신의 뜻을 기억해 달라는 호소를 보냈다.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그에게 화답하였다.
접전을 벌인 결과 결국 C후보가 6표 차이로 B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많은 동문들을 대거 신규회원으로 가입시키는 동원전략으로 자기 대학에서 치러지는 선거에서 당선을 노렸던 B후보는 고배를 들고 말았다. 당선된 C후보는 다른 후보들의 공약을 적극 수렴하여 좋은 학회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아무튼, 이 날 가장 많은 지지와 환호를 받았던 것은 당선자보다 사퇴를 결단했던 A후보였고, 많은 회원들은 총회장을 나서면서 A후보의 용기에 대해 칭찬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뒷풀이 자리에서 4?29 재선거 이야기가 나왔고, 필자가 함께 한 연유 때문인지 전주 재선거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정동영과 민주당 이야기, 정동영-신건 연합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전주보다 서울에서 더 알려진 민주당 김근식 후보 이야기도 나왔다. 저마다 입장에서 다양한 소견을 밝혔지만, 대개 일치하는 얘기는 이번 재선거의 돌아가는 모습은 썩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선거는 공약이나 정치적 의제에 대한 토론은 없고, 누가 출마를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누가 공천을 받아야 하는가 받지 말아야 하는가, 공천을 못 받으면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하는가 하는 쟁점만 난무하였다. 결국, 전형적인 편가르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도대체 국회의원을 왜 뽑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조차 있다. 역대 선거에서 공약이라는 것이 대개 부실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번 재선거에서는 유난히 심한 것 같다. 유권자의 표는 출세주의자나 싸움꾼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헌신할 각오와 준비가 구체적으로 갖추어진 후보를 선택하여 뽑아야 하는 것이다.
민의를 받아들여 기꺼이 학회장 후보를 사퇴한 원로교수의 모습과 저마다 표를 호소하는 전주 재선거 후보자들의 면면이 겹치면서 입 안에 씁쓸한 맛이 돈다.
/윤찬영(전주대 사회과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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